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 화산마을…미완의 화산산성과 풍차전망대
상태바
군위 화산마을…미완의 화산산성과 풍차전망대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2.11.05 19: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류혜숙의 여행이야기] 경북 군위 화산마을 화산산성

 

                                   화산산성 북문. 애초부터 미완의 성으로 옛 모습 그대로다.

산을 오른다. 화산산성 7㎞. 뒤로 휙 넘어질 것만 같은 등골 서늘한 초입을 지나면 구불구불 순식간에 첩첩산중이다. 점점 커지는 하늘을 향할 뿐 좌우를 둘러볼 정신은 없다. 그러다 갑자기 펼쳐지는 산밭, 완만하게 펼쳐진 마루가 모두 밭이다. 산꼭대기에 마을이 있다.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불리는 ‘화산마을’이다. 멀리 구름 같은 산줄기들이 아니었으면 길었던 산길도 그예 잊고 평지의 구릉이라 여겼을 것이다. 화산마을은 1962년 경 해발 700m 분지를 개간해 밭을 만들고 그 밭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당시에는 재건동 혹은 개간촌이라 불렸다. 초창기 정착민들은 정부로부터 약 6천 평 정도의 임야를 무상으로 지급받고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집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이는 개간으로 형성된 마을의 특징이다. 처음에는 네 개의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육군3사관학교 유격장이 들어서면서 마을 규모는 줄었고 지금은 한 개 마을만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고랭지 밭에서는 배추, 무, 양배추, 고추, 상추 등을 키운다.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불리는 화산마을. 산마루 고랭지 밭이 드넓다.

마을 안 갈림길에서 300m쯤 산으로 든다. 댐처럼 계곡을 막고 선 양수장 보가 있고 그 앞에 ‘화산산성 300m’ 이정표가 있다. 양수장은 아무도 모르는 호수처럼 고즈넉하다. 수면에 비친 가을 잎들이 촉촉하게 찰랑댄다. 조금 더 오르면 ‘화산양수장’이라 적힌 오래된 건물이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물을 호수관으로 길러갔다고 한다. 지금은 각 집집마다 수도관이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계곡으로 가면 수구문, 산길을 따르면 화산산성 북문에 닿는다. 곧고 가느다란 나무줄기가 정렬로 이끄는 산길로 향한다. 아직 동쪽에 치우쳐진 태양이 비스듬히 새어 들어와 숲은 빛 때문에 깜깜하고 빛 그림자에 밝다. 숲 그늘 속 저 멀리의 빛, 딱 그곳에만 내리는 빛 속에 무지개 문이 있다. 아직 밤의 서늘함이 남아 있는 차가운 돌 무지개다.

 

                                 숲길 끝 빛 내린 자리에 돌 무지개가 걸려 있다. 화산산성 북문이다. 
                                               북문에서 성벽을 따라 수구문으로 가는 길.

산의 이름은 화산(華山). 빛나는 산이다. 전설상의 동물인 기린의 형상을 닮은 천혜의 요새였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인 1709년, 병마절도사 윤숙은 이곳에 병영을 건설하고자 4개 문의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나라의 지원을 일체 받지 않고 장군 자신의 재산과 승려들의 시주로만 공사가 진행되었다. 성벽의 높이는 4m, 너비는 5m, 그렇게 쌓아 나가던 성은 심한 흉년과 질병으로 중단되고 만다. 백성들에게 계속 부역을 시킬 수 없었다. 이후 윤숙 장군은 전출되었고 그로부터 20년간 후임이 없자 성 쌓기는 그렇게 끝나버렸다. 화산산성은, 쌓다가 만 성이다. 성돌에 얕게 새겨진 글자가 있다. 스윽 감촉을 느껴볼 뿐 그 뜻은 알지 못한다. 성문을 지나면 계곡을 따라 넓은 숲길이다. ‘육군3사관학교 유격장’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여기서부터는 민간인 출입금지다. 이따금 새소리가 들릴 뿐, 돌 무지개 너머는 너무나 고요하다. 하늘이 밝아졌다.  

 

                                  화산산성 수구문. 문을 빠져나온 계류는 화산 양수장에 모인다. 

