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사회의 공동진화 경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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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사회의 공동진화 경로 선택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11.07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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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제25강_ 박상욱 서울대 교수의 「기술과 사회의 공동진화 경로 선택」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아홉 번째 시리즈 ‘자유와 이성’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자기실현의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간 인류가 걸어온 길은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합리성의 증대는 자유의 신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섯 섹션 총 4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고전 시대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자유 담론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 미래 사회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고자 한다. 자유의 이념과 지향에 관한 동서양의 지적 자산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세 번째 섹션 ‘기술적 환경과 인간의 자유’ 제25강 박상욱 교수(서울대 과학학과)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기술과 사회의 공동진화 경로 선택


박상욱 교수는 “사회와 기술의 상호작용은 양방향적”이고 그 “선후 관계와 인과 관계가 분명하지 않다”라면서 “사회가 일종의 환경으로서 기술을 선택하고, 기술이 일종의 독립변수로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까닭에 “기술과 사회의 변화를 진화(evolution)의 일종으로 보는 게 합당하다면 기술과 사회는 공동진화(co-evolution)”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듯 기술 결정론과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 양자를 지양하고자 하는 시각에서 “과학기술 혁신 정책 학계에서 사용되는 사회기술 시스템(socio-technical system) 관점”과 “사회기술 시스템이 가진 강한 경로의존성(path-dependency)을 설명”하는 것을 통해 “시스템의 초기 설계와 설정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왜냐하면 인류가 “기술과 사회의 공동진화 경로를 적극적으로 관리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 방관하면 때로는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갈 수 있음을 그동안 깨달았기 때문인데, 동일한 이유로 세계의 “주변부에 있지 않고 변화의 중심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하며 사회기술 시스템 전환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 한국 사회도 “이제는 미래 사회기술 시스템의 설계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기술과 사회의 공동진화의 경로를 함께 조향(steering)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지난 10월 15일, 박상욱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자유와 이성>의 25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들어가며

사회적 필요에 따라 기술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사회적 선택에 따라 기술의 생사와 부침이 결정되기도 하며, 사회적 영향 요인에 따라 기술의 모습은 끊임없이 형성(shaping)된다. 또한 어느 정도 확산된 기술은 사회를 변화시킨다. 따라서 사회와 기술의 상호작용은 양방향적이며, 선후 관계와 인과 관계가 분명하지 않다. 사회가 일종의 환경으로서 기술을 선택하고, 기술이 일종의 독립변수로서 사회를 변화시키니, 기술과 사회의 변화를 진화(evolution)의 일종으로 보는 게 합당하다면 기술과 사회는 공동진화(co-evolution)하는 셈이다.

현대의 사회기술 시스템은 산업혁명 이후 근대화(modernization)의 산물인데, 이미 공고하게 성립된 사회기술 시스템을 전환(transformation)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왕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면, 혹은 어쩔 수 없이 전환을 일으켜야 한다면, 어떤 사회기술 시스템으로 바꿀 것인지에 대해서 가치가 반영되고 의지가 개입된 설계가 필요하다. 집합적이고 사회적인 설계 작업이 필수적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선택들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기술과 사회의 공동진화 경로를 적극적으로 관리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 방관하면 때로는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버린다는 것을 여러 교훈을 통해 깨달았다. 참여가 필요하다.

탈탄소 전환과 디지털 전환이라는 중대한 양대 전환을 마주한 상황에서 한국 사회가 인류 사회의 주변부에 있지 않고 변화의 중심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하며 사회기술 시스템 전환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이제는 미래 사회기술 시스템의 설계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기술과 사회의 공동진화의 경로를 함께 조향(steering)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1. 기술과 사회를 한 통으로 보는 사회기술 시스템 관점

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논할 때 가장 흔한 접근법은 기술 결정론(technology determinism)이다. 사회 변화를 기술 변화의 종속변수로 보는 관점으로, 기술 변화를 사회 변화의 결정적인 동인으로 본다. 이때 기술 변화는 어디선가 저절로 또는 우발적으로 일어나거나 사회 시스템 바깥에서 외생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기술 결정론의 장점은 논리적 단순함에 있다. 

기술 결정론은 기술의 사회적 파급 효과를 강조함으로써 기술 변화에 의한 영향을 미리 가늠해보고 긍정적 영향을 극대화하거나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는 예방적 처방을 선제적으로 내릴 수 있도록 하는 특장점이 있다. 그러나 기술 결정론의 약점은 어떤 기술이 등장하고 확산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빈약하다는 데에 있다. 기술 결정론은 그 기술이 지닌 여러 층위, 여러 종류의 ‘관계성’에 대해 정성스럽게 설명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해, 기술 결정론은 기술이 마치 하나의 자유의지를 갖는 생명체인 것처럼 의인화하여 스스로 발전해나가는 것처럼 설명하곤 하며, 기술의 성공은 성능의 우월성이나 최초의(original) 기능을 제공한 데에 따른 필연으로 보곤 한다. 이 경우 그 기술에 생명력을 부여한 생산자와 사용자 즉 인간과 사회의 선택의 중요성이 쉽게 간과되곤 하는 것이다.

