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떠오르는 고통의 기억 지울 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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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떠오르는 고통의 기억 지울 순 없을까
  • 기초과학연구원
  • 승인 2022.11.13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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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S 과학리포트]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는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뒤 그 사건에서 공포감을 느껴 고통을 느끼는 질환이다. 대개 우울증, 불안장애, 공황장애 등을 동반한다. /GIB

중앙사고수습본부에 따르면 지난 3월 전국 성인 206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코로나19 국민 정신건강 실태조사’에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위험군의 비율이 12.8%로 나타났다. 특히 코로나19로 자신의 가족이나 지인의 격리, 확진, 사망 등 사건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경우 위험군 비율이 21.6%로 더 높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적지 않은 숫자의 국민들이 트마우마로 인한 피해를 경험하고 있다. 이런 경향성은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2020년 이탈리아 약리학 연구소(IRCC) 연구팀은 코로나19 감염 후 산 라파엘레 병원에서 치료를 마친 환자 402명의 정신질환을 한 달간 조사해 보니 28% 환자들이 PTSD 증상을 보였으며 31% 환자에서 우울증 증상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의료종사자의 경우 더욱 심각한 수준이다. 노르웨이 오슬로대 연구팀은 팬데믹 동안 코로나19 환자 치료를 담당했던 의료진 1773명을 조사한 결과 9%가 PTSD 증상을 보였다는 사실을 2020년 국제학술지 ‘플로스원’에 발표했다. 세계보건기구(WHO) 통계에 따르면 일평생 PTSD를 경험하는 사람의 비율이 2.1~2.3%임을 감안할 때 네 배가량 높은 수치다.

 

전쟁을 겪은 많은 군인들이 PTSD 증상을 호소한다. 2009년 미국 랜드연구소의 통계에 따르면 이라크전쟁에 참전한 160만 명의 장병 중 30만 명이 PTSD 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GIB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 현장의 모습.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를 겪은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지하철 타기를 꺼릴 정도로 PTSD에 시달리고 있다. /최광모

코로나19, 전쟁, 사고 … PTSD로 고통받는 사람들

PTSD는 사람이 전쟁, 자연재해, 사고 등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뒤 그 사건에 공포감을 느끼거나 사건 이후 계혹 고통을 느끼는 질환으로, 대개 우울증, 불안장애, 공황장애 등을 동반한다.

PTSD를 호소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전쟁을 겪은 군인이다. 2009년 미국 랜드연구소의 통계에 따르면 이라크전쟁에 참전한 160만 명의 장병 중 30만 명이 PTSD 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에서도 6.25나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이 PTSD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2차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은 자연스럽게 영웅 대접을 받았던 것과 달리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은 정당성 없는 전쟁이라는 대중의 인식이 있었고 그 누구도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를 환영해주지 않아 PTSD 증상을 겪는 비율이 더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뿐 아니라 사고나 자연재해를 겪은 사람들에게서도 PTSD가 흔히 나타난다. 일례로 국내 PTSD의 개념이 널리 퍼지게 된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가 대표적이다. 당시 불에 탔던 전차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앙로역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지하철 타기를 꺼리는 이들이 많다.

꼭 특별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엘리베이터 고장으로 갇힌 경험이 있는 사람들 중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기 힘들어하는 경우도 PTSD 증상에 해당한다. 119 신고접수 중 화재 다음으로 많은 사유가 엘리베이터 갇힘 사고일 정도로 엘리베이터 공포증은 흔하게 나타난다.

PTSD는 개인의 삶뿐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신질환이다.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 작가는 본인의 저서에서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온 국민이 트라우마 환자일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졌다며 “1950년 한국전쟁, 3만 명이 학살당했던 제주 4.3 사건, 광주항쟁 등 트라우마를 입은 사람이 온 사회에 넓게 퍼져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어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면 타인에게 적절한 공감을 하거나 타인의 고통에 감정이입하기 어려운 사회적 바탕을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본인의 트라우마가 짙은 사람은 누군가 고통을 호소할 때 ‘내가 겪은 고통에 비하면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야’하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2019년 기초과학연구원(IBS)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이 PTSD 심리치료법 중 하나인 안구운동 둔감화 및 재처리(EMDR) 기법의 분자생물학적 기전을 밝혀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GIB
PTSD 심리치료법 중 하나인 안구운동 둔감화 및 재처리(EMDR) 기법은 환자가 공포기억을 회상하는 동안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게 만드는 시각적 운동으로 정신적 외상을 치료한다. /Aspire counseling