북문 앞에서 성벽을 따라 수구문으로 간다. 계곡의 옴팍한 곳을 가로질러 수구문이 열려 있다. 수구문을 지키는 병사가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늘게 뜬 눈처럼 그의 동공은 깊었다. 거기서부터 흘러나온 물은 순한 기울기로 펼쳐진 넓은 바위의 얕은 홈을 타고 자꾸만 자꾸만 흘렀다. 수백 년을 흘렀을 테지만 오늘의 물길은 얕았다. 강철 같은 바위라 생각했다. 수량이 많은 어떤 날에는 이 너른 바위 전체를 적셨을 것이다. 아마도 여러 번, 그래서 강철 같은 바위는 눈물에 흠뻑 적셔진 볼처럼 매끈했고 사금파리를 뿌려놓은 듯 반짝거렸다. 수목들은 계곡의 양쪽에서 긴 팔을 뻗어 잎을 떨어뜨렸다. 낙엽들은 물가에 옹기종기 모여 떠나지 못했다. 물은 여려 그들을 밀어낼 뿐 멀리 떠나보내지 못했다. 수구문을 지키는 병사가 되고 싶다고, 떠나지 못하는 낙엽처럼 생각했다. 수구문을 통과한 계류는 아래로 흘러 양수장에 모인다. 자꾸만 뒤돌아본다. 수구문은 이제 보이지 않지만 그는 나를 보고 있을 것만 같다. 물은 소리도 없이 보를 넘어 주르륵 흘러내린다. 사철 마르지 않는 물이라 한다. 이 물이 있어 화산마을 사람들이 이 산꼭대기에서 살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화산마을의 화산산성 전망대. 차박 성지로 알려져 있다. 
                                    화산산성 전망대 포토존. 저 아래 군위댐이 한눈이다. 

화산마을 꼭대기에 풍차가 있는 전망대가 있다. 저 아래로 군위댐이 한눈이다. 새가산과 절뒷산, 너치레산 등 이름 특이한 고만고만한 낮은 산들이 댐을 둘러싸고 있다. 뾰족한 각시봉(옥녀봉) 뒤로는 선암산과 뱀산이 돋보이고, 뒤로는 의성의 금성산과 비봉산이 어슴푸레하다. 댐 오른쪽으로 팔공지맥의 마루금 따라 경림산, 방가산이 달리고 영천의 보현산을 비롯해 기룡산도 조망된다. 먼 바다의 파도처럼 일렁이는 산 너울의 모습이다. 화산은 군위의 고로면과 영천의 신녕면 경계에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 지역에서 해발이 가장 높은 팔공지맥의 산이다. ‘교남지(嶠南誌)’에는 ‘봉우리가 해바라기 꽃과 같아 화산(花山)이라 하였다’고 나온다. ‘여지도서’에는 ‘화산(華山)은 청송부 보현산에서 뻗어 나와 공산(팔공산)의 으뜸 줄기를 이룬다’고 기록해 산줄기의 근원까지 밝히고 있다.

 

                                          화산산성 전망대 포토존. 저 아래 군위댐이 한눈이다. 

화산마을과 화산벌을 바라본다. 펑퍼짐한 정상부에는 풍력발전기가 한가롭게 돌아간다. 민둥민둥 보드랍게만 보이는 산세지만 화산산성과 유격장이 있는 북쪽은 바위절벽이 많은 협곡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을 넘은 북한군과 대구의 길목인 다부동 일대에서 처절한 전투가 있었다. 수세에 몰린 북한군은 의성, 군위를 지나 영천을 통해 대구로 들어오는 우회 길을 택했고, 국군은 맹공을 퍼부어 3천500명이 넘는 북한군을 물리쳤다. 그것이 유명한 영천전투고, 그 주 무대인가 바로 이곳 화산이다. 왜구를 막기 위한 천혜의 요새였던 성터의 DNA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군사훈련을 위한 요충지로 쓰이고 있다. 산꼭대기 하늘은 맑았으나 산 아래로 내려오자 하늘은 회색빛이다. 차들이 줄지어 산을 오른다.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