정배 관원이 관직에 복귀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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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배 관원이 관직에 복귀하기까지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2.11.19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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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윤선도, 위리안치에서 사후 복관까지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윤선도(尹善道)는 남인 가문으로 태어나 현종 때 서인에게 강력하게 맞선 인물이다. 그는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禮論) 문제로 송시열(宋時烈)에 맞서다가 서인의 강력한 공격을 맞아 함경도 삼수 땅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는데, 이후 전라도 광양현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석방되었다. 또한 그가 사망한 이듬해인 1672년(현종 13)에는 복관(復官) 명령이 내려지기에 이르렀다. 윤선도에 대한 처벌 조치가 어떤 과정을 거쳐 차차 감면되어 복관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고산유고(孤山遺稿). 조선시대 시조시가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남인 정치인 윤선도의 시문집, 규장각 소장.

조선왕조에서는 전국 각도에 정배(定配)된 죄인들을 도류안(徒流案)이라는 장부에 기록하여 지방관의 감시를 받도록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관직에서 파직되고 원찬(遠竄), 안치(安置) 등 처분을 받아 지방에 정배된 관원들은 죽을 때까지 해당 배소(配所)에서 머무르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나라의 큰 경사가 있는 등의 특별한 사유가 있어서 국왕이 은사(恩赦) 명령을 내릴 경우 징계를 받은 관원들이 자신이 원래 받은 처분을 감등받거나 석방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앞서 소개한 윤선도의 경우가 그런 사례의 하나이다.

앞선 칼럼에서 조선왕조 관리의 징계 체계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제 지방에 쫓겨난 관원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징계에서 벗어나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시 관직에 복귀할 수 있었는지 그 절차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이 글 또한 일본 교토대학의 한국사 연구자 야기 다케시 교수의 분석을 토대로 작성하였다.


징계가 감면되는 과정은?

국왕이 관원에 내리는 징계 가운데 가장 무거운 것이 사형에 해당하는 사사(賜死)인데, 이보다 한 단계 낮은 처분을 위리안치(圍籬安置)라고 할 수 있다. 위리안치란 익히 알려진 대로 유배죄인의 집 주변을 가시나무 울타리로 둘러 외부와의 교통을 완전히 차단해버리는 것이다. 이 위리안치 죄인에 대한 처분을 감해주기 조치가 ‘철위리(撤圍籬)’, 즉 울타리를 철거하라는 명령이다. ‘철위리’는 ‘철위(撤圍)’, 혹은 ‘철극(撤棘)’이라고도 했는데, 국왕으로부터 이 은전(恩典)을 받으면 해당 죄인이 꼼짝없이 집에 갇혀있는 데서 벗어나 가끔은 밖에 돌아다니는 것이 가능했다.

 

위리안치된 죄인 모습. 김윤보의 『형정도첩』 수록.<br>
                      위리안치된 죄인 모습. 김윤보의 『형정도첩』 수록.

‘철위리’하라는 은전을 받은 죄인이 다음으로 받을 수 있는 감면 처분이 ‘양이(量移)’이다. ‘양이’란 죄의 경중을 헤아려 더 조건이 좋은 배소로 옮겨주는 것을 말하는데, 이때 외딴 섬인 절도(絶島)에 안치된 관리의 경우 육지로 배소를 옮겨주는 조치인 출육(出陸)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784년(정조 8) 8월에 국왕 정조가 벽파(僻派)의 영수로서 흑산도에 위리안치된 김구주(金龜柱)의 양이를 허락하여 그를 전라도 나주(羅州)의 배소로 출육(出陸)시킨 사례가 그 한 예이다.

