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당한 학자의 記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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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당한 학자의 記言
  • 장지원 충남대학교·교육학
  • 승인 2022.11.13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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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열심히 기어 다니는 아들 앞에서 재롱 피우며 놀다가 새끼발가락이 매트에 걸려 뚝 부러져버렸다. 아들 다칠까 봐 내가 깔아놓은 매트에 내가 넘어지고 말았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슬퍼해야 할까, 동심이 살아있다고 좋아해야 할까. 덕분에 적잖은 시간동안 외출은 고사하고 꼼짝없이 침대에서 다리를 올린 채 누워있어야 한다. 가사와 육아의 의무를 감면받아 용맹하게 글을 쓸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행운이 불운이고 불운이 행운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느낀다.
 
치료를 받아야 하니 병원을 찾기 시작했다. 동네 병원에서는 인근 병원에서 수술을 제안했지만 대리수술 논란이 있어 다른 정형외과들을 알아보았다. 족부 정형 전문의가 전국에서 제일 많다는 한 병원은 하루라도 빨리 서둘러야하니 그 자리에서 수술 날짜를 잡자며 야단이었다. 운동선수 전문 병원이라는 다른 정형외과에서는 수술을 해도 별 차이가 없으니 느긋하게 경과를 지켜보자고 한다. 십여 년 이상 임상 경험을 가진 의사들의 진단이 이렇게 달랐다. 전직 국가대표 축구팀 주치의가 운영한다는 세 번째 병원에서 다수결로 결정할지 고민하다 마음을 굳혔다.

병원에서는 엄지를 다치지 않아 천만다행이고 새끼발가락은 체중의 5%만 지탱한다며 위로했다. 하지만 새끼발가락은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함께 하고 있었다. 아이를 들어 올리거나 침대에서 몸을 돌릴 때마다 예상치 못한 통증이 찾아왔다. 녀석은 내가 몸을 움직이는 모든 상황마다 얼마 안 되는 힘을 꼬박꼬박 보태고 있었다. 5%의 역할만 한다고 해서 새끼발가락을 방치할 생각은 없다. 다섯 개의 발가락이 나에게는 모두 소중하다. 물론 다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이다. 

의사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 진단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누가 어떤 말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찌되었건 내 몸에 대한 최종 판단, 최선의 결정은 내 몫이다. 전문가를 찾아다니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전문가의 말을 구별해낼 수 있는 안목과 통찰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합리적인지, 어떤 사람이 돈을 밝히는지, 어떤 사람이 환자의 눈치를 보는지, 어떤 사람이 환자에게 진심인지 등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머리로 판단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진단서에 쓰인 병명은 민망할 정도로 무서운 데 막상 통증은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실제 고통보다 ‘분쇄골절’이라는 병명이 훨씬 아프게 느껴졌다. 까닭을 물어보니 조각난 부위에 신경이 많지 않아서란다. 40년 이상 엄청난 하중을 견뎌오면서도 말 한마디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발은 하루에 몇 톤의 무게를 지탱하면서도 짜증 한번 부리지 않는데, 머리는 약간만 신경 쓰여도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있었다. 겉으로는 학문을 제대로 하겠다며 소매를 걷어붙이지만, 실제 모습은 작은 일에 화부터 내며 학자가 지녀야할 큰 분노를 저버리고 있었을 것이다. 

학문을 업으로 삼고 있다는 이유로 머리 아픈 일은 질색했다. 다른 건 몰라도 머리를 무겁게 하는 음식이나 머리 복잡하게 만드는 작은 일들을 피하며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 했다. 발가락을 다치고 나서야 잘못임을 깨달았다. 머리와 제일 멀리 떨어진 작은 뼈 한 조각만 불편해도 도무지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운동선수들 중에는 술, 담배는 물론이고 커피와 탄산음료도 멀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내가 학문을 어떤 마음으로 했는지 다시 돌아보게 된다. 몸도 잘 돌봐야 하고, 큰 뜻을 감당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갖고 있는지 반성하고 있다. 

학자는 본능적으로 누군가의 머리가 되려고 하는 못된 버릇이 있다. 자신의 머리에 자신감이 있고 공부를 통해 누군가를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남들이 내 공부를 알아줄지 말지는 그 시대가 결정하는 것이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모두가 달리고 싶어 하는 육상 트랙을 달려야 학문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남들이 꺼려하는 길바닥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보물이 있어 큰일의 주역이 될 수도 있다. 머리가 해도 내가 한 것이고 발이 해도 내가 한 것인데 나는 머리만 챙기고 발은 챙기지 않고 있었다. 

크고 아름다워 보이는 허명을 내려놓고 조용히 제 할 일을 하기로 다짐한다. 누구한테 인정받으려고 하지 않고 신발 속에 들어가서 제 역할을 할수록 좋은 글을 쓸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시시비비의 중심에 서지 않고 작은 걸음 한걸음을 소중히 여기려고 한다. 


장지원 충남대학교·교육학

고려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충남대학교 교육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교육철학학회 학술위원장을 맡고 있다. 주요 관심사는 교육철학과 교육학의 학문적 정체성, 서양고전의 재해석, 교육철학, 교육학과 학문 일반의 관계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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