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서사에서 미시 분석으로
상태바
거대 서사에서 미시 분석으로
  • 김지현 기자
  • 승인 2020.03.0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간소개]

■ 일상적 국민주의 | 마이클 빌리그 지음 | 유충현 옮김 | 그린비 | 392쪽
 

세계화 시대에 국민주의는 여전히 유효한가? 이 책은 국가/국민 개념의 타자화를 비판한 사회학의 고전으로 우리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국민주의’에 대한 분석을 담았다. 지구화 시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세계화는 지속적으로 진행 중이다. 전 지구적 무역과 해외여행은 폭증하고 있으며 지난 25년 동안 국경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인구 이동이 존재해 왔다. 이처럼 일상적 세계화라는 지배적인 흐름 속에서 일상적 국민주의는 섬으로 남을 것이며 국경은 무너질 것으로 예측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국민주의와 국가들의 세계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국경은 강화되고 늘어났을 뿐이다. 전 지구적 힘들이 강화될수록 국가들의 특수성이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은 착각이었다. 세계화 시대에도 국가의 이해관계는 여전히 최우선으로 고려된다. 요컨대 세계화는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는 한에서만 유효하다. 국민국가들의 세계는 언제나 국제적 세계였다. 국제주의는 국민주의에 의존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국민주의와 세계화는 상호연결되어 있다.

저자는 국민주의는 서구 중심국가의 시각에서 대체로 국가의 독립을 안전하게 하려는 폭력적 시도와 관련해서 논의되고, 정서적으로 격앙된 것으로 개념화되었다고 지적한다. 즉, ‘열렬한’ 국민주의에 포함된 것들은 일반적으로 서구에서 거리가 먼 지역에서 발견되거나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정치 운동들로 묘사된다. 예컨대 북아일랜드 사태 동안 국민주의라고 묘사된 것은 영국 정부가 아니라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국민주의는 서구 중심국가들의 의제에서 슬며시 사라진다. ‘저들’의 열렬한 국민주의와 ‘우리’의 보이지 않는 국민주의 간의 이분법을 비판하면서 저자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국민주의자로 불리지 않는 확립된 국가들에 사는 우리가 자신의 국민정체성을 잊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는 국민정체성은 자아의 관점에서 정의된 ‘내부 심리 상태’를 넘어서고, ‘국민국가들의 세계에서 매일 살아가는 삶의 한 형태’로서 개념화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국민주의에 대한 통념은 ‘우리’의 국민주의는 정당한 애국이고, ‘저들’의 국민주의는 폭력적이고 위험한 난동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 對 저들’이라는 이분법에 도전하고, 우리 안에 감추어져 내면화된 국민주의를 폭로한다. 서구 국가들이 일상적 방식으로만 국민주의적인 것은 아니며, 일상적 국민주의 과정들이 서구에만 제한되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의 주제는 국민주의 이데올로기는 전 지구적이라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특정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자연스럽고 명백한 것처럼 보여서 정당화할 필요가 없는 믿음들을 지칭한다. 오랜 세월 동안 국가들이 존재해 왔고, 세계가 독립된 국가들로 나뉘어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실처럼 보였다. 우리는 세계가 늘 이런 식으로 존재했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국민국가는 근대라는 특정한 시대에 속하는 것이다.

국가들의 자연스러움은 그 자체가 전 지구적이다. 따라서 국가들이 재생산되는 방식으로서 일상적 국민주의는 서구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서구의 국가들은 단일한 형태의 국민주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국민주의와 열렬한 국민주의 모두를 갖는다. 일상적 국민주의는 열렬한 국민주의 운동을 위한 배경이고 전제조건이다. 저자가 흔들리지 않은 성조기와 걸프전의 국민주의적 열정을 연결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일상적 국민주의는 일상적 현상, 우리가 의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소하고 흔한 것들에 초점을 맞춘다. 그 예는 깃발, 스포츠 행사, 화폐 속 인물, 수사적 표현, 일기예보 등 일상적 맥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저자는 그 개념을 ‘일상의 삶에서 기존의 국민을 국민으로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적 습관들을 아우르기 위해 국민주의를 확장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예컨대 신문이나 포털사이트에서 날씨는 국가 명을 표기하지 않는다. 그냥 날씨다. 함께 읽는다고 상상된 독자들에게 날씨는 공유된 특정한 장소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속적인 국가성의 상기를 통해 국민적 청중을 구성하는 방식을 묘사한다. 예컨대 을지로, 충무로, 퇴계로, 원효로 같은 국민성의 참조물들은 너무도 낯익고 지속적이어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국민의 의식 속에 등록되지 않는다. 마치 “열렬히 의식적으로 흔드는 깃발이 아니라, 공공건물에서 눈에 띄지 않고 걸려있는 깃발”처럼. 그러나 이러한 게양은 점차 시민들의 잠재의식 속에 충성심과 소속감이 스며들도록 한다. 전쟁 같은 위기의 순간에 국민은 자신들의 국가에 분명한 지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요구받을 수 있다. 국가성 게양의 과정들이 조국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고, 위기가 발생하면 희생할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저자의 연구는 국민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거대 서사에서 벗어나 재현의 문제라든가 지역화한 의미들에 초점을 맞추면서 경험에 기초한 미시 분석으로의 이동을 촉발한다. 일상적이고 사소한 기표들을 통한 국민 정체성의 재생산을 연구함으로써 국민주의의 가시적 측면을 뒷받침하는 것은 국가들의 세계와 관련해 이해되는 삶의 일상적 형태들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만든다. 일상은 사회적 현실의 기반으로서, 정체성 문제를 이해해야 하는 곳은 바로 이 수준에서다. 미묘한 국민 정체성 구성의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방법론적 모델로서 일상적 국민주의는 매우 유용한 개념이며, ‘국경의 시대’로 돌아가는 우리의 현재를 되돌아보도록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