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책의 서사를 풀어 당대의 숨은 진실을 드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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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책의 서사를 풀어 당대의 숨은 진실을 드러내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11.14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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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탄생: 조선시대 책의 형태와 구성, 제작의 모든 것 | 조계영 지음 | 글항아리 | 272쪽

 

17세기 종법宗法의 확산으로 인해 조선 왕실 또한 문중 중심의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다. 이에 대종가大宗家로서의 위상과 왕권 확립을 위해 왕실 의례를 정비하게 되는데, 그 일환으로 제도를 갖추어 왕실 서책의 편찬이 이루어졌다. 1631년 『열성어제』의 편찬을 시작으로 『열성어필』 『선원계보기략』 『궁원의』 『국조보감』이 종친의 활약을 기반 삼아 편찬되었다. 

조선 서책은 중국 서책의 영향을 받아 형태가 변하기도 했지만 점차 독자적인 체제를 갖추어 나중에는 거꾸로 중국 서책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조선을 대표하는 기록물로 현전하는 왕실 서책을 통해 조선 후기 사회를 들여다보는 이 책은 서책이 간행된 배경과 형태 및 제작 과정, 왕실 의례, 출판 기술직의 세계를 총망라하여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나라 서지학 지식과 함께 당대의 책 문화사를 조명한다.

조선시대의 서책 가운데 국왕을 비롯해 왕비와 왕세자, 왕세자빈 등을 포함한 왕실 구성원을 대상으로 간행된 책을 왕실 서책이라 칭한다. 왕실 서책은 정보를 널리 전달하려는 목적보다 국왕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위상을 드러내는 동시에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간행되었다. 따라서 일반 서책과는 다른 형태로 제작되었고, 크고 작은 왕실 의례와 늘 밀접하게 연관되었으며 편찬 과정에서 조선의 행정 체계를 두루 살펴볼 수 있다.

엄격한 절차를 거쳐 완성된 서책은 어디에 어떻게 보관되었을까. 왕실 기록물의 보존을 위한 국가의 노력은 조선 후기까지 계속됐는데, 정조 연간에 이르러 규장각을 비롯한 봉모당과 외규장각이 건립되어 왕실 기록물 봉안처로서의 위상을 바로잡는 계기가 되었다. 정조는 자신의 어제와 어필을 규장각에 봉안하고, 봉모당에는 선왕들의 기록물을 봉안했다. 마침내 왕실 기록물의 성격에 따라 별도로 봉안할 수 있는 건물이 세워져, 왕실 서책의 편찬을 촉진하고 영구히 보존할 기반이 형성된 것이다. 또한 정조는 종묘에 직접 가서 선왕들의 각 신실에 『국조보감』을 올리는 의례를 거행했는데 이를 통해 자신이 선왕들의 뜻과 사업을 계승해 성취했다는 ‘계지술사繼志述事’를 표방하며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을 더욱 확고히 했다.

조선시대에는 책을 널리 전파하고 영구히 보존하기 위한 방법으로 필사나 활자보다는 책판을 선택했다. 책판 제작은 비용과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이 소요되고 완성된 책판을 잘 관리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지만, 일단 한번 나무에 새기면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수량만큼 다시 찍어낼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큰 장점이기 때문이다. 책판을 후대에 전해 언제든 다시 찍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서책을 영구히 보존하는 방법이라 인식한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책판만 고집한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활자와 책판을 모두 사용하기도 했는데 『궁원의』가 좋은 예다. 『궁원의』의 구성 요소를 보면 어떤 부분을 활자로 인출하는 것이 좋고, 어떤 부분을 책판으로 인출하는 것이 좋은지 알 수 있다. 활자와 책판의 장점을 모두 취하려는 고민은 정조가 『국조보감』을 인출할 때의 논의를 통해서도 드러나는데 당대의 경제적 상황과 물자의 흐름을 고려해 가장 최적의 방도를 찾아내고자 고심했음을 알 수 있다.

인체를 보호하기 위해 옷을 입듯 책의 몸체를 보호하기 위해 입히는 옷을 책의冊衣라고 한다. 오늘날엔 표지라고 부르는데 일제강점기에 바뀐 명칭을 지금까지 사용하게 된 것이다. 책의에는 장제목과 횡제목을 포함한 여러 정보가 담겨 있다. 왕실 의례 하나를 거행하면 다양한 위계의 기록물이 생산되는데 용도에 따라 책의에 기록하는 정보도 달라졌다. 뿐만 아니라 책의를 종이가 아닌 비단으로 할지, 서책 본문에 사용되는 책지를 어떤 품질의 종이로 할지는 모두 기록물의 위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보통 책의를 넘기면 오른쪽에 있는 면지가 백지로 비어 있기 때문에, 국왕이 서책을 하사한 반사頒賜 기록이나 소장자가 남긴 다양한 사연의 장서기藏書記가 있어서 책의 숨은 내력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책의 형태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교서관에 소속된 원역員役과 공장工匠이라는 직제에 있던 이들이다. 조선 사회에서 장인과 상인, 천인과 노예에 해당되는 공상천예工商賤隸는 관직에 임명될 수 없었지만, 특별한 기술과 부역을 담당할 인력을 동원하기 위해 이들을 국가체제의 일정한 편제 속에서 함께 운용했다. 조선시대 출판 기술직은 어떤 근무 여건에서 작업했으며 어떤 처우를 받았을까.

서책 간행을 담당한 청廳은 기술직의 작업 일수와 업무를 호조와 병조에 보고하고 한 달 단위로 지급하는 요포를 요청했다. 장인은 각색공장各色工匠 또는 각색장인各色匠人으로 통칭되며 어떠한 기술직이라도 동일한 임금지급표준이 적용되었다. 장인들의 작업 공간을 살펴보면, 『현종실록』의 경우 활자를 만드는 소로장과 줄장, 각자장, 당상들이 근무하는 공간이 서로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장인의 근무 공간은 기술직으로서의 작업 공간이기 때문에 관원과는 구별되는 가건물이었다. 한번 특별한 기술직으로 차출된 공장은 의궤에 수록되어 이후 동일한 사안으로 다시 차출해 작업에 참여시키기도 했다. 간행 과정에서 오자가 나오거나 지체되는 일이 생기면 그 벌을 엄히 다스렸고, 서책이 완성되면 수고한 이들에게 담당한 업무와 근무 일수에 따라 말이나 짐승 가죽, 활 등으로 시상했다.

실록을 완성한 후 거행하는 세초나 선온은 실록청의 총재관 이하 모든 관원이 참여하는 잔치로 의례의 집단성을 보여준다. 『선원계보기략』 『열성어제』 『국조보감』과 같은 왕실 서책이나 실록에는 어휘御諱나 묘호廟號가 있어 기록물의 위상이 일반 서책과 다르므로 기록물 자체의 존귀함으로 인해 책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버려진 종이를 함부로 쓸 수 없도록 세초洗草했다. 어떤 일이 마무리되어 손을 뗀다는 의미의 ‘세洗’자를 넣어 지칭한 것처럼, 실록의 세초는 선왕의 시대를 마무리하는 것을 상징한다. 따라서 총재관 이하의 실록청 관원이 참여하는 세초와 국왕이 노고를 치하하는 선온宣醞을 내려주는 의례는 ‘사초의 상례喪禮’로, 한 시대의 마감과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공감하는 예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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