그간 원리 몰랐던 PTSD 심리치료법 기전 밝혀

PTSD 치료에 대한 필요성이 사회적으로 대두되며 다양한 치료법이 개발되고 있다. 장시간 노출, 인지처리요법, 안구운동 둔감화 및 재처리(EMDR) 등 심리치료법이 대표적이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은 EMDR 치료요법의 효과를 동물실험으로 처음 입증해 국제학술지 ‘네이처’ 2019년 2월 14일자에 발표했다. doi: 10.1038/s41586-019-0931-y

연구팀은 고통스러웠던 상황의 기억으로 공포 반응을 보이는 생쥐에게 EMDR 기법을 사용하면 행동이 얼어 붙는 공포 반응이 빠르게 감소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EMDR은 환자가 공포기억을 회상하는 동안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게 만드는 시각적 운동을 하도록 해 정신적 외상을 치료하는 기법이다. 한 번 공포기억이 줄어든 쥐는 시간이 지난 뒤 다른 장소에서 비슷한 상황에 처해도 공포 반응이 재발하지 않았다.

연구팀은 EMDR 기법에 작용하는 뇌 신경회로도 발견했다. 쥐에게 안구운동을 유도했을 때 시각적 자극을 받아들인 ‘상구(안구운동과 주위 집중을 담당하는 부위)’에서 시작해 공포기억을 억제하는 ‘중앙 내측 시상핵’, 공포 반응에 작용하는 ‘편도체’가 차례로 관여했다.

이는 그간 경험적으로만 확인됐던 심리치료 기법의 원리를 동물실험으로 입증한 결과다. 그간 정신과에서 활용되는 심리치료법은 정확한 원리를 몰라 도외시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과학적 원리가 입증되며 널리 활용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약물·디지털 치료제로 트라우마 극복한다

한편 약물을 이용한 치료법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현재 PTSD에는 우울증 치료제를 활용하는데 효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호전율도 50% 수준이다. 다양한 PTSD 치료제가 개발되고 있지만 치료기전이 밝혀진 사례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올해 4월 이보영 IBS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 연구위원팀이 PTSD 치료제의 과학적 원리를 동물실험으로 규명했다. PTSD의 약물치료법 개발에도 청신호가 켜질 것으로 기대된다.

연구팀은 생쥐에게 공포 상황을 조성하고 24시간 뒤 임상 개발 중인 PTSD 치료제 ‘NYT-783’을 주입했더니 공포기억 재발이 억제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때 변연하 내측 전전두엽 내 NMDA 수용체가 활성화되며 신경기능을 조절하는 BDNF 단백질의 발현을 유도했다. 이 단백질은 신경세포의 가소성을 향상시켜 공포기억을 억제했다. 가소성은 신경세포가 환경에 맞게 적응해 나가는 능력을 말한다.

이보영 연구위원은 “NMDA 수용체를 타깃으로 하는 PTSD 치료제의 분자적 기전을 최초로 규명했다”며 “추후 여러 접근방식을 적용해 다른 기전의 후보물질을 구축하고 PTSD뿐 아니라 다양한 정신질환 치료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분자 정신의학지’ 4월 14일자에 발표됐다. doi: 10.1038/s41380-022-01498-7

최근에는 디지털 치료제를 통해 PTSD를 극복하기도 한다. 가상현실(VR) 기반으로 PTSD를 치료하려는 시도가 대표적이다. 외출이 힘든 광장공포증을 가진 환자에게는 일상생활을 재구성한 VR을 체험하게 하거나, 교통사고 환자에게 실제 사고와 유사한 가상체험으로 트라우마를 완화하는 식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정신의학과 연구팀은 올해 4월 ‘게임체인지(gameChange)’라는 VR 프로그램을 공개한 바 있다. 환자는 VR 장비를 착용한 뒤 가상의 세계 안에서 치료사의 안내를 받아 다양한 미션을 수행한다. 마치 게임을 하는 것처럼 시뮬레이션 안에서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며 공포감을 극복할 수 있다.

연구팀은 광장공포증을 가진 환자 346명을 모집해 174명에게는 일상치료와 VR치료를 병행하도록, 172명에게는 일상치료만 받도록 한 결과 6주 후 VR치료를 병행한 그룹에서 광장공포증이 더 많이 줄고 불안장애가 감소했다고 밝혔다.

약물과 디지털 등 다양한 접근방식의 연구가 이어지면서 지금까지 심리치료에 의존했던 PTSD 치료제 시장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IBS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과 영국 옥스퍼드대 등의 연구를 기반으로 마땅한 치료법이 없던 PTSD 치료제 개발이 가속화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옥스퍼드대 연구팀이 제작한 PTSD 치료법 '게임체인지'의 한 장면. 게임체인지는 가상현실(VR)을 이용해 환자가 미션을 수행하면서 공포기억을 치료할 수 있다. /옥스퍼드대

[출처] IBS(기초과학연구원) 과학지식백과 | “자꾸 떠오르는 고통의 기억 지울 순 없을까” | 2022. 1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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