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말하다_ 『공자의 일상 공경 - 논어 향당 편』 (이권효 지음, 북랩, 206쪽, 2022.10)

‘Confucianism has become a political punchbag in South Korea.’
(한국에서 유교가 얻어맞고 있다)
영국의 세계적인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21년 1월 이 같은 헤드라인으로 한국에서 유교(유학)가 얼마나 부정적인 대접을 받고 있는가를 지적했다. 기사는 남녀차별부터 사회 곳곳의 부패와 타락은 거의 모두 유교와 관련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국내 언론은 이 기사를 받아 ‘한국에서 동네북이 된 유교 문화’(조선일보 2021.1.12.)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여 더 널리 알려졌다. 한국에서 유교문화는 경제발전에 기여했지만 권위주의, 성차별, 직장에서 계급과 서열, 사회의 부정부패 등 온갖 부정적 현상을 낳는 원흉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유교는 거의 모든 사회악의 근원이 되는 문제투성이, 골칫덩어리라는 뜻이나 다름없다.
이코노미스트 기자가 유교(유학)에 대해 얼마나 깊은 식견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현실적으로 중요한 측면은 이 같은 기사 내용의 맞고 틀림과는 별개로 국내외의 영향력 높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보도됐다는 점이다. 기사를 접한 일반 대중은 “뭐야, 터무니없는 주장이다.”는 반응보다 “맞아, 유교는 고리타분하고 시대착오적이다.”는 반응이 더 많을 수 있다.

유교(유학)는 공자 이후 지금까지 2,000년 넘도록 사라지지 않고 있다. 시대에 따라, 나라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그중에서 우리나라 경우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성리학’ 또는 ‘주자학’이라는 특정 종류의 유학이 마치 유학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깊이 형성됐다. 성리학은 주자(朱子)라는 송나라 유학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특수한 형태의 유학이다. 그런데도 조선시대에 성리학이 유학의 중심과 주류로 뿌리내리면서 특수한 유학이 보편적 유학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유학이나 유교라고 하면 주자와 성리학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학계의 연구와는 별개로 대중매체를 통해 알려지는 성리학에 대한 대중적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다. 대학교수나 기업인, 언론인 등이 성리학에 대해 갖는 부정적 인식은 이코노미스트 기사보다 오히려 강하다. 요즘 정치권의 내로남불 행태의 뿌리도 성리학이며, 현실과 실용을 무시하고 관념에 빠진 성리학에서 조선의 멸망을 찾으며, 사농공상 서열가치관으로 기업과 기술을 무시하는 뿌리에도 성리학이 있다는 진단과 평가가 매스미디어 기사나 칼럼에 많이 등장한다. 대중매체에 성리학을 언급하는 내용 중 긍정적인 의미나 맥락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성리학을 유교(유학)의 대표처럼 여기는 인식은 정확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각인되어 있다. 이코노미스트 기사도 유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보도 분위기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유학(유교)을 공부하면서 그에 대한 사회적 인식(정확히는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과 그에 따른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늘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이미 유통기간이 지난 유학(유교)을 하루빨리 폐기처분해야 세상이 발전할 수 있다는 많은 주장에 맞서 “유학은 그렇지 않다.”고 당당하게 나서기가 꺼려진다. 유학을 대중적으로 옹호할수록 그에 대한 부정적 프레임만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그냥 문헌 중심으로 연구를 흉내 내면서 어물쩍 넘어가는 게 마음 편한 듯한 느낌도 있다.
성리학 중심의 유학은 공자에서 너무 멀어져 있다. 공자의 삶과 사상이 담긴 논어와 성리학 문헌은 너무 다르다. 논어는 일상을 존중하면서 보통 사람의 일상에 가깝게 다가간다. 성리학은 사람의 성품과 이치, 우주에 관해 추상적인 주장을 펼쳐 이해하기 어렵다. 번잡하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는 10여 년 전 <19세기 성리학의 본말 전도>라는 칼럼에서 “성리학은 이미 공자, 맹자가 말한 유학의 본래 정신에서 삼만 팔천 리나 떨어진 것이 되고 만다. 19세기 성리학은 유교의 정신을 배반한 것이다. 오늘은 어떤가.”라고 했다. 유학의 참모습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더욱 고민하게 만든다. 성리학은 공자에서 비롯한 유학의 발전이 아니라 변질이며, 타락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공자와 논어에 대한 책을 몇 권 출간하면서 논어 20편 중에서 10편인 향당을 무시하다시피 했다.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그런 게 아니었다. 향당 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기존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대략 말하면 향당 편은 다른 편과 비교해서 어떤 사상이나 철학으로 생각되는 콘텐츠가 겉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공자가 일상에서 무엇을 어떻게 먹고 자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같은 얼핏 시시콜콜하게 보이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무신불립, 과유불급, 온고지신 등 논어의 다른 편에 많이 보이는, 사상이나 철학 같은 느낌을 주는 표현이 거의 없다. 그래서 향당 편은 유학의 어떤 철학적 차원이 없다는 선입견이 작동했을 수 있다. 그런 선입견은 심오하다기보다는 가물가물하여 추상적인, 그래서 일상과 동떨어진 성리학의 심성론이 어떤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성리학에 비하면 향당 편은 얼핏 더 시시하게 느껴진다.
이후 유학을 비롯한 동양철학 공부를 조금씩 하면서 문득문득 향당 편의 기록이야말로 공자와 논어의 벼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향당 편에 기록된 공자의 의식주행(衣食住行)은 형식면에서 지금 시대와 맞지 않은 부분이 많다. 그렇지만 일상을 깊이 공경하는 모습이 공자와 논어의 소박한 진면목 같았다. 향당 편이 논어의 맨 앞에 편집돼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곤 했다.
일상이 소중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상이나 종교가 있을까. 송나라 주자는 노불(老佛, 노자와 석가 또는 도교와 불교)을 거칠게 비난하지만 정당하지 못하다. 유학(유교)을 지키려는 비뚤어진 태도에 불과하다. 노불이 어찌 일상을 외면하겠는가. 불교에서 출가는 일상을 버리는 게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더 깊이 존중하는 모습일 수 있다. 유학(유교)이 일상의 의미와 가치를 독점할 수는 없다. 다만 공자와 논어를 바탕으로 유학과 유교를 말하려면 공자의 일상 공경이 가장 잘 드러난 향당 편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인식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논어의 향당 편만 따로 떼서 살펴본 내용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이유다. 보잘 것 없는 책이지만 그동안 소홀했던 향당 편에 대한 인식을 스스로 조금 바꾼 데서 위안을 삼는다.
이권효 대구가톨릭대학교•동양철학

대구가톨릭대학교 프란치스코칼리지 교수. 중국 명대 사상가 이탁오의 《분서(焚書)》를 재평가한 논문으로 동양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4년 동안 일간신문 기자로 일했다. 저서로 《개념잉태가 소통이다》, 《내 삶의 뉴스메이커》, 《류성룡 징비력》, 《뉴스메이커 공자》, 《논어신편:새로 편집한 논어》, 《논어로 읽는 퇴계언행 100구: 올바름이 이치입니까》, 《한글로 통하는 논어》, 《헤드라인 커뮤니케이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