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인문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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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인문정신
  • 진석용 대전대학교·정치학
  • 승인 2022.11.06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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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이 지혜 덕분에 지식이 축적되고 수많은 발견과 발명이 이루어지고 이로써 인간의 생활이 편리하고 윤택해진다. 그래서 현생 인류의 학명이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이다. 그러나 인간의 양심과 도덕적 능력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학사의 천재들이 인류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기도 하지만, 독재자의 야망이 한 시대의 인류를 전쟁의 참화 속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이기적인 인간들의 탐욕이 공동체의 균열을 초래하고 사회를 속고 속이는 암투장으로 만들기도 한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사회에서 부유하고 안락하게 살아도 정의가 없으면 언제든 갈등이 폭발하여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에 돌입할 수 있고, 권리와 의무가 분명하게 규정된 법과 정의가 있다 해도 인간들 사이에 사랑과 우정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외롭고 쓸쓸할 것이다.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해와 달과 별처럼 하늘을 하늘답게 만드는 것이 천문(天文)이고, 산천과 초목처럼 땅을 땅답게 만드는 것이 지문(地文)이듯이, 인문(人文)은 ‘인간의 무늬’, 즉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특징을 말한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통해 인간에게 필요한 덕목(德目)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학문이 바로 인문학이다.

우리나라가 속한 동양문화권에서는 인간의 행실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기준으로 이른바 ‘인도(人道)’ 혹은 ‘인륜(人倫)’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고, 이러한 가치판단은 대체로 충성, 헌신, 의리, 경로, 예의범절의 형태로 규범화되었다. 유가의 인의도덕(仁義道德)과 삼강오륜(三綱五倫), 묵가의 겸애설(兼愛說), 도가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 법가의 신상필벌의 법치론이 다 그러한 규범에 속한다. 이러한 규범은 대부분 공동체가 개인에게 일방적으로 부과하는 의무였다.

서양의 인문학도 인간의 행위에 관한 학문(실천철학)이라는 점에서 동양과 다르지 않다. 지혜와 용기와 절제의 조화로 정의를 구성한 플라톤의 사주덕(四主德), 아리스토텔레스가 설파한 지덕(知德)과 행덕(行德), 미신과 전통과 관습과 권위를 비판하고 인간의 자유와 독립을 주창한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근대적인 사고와 칸트의 정언명법, 존 롤스의 평등의 원칙 등등. 그러나 서양의 경우 규범을 제시할 때에는 논리적 설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사실관계를 규명하고 논증하는 일에 치중했다.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률은 개인적 존재, 이성적 존재, 사회적 존재로서의 본질을 확인하고 신장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으며, 자유정신, 독립정신, 비판정신이 인문정신이 되었다.

인문정신은 그것이 인륜이라고, 혹은 자유라고, 혹은 그 무엇이라고 알려준다고 해서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인문정신은 지식의 형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습관적 행위로 나타나는 실천적 정신이다. 나는 이러한 실천적 정신에 이르기 위한 필수조건이 표현과 개성의 자유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기를 표현하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위를 결정하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현상을 비판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도덕적 판단능력과 자기성찰능력을 갖춘 인간다운 인간이 성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문정신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그 정신이 자라나고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석용 대전대학교·정치학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일본 구마모토대학교 교환교수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교 객원교수를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칼 마르크스의 사상》, 《한국정치·사회개혁의 이념적 기초》(공저)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신기관》, 《서양정치철학사 3》(공역), 《리바이어던》, 《무정부 사회》, 《마르크스 이해하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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