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을 영어로 옮긴 번역가의 글을 번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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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을 영어로 옮긴 번역가의 글을 번역하다
  •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 승인 2022.11.06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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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한국 문학을 영어로 옮기는 번역가들의 글을 몇 편 번역하게 되었다. 한국 문학 번역을 주제로 하는 국내 도서에 포함시키기 위해 영어로 쓴 글들이 번역되어야 했던 것이다. 덕분에 한국 문학 작품에 대한 번역가들의 생각, 번역 과정의 모습을 엿볼 기회를 얻었다. 그렇게 읽게 된 글 중 하나가 <82년생 김지영의 번역가>였다. 

                             <82년생 김지영>의 한국어 원본, 미국판, 영어로 번역한 제이미 장

<82년생 김지영>을 영어로 번역한 제이미 장(Jamie Chang: 장해니)이 우연히도 김지영과 동갑내기인 82년생이라 글 제목이 그렇게 붙었다. 번역 의뢰를 받았을 때 번역가는 식은 죽 먹기일 거라 생각했단다. 같은 해 함께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성별도 여성으로 동일한 존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김지영이 보이는 정신적 문제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소설의 서술자가 남자 정신과 전문의이고 이 때문에 김지영의 이야기가 검열, 편집되었다고 판단한 번역가는 자신과 김지영의 삶을 일대기로 비교해보기로 한다. 이를 통해 제3자의 시선을 걷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김지영은 삼남매의 둘째로 서울에서 출생해 줄곧 서울에 살았고 대학을 졸업한 후 광고회사에서 9년 동안 일하다가 임신하면서 육아 문제로 퇴직했다. 어린 시절부터 남동생이 집안에서 특별 대접 받는 것을 경험했고 초등학교 시절의 남녀 학생 배식 순서 차별, 중학교 시절의 남녀 학생 복장 차별, 고등학생 시절 김지영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한 남학생의 협박, 대학생 시절 동아리 남자들에게서 들은 혐오발언, 직장인이 되어 마주하게 된 거래처 부장님의 음주 강권과 차별 발언을 견뎌냈다. 전업 주부가 된 후 전 직장에서 터진 여자 화장실 몰래 카메라 사건을 접했으며 카페에서 ‘맘충’이라 불리는 수모를 당했다.

번역가는 서울에서 외동딸로 출생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곳에서 7년 이상 살아본 적이 없다. 여러 나라에서 거주하며 교육을 받았고 대학과 대학원도 해외에서 나왔다. 거주지를 옮겨 다니며 구체적으로 어떤 경험을 했는지는 글에 나오지 않지만 고등학교부터 기숙학교에 다녔고 대학 학자금을 대출로 해결한 후 번역 일을 하며 상환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독립적인 삶을 살았던 듯하다. 그리고 김지영의 경험에 크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성 차별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일대기 비교 후 번역가는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을 더 많이 발견한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서로 다른 경로를 지나며 살아온 여자들 모두가 공감하는 여성 차별이 존재할까? 여자들부터가 김지영의 고통을 혹자는 한가한 투정으로, 혹자는 나약한 소극성으로 반박해 버린다면, 작가가 용감하게 드러내는 우리 현실에 대한 통찰과 개선 노력이 가능할까?

나는 김지영보다 십 년 이상 앞서 태어났다. 하지만 번역가에 비해 김지영과의 공통점은 더 많은 것 같다. ‘귀한’ 남동생을 둔 둘째딸이라는 형제 서열이 같고 줄곧 서울에서 살면서 교육 받았으며 회사원 생활도 경험했다. 성인이 되어 김지영과 같은 길을 걷지 않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아이를 낳지 않은 것, 그리하여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누릴 수 있는 점을 가능한 한 크게 인식하고 불편부당한 점은 나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주는 고통으로 여기는 식으로 생존 전략을 수립했다. 하지만 김지영처럼 임계치를 넘는 상황이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자신은 없다.

<82년생 김지영>이 출간되고 성별 대결 논란이 떠들썩했던 때로부터 벌써 6년이 흘렀다. 82년생 김지영의 번역가가 쓴 글은 김지영을 이해하려는 노력, 김지영을 통해 자기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번역가는 끝내 김지영에 온전히 공감하지 못했으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노력으로 얻어낸 자그마한 이해도 충분히 가치 있으니.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글쓰기 강좌를 운영하며 저서 『번역은 연애와 같아서』,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매우 사적인 글쓰기 수업』,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 등을 출간했으며, 『첫사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안톤 체호프 단편선』과 같은 러시아 고전을 비롯하여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홍위병』, 『콘택트』, 『레베카』 등 9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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