한편 ‘양이’의 혜택을 받은 죄인은 다시 ‘방귀전리(放歸田里)’ 조치에 의해 또 한번 처분이 감경될 수 있었다. 이는 문자 그대로 배소에서 해방되어 향리(鄕里), 즉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한다는 처분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1702년(숙종 28년) 5월에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希載)를 비호했다는 이유로 충청도 아산현에 부처(付處)된 남구만(南九萬)을 숙종이 같은 해 11월 인원왕후 김씨와의 혼사를 이유로 방귀전리의 은전을 베푼 사례가 있다. 이 조치로 인해 남구만은 아산현에서 연고가 있는 인근 결성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남구만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br>
                                   남구만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방귀전리 조치라 하더라도 향리를 마음대로 떠날 수는 없는 추방된 몸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방송(放送)’하라는 은전이 내려지면 배소(配所)에서 완전히 석방되어 서울이나 지방을 묻지 않고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거주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처럼 철위리(撤圍籬), 양이(量移), 방귀전리(放歸田里), 방송(放送)의 단계를 거치면서 징계 처분은 점차 가벼워지게 되는 것이다.


관원으로의 복귀 절차

앞서 본 것처럼 외방에 정배된 관원들은 이후 국왕의 은전을 통해 처분을 감면받을 수 있었는데, 이런 과정을 거쳐 유배지에서 풀려난 관원들이 관직에 복귀하기 위해서는 ‘직첩환급(職牒還給)’ 혹은 다른 말로 ‘직첩환수(職牒還授)의 절차가 필요했다.

직첩(職牒)이란 관직 임명장인 고신(告身)을 말하는데, 따라서 ‘직첩환급’이란 몰수했던 관직 임명장을 징계 관리에게 반환하거나 다시 발행해주는 조치를 말한다. 이 말은 관계(官界)에서 추방당했던 죄인들의 법적 지위가 드디어 추방 이전 상태로 다시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이들은 전직 관료의 자격으로 관직에 다시 임명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징계가 풀린 전직 관료들은 언제 ‘서용(敍用)’ 즉 관원으로 복귀할 수 있었을까? 조선왕조에서는 매년 6월과 12월에 대규모 인사 조치를 단행했는데 그것을 세초(歲初)라고 불렀다. 원래 ‘삭거사판(削去仕版)’, ‘영불서용(永不敍用)’ 등의 처분을 받은 자는 원칙적으로 이 세초의 대상이 될 수 없었는데, 국왕의 은사(恩赦)에 의해 이러한 처분이 해제되면 ‘서용’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파직되어 유배지로 쫓겨났던 관리들 중 일부는 대개 이런 과정을 거쳐 다시 관직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죽은 관리에 대한 명예회복 조치

지금까지 살펴본 사례는 징계를 받은 관원이 생전에 관직에 복귀하는 경우이지만, 당시 미처 국왕의 은전을 받기 전에 배소(配所)에서 사망하는 관리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배소에서 사망한 죄인이라 하여 ‘물고죄인(物故罪人)’이라 불렀다. 조선왕조에서는 이들이 죽음으로써 생전의 죄를 갚은 것으로 간주하여, 물고죄인이 순차적으로 관인으로서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방법은 각종 기록에서 죽은 자의 죄명을 삭제하고, 유배인의 명부에 해당하는 ‘도류안(徒流案)’에서 그 기록을 말소하는 것이다.

 

                                     1894년 경상도에서 작성한 도류안(徒流案). 규장각 소장.

유배인 명부에서 죽은 관리의 이름을 없애고 나면, 다음은 앞서 살펴본 ‘직첩환급’의 은전으로 이어지는 것이 관례였다. 직첩을 되돌려주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자손에게는 관원의 후손으로서의 특권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후손들이 조상의 신령을 모시는 ‘신주(神主)’에도 돌아가신 선조의 관직을 써넣어 양반 가문으로서의 사회적 위신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洪樂任)은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이유로 사사(賜死)되었는데, 6년이 지난 1807년에 순조는 혜경궁의 슬픔을 위로한다는 목적으로 관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류안(徒流案)에게 홍낙임의 이름을 삭제하고, 그의 관직을 복구하라는 명령을 내린 사례가 있다. 이런 조치를 사자(死者)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로 간주한 것이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조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선시대 법률문화와 사회문화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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