기술 결정론과 대척점에 있는 관점이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social construction of technologies: SCOT)이다.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은 기능이나 성능 측면에서 구별되기 어려운 기술들도 사회적 선택에 의해, 그리고 선택된 이후의 경로의존성에 의해 그 운명이 크게 달라진다는 부분을 강조한다. 또한 사회적 선택 압력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가격이나 생산 원가와 같은 산업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윤리적, 사회적 선택 압력이 유의미한 선택을 낳는 경우들에 주목한다. 이러한 사회적 선택은 때로는 우연히 이루어지지만, 우연한 선택도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합의되고, 또는 결과적으로 이미 확산되어버렸다면 상당히 공고해진다.

기술과 사회의 관계는 기술 결정론과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 사이의 어디쯤, 혹은 그 둘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무언가에 있을 것이다. 기술과 사회의 변화 중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의 변인으로 놓거나 시간적으로 선후 관계에 놓을 필요가 없다. 한꺼번에 다루는 것은 어떤가?

어떠한 기술에 대해 논할 때 단위 기술보다는 연관된 여러 기술들을 묶어서 유기적인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사회기술 시스템 접근은 과학기술학이 강조하는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을 배제하지 않음으로써 혁신 연구자가 빠지기 쉬운 공급자 위주의 시각에서 벗어나 혁신의 수요와 응용 부문의 중요성에 주목했다. 사회기술 시스템 접근은 지난 몇십 년 동안 혁신 연구와 과학기술학 커뮤니티에서 논의된 개념들을 종합한 것으로, 사회적, 기술적, 경제적 측면 모두에서 기술 변화와 전이에 대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기술 시스템론은 과거 사례의 설명에는 유용하나 미래에 일어날 전이와 전환에 대해서는 규범적이고 당위적인 접근을 벗어나지 못한다. 연구자들은 사회기술 시스템론을 좀 더 분석적인 접근법이자 실천적인 정책 프레임워크로 발전시켰는데, 이를 사회기술적 전이의 다층위적 관점(multi-level perspective: MLP)이라고 한다.

다층위적 관점은 기술 변화와 사회 변화의 상호작용과 동학에 주목한다. 전이는 기술 변화뿐 아니라 사용자의 행태, 관습, 규제, 산업 네트워크, 인프라, 상징성 등의 변화를 수반한다. 기존의 기술이 여러 사회기술적 요소들과 이미 공고히 결합되어 있으므로 구 기술을 대체하는 새로운 기술에 의한 전이가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렇지만 기존 사회기술 시스템의 관성과 기존 사회기술적 레짐(regime)들의 연대를 극복하면 전이를 거쳐 새로운 사회기술 시스템으로 전환될 수 있다.

 

사회기술 시스템 전이 개념 도식. 출처: 열린연단 - 기술과 사회의 공동진화 경로 선택

2. 사회기술적 전이의 설명

전이(transition)는 전환(transformation)에 이르는 동적 과정이다. 최근 과학기술 혁신 정책 학계에서 사용하는 사회기술적 전이에 대한 다층위적 관점(multi-level perspective: MLP)에서는 세 개의 레벨을 설정한다. 시작은 니치(niche)다. 니치는 사회기술적 전이의 가능성을 가진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고 성장하는 이론적 공간이다. 신기술은 연구 개발 활동에 의해 생산된다. 또한 기업이나 공공 연구 부문에서의 조직적인 연구 개발 활동의 산물이 아니더라도 시민들에 의해 창발된 혁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기존의 기술을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 등도 니치에 진입할 수 있다. 

니치 기술들이 사회적 선택을 받아 성장하거나, 선택을 받지 못해 도태되는 과정은 진화론의 적자생존과 닮았다. 생태계에서의 진화와 기술 진화의 다른 점이라면 기술 진화가 의도된 방향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니치 기술들은 결국 소수의 지배적 디자인(dominant design)으로 수렴된다. 지배적 디자인은 성장하여 주류(mainstream) 기술의 대안으로서 도전장을 내민다.

니치 공간은 사회기술적 실험(sociotechnical experiment)의 공간이다. 말 그대로 니치 공간이므로 연구 개발자나 시범 사업 참가자, 작은 시범 지역 내 이용자들처럼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만이 신기술을 접한다. 사회기술적 실험을 위해 니치 공간은 일반적인 사회기술 시스템에 비해 훨씬 관대한 여건을 제공한다. 니치에서 사회기술적 실험을 수행함으로써 해당 기술의 연구 개발자들은 기술적 완성도를 높이고 문제점들을 파악하여 보완할 수 있다. 

기술적으로 완벽하지 않고, 아직 비싸고, 심지어 성능이 종래의 기술들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니치 기술이 성장하면 중간 레벨(meso level)인 다음 단계로 올라선다. 니치에 있던 기술이 주류 레벨에 돌입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동기이자 동력은 산업경제적 잠재력이다. 그래서 니치 기술이 이 중간 레벨에 진입하는 문턱 단계에서는 기업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중간 레벨, 즉 주류 레벨에서는 니치 공간에 허용되었던 관대함이 대부분 사라진다. 이 레벨에서는 기존 사회기술 시스템을 구성하는, 서로 연결된 레짐(regime)들이 신기술과 상호작용한다. 레짐은 일종의 하위 시스템으로 보아도 무방한데, 산업, 과학, 문화, 정책과 정치 등의 도메인(domain)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레짐들은 니치를 벗어난 신기술을 다시 한 번 시험하고 형성(shaping)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신기술의 영향으로 레짐들도 변화하며, 레짐들 사이의 관계성도 변화한다. 신기술이 성공적으로 주류 레벨에 안착하여 전이 과정을 완결하면, 즉 전환을 일으키면, 바뀐 레짐들의 세트가 자리를 잡는다. 이를 레짐 이동(regime shift)이라고 부른다.

다층위 관점에서 최상위 레벨은 거시적 환경으로서 사회기술적 경관(sociotechnical landscape)이라고 부른다. 거시적 환경은 전이의 모든 단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사회기술적 전환은 많은 경우 규범적이며, 시장에만 맡겨놓을 경우 잘 일어나지 않는다. 바람직하고 과학기술적으로 구현 가능한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기존 레짐들의 저항에 부딪히거나 사회적 수용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를 전이 실패(transition failure)라고 부른다. 전이 실패는 시장 실패(market failure)일 수도 있고 시스템 실패(system failure)일 수도 있다. 전이 실패를 방지하고 바람직한 사회기술적 전환을 촉진하기 위해 정부 정책이 개입할 수 있다. 전이 관리(transition management)를 위한 혁신 정책의 정책 수단은 매우 다양하며 여러 부처의 영역에 걸쳐 있어서 마치 패키지와 같다. 이것을 정책 혼합(policy mix)이라고 부른다.

 

3. 사회기술 시스템의 거시적 진화

사회기술 시스템은 기술뿐 아니라 제도, 문화, 관습, 정치, 산업, 과학 그리고 행위자 등 시스템을 구성하는 유무형의 요소들 사이의 연결망이므로 ‘거의 모든 것’이다. 나아가 사회기술 시스템론은 동적 개념으로서 시간에 따른 변화, 즉 전이와, 전이의 결과로서 시스템 구성 요소들 사이의 관계성이 새롭게 설정된 새로운 시스템의 등장, 즉 전환을 논하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다. 따라서 감히 인류 문명 진보의 거시사(巨視史)를 논하는 데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등장한 사회기술 시스템은 ‘농업 기술 사회기술 시스템’이다. 농업 기술 사회기술 시스템은 수천 년간 조직화되지 않은 초기 시스템, 이후 귀족과 노예로 구성되는 단순한 시스템의 단계를 거쳐 봉건제(feudalism), 즉 중세(中世)의 지배적인 사회기술 시스템을 형성했다.

15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는 중상주의의 시대, 대항해 시대의 기간은, ‘항해 기술 사회기술 시스템’이라 부를 만하다. 이 시기에 상업 자본주의가 탄생하였고 이는 18세기 산업혁명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산업혁명은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현대적 사회기술 시스템을 만들었다. 산업혁명을 거치며 ‘화석 연료 기반 사회기술 시스템’이 공고히 자리를 잡았고, 화석 연료 기반 사회기술 시스템의 하위 시스템으로서 19세기 말 ‘전기 사회기술 시스템’, 이어서 20세기 초반 ‘자동차 사회기술 시스템’이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20세기 후반 들어 생산과 소비 활동을 더욱 가속하는 ‘정보통신 사회기술 시스템’이 등장하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2~4차 산업혁명은 편의적인 레토릭(rhetoric)일 뿐이며 본질적인 생산 양식과 사회 제도라는 측면에서 1차 산업혁명의 사회기술 시스템의 연장선상에 놓인 하위 개념일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산업혁명의 시대, 즉 산업화(industrialization)로 대표되는 근대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거시적인 사회기술 시스템의 동형화(isomorphism) 현상이다. 비록 확산과 전파에 시차가 존재하지만, 지리적인 이격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지의 사회기술 시스템은 큰 틀에서 동형화되어왔다. 

요약하면, 현대의 사회기술 시스템은 200여 년 전 서구에서 창발한 것이며, 전 세계로 확산되어 산업자본주의 생산 양식과 공화제 민주주의 정치 체제의 동형화를 일으켰다. 이는 농업 기술 사회기술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산업기술 사회기술 시스템으로 전환한 결과다. 사회기술 시스템의 전환을 주도한 사회로 구성된 국가, 그래서 그의 사회기술 시스템을 전파한 국가는 과거에는 제국주의 국가라 불렸고, 패권 국가, 선도 국가, 또는 선진국이라고 불린다. 이들은 사회기술 시스템의 초기 설계와 설정을 맡아 이후의 사회기술 시스템의 발전 경로를 선점하였다.

이것을 좁게 말하자면 기술 표준을 선점하였고 이후의 기술 발전 경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할 수 있다. 기술 표준을 만들어내는 국가가 기술의 패권을 쥐게 된다는 것이고, 따라서 남보다 앞서 독창적인 기술 표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의 근거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지나치게 기술 중심적이며 구시대적인 패권주의다. 이는 주어진 틀 안에서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데에만 유용하다. 근본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고, 사회기술 시스템의 전환에는 주저할 수밖에 없다.

 

나오며 - 현대 사회기술 시스템의 한계와 만들어가는 미래의 사회기술 시스템

산업혁명 이후 현대화(modernization)의 과정과 결과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이대로는 현대의 사회기술 시스템이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200여 년에 걸친 현대화의 과정에서 간과했던 부분이 있고, 이는 ‘현대화의 실수’라고 부를 만하다. 대표적인 것이 산업화의 부산물로서 위험(risk)을 생산한 것이다. 울리히 벡(Ulich Beck)은 ‘위험 사회(risk society)’론에서 지난 산업화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성찰적 현대화(reflexive modernization)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과학기술의 산물인 유전자 조작, 복제 기술, 유해 화학물질, 핵폐기물, 감시(surveillance)와 같은 현대 사회의 위협들에 대응하기 위해서 폭넓은 선택지와 다양한 시각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특히, 새로 등장하는 과학기술의 잠재적 위험(potential risk)을 평가함에 있어서 기존의 전문가 중심적 접근에서 탈피해 시민 참여와 숙의를 통한 상향식 의사 결정이 필요하다.

결국, 미래의 사회기술 시스템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현재의 사회기술 시스템이 만들어진 때에는 환경과 생태에 대한 이해와 다양한 가치들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으며 민주주의와 시민사회가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 충실한 고민과 설계가 없었던 것이다. 미래의 사회기술 시스템 형성 과정은 규범적으로 추구되고 있고 의도적으로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전의 사회기술 시스템 형성 과정과 구별된다.

다만 사회기술 시스템적 전환이라고 하여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른 사회기술 시스템으로 천지개벽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대부분의 레짐들이 유지되는 가운데 새로운 대안적 기술 시스템에 의해 레짐 이동이 일어날 뿐이다. 전이는 점진적이고 경로의존적으로 일어난다. 이때 중요한 것이 초기의 방향 설정이다.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는 한 사회의 자유의지의 문제이다. 그러나 기후 변화와 같은 전 지구적 난제를 앞에 두고 세계 시민과 다른 길을 가는 것은 쉽지도 않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다. 탈탄소 전환으로 간다는 큰 방향은 정해져 있다. 문제는, 누군가가 앞서서 길을 닦아놓아서 그 길을 걷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는 데에 있다.

만들어가는 사회기술 시스템에서 시민은 사용자로서 수동적으로 기술을 수용하는 단선적인 역할만 요구되지 않는다. 기술 시스템의 형성과 사회기술적 전이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능동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과학기술 분야의 전문성이 없더라도 과학기술 지식과 혁신의 공동생산(co-production)에 나설 수 있다. 기술과 사회는 하나의 융합된 시스템을 이루고 있으며 사회의 어느 구성원도 이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술 변화를 도외시하고, 참여하지 않고 방관한다면 현대 시민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고, 참여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래 사회기술 시스템의 구성에 참여할 때 비로소 미래를 선택할 자유를 갖게 된다.


☞ 강연 바로보기: [열린연단]_ 기술과 사회의 공동진화 경로 선택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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