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
상태바
“난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10.31 13: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에라스무스 평전: 광기에 맞선 이성 |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 정민영 옮김 | 원더박스 | 280쪽

 

이 책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대표작이자 에라스무스를 다룬 여러 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으로 종교전쟁의 혼돈 속에서 모든 극단을 거부하며 평화와 자유를 지키려 했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삶을 빌려 광란의 시대를 고발하고 자신의 신념을 밝힌 작품이다. 츠바이크는 이성과 계몽의 힘으로 인류의 화합을 이루려는 에라스무스의 숭고한 정신과, 어느 편에도 들지 않고 어떤 위험도 피하려는 태도로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그의 소심함을 동시에 보여 준다. 츠바이크가 그려 낸 에라스무스의 모습은 대립과 반목, 갈등과 혐오의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게 한다.

츠바이크는 예리한 시선으로 에라스무스의 삶을 추적한다. 츠바이크는 혼인이 금지된 신부의 자식, 수도원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고 스물여섯에 신학교를 빠져나와 프랑스와 영국,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여러 나라를 전전한 에라스무스의 생애에서 ‘자유’라는 고결한 가치를 발굴한다. 에라스무스는 실로 그 어느 것에도, 그 누구에게도 구속되려 하지 않았다. 편협한 광신은 그가 가장 멀리한 것이었고, “난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마지막까지 고수하며 자기 자신만을 대표하는 자세로 살아간다. 

에라스무스의 대표작인 『우신 예찬』은 ‘우매함’이라는 인물을 통해 당시 사치와 향락에 빠진 교회를 신랄히 풍자한 계몽주의의 효시로 꼽힌다. 동시에 이 책은 가톨릭교회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던 민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면서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중의 의식 깊은 곳에 개혁을 향한 의지를 심어 주었다. 에라스무스의 또 다른 중요한 업적은 독자적인 성경 번역이었다. 그때까지 성경을 옮기는 일은 교황청의 허락 하에 이루어지는, 교회의 권위를 상징하는 행위였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에 15년이나 앞선 에라스무스의 라틴어 성경 번역은 그리스도의 삶과 멀어지고 있는 교회를 비판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 발굴’이라는 자신의 지론을 실천한 것으로,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자연히 복음주의 신앙의 기틀이 되었다.

잘 알려져 있듯,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아흔다섯 항목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때려 박으며 종교개혁의 나팔이 울린다. 그러나 그 일을 예비한 것은 에라스무스였다. “가톨릭 신학자들이 격분해 말하듯 ‘에라스무스가 알을 낳아 주었고, 루터가 그것을 부화시킨 것’이다.” 루터 스스로도 “누구든 자신의 생각이 에라스무스의 사상으로 가득 차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에게서 배우지 않은 자 누구이며, 그에게 지배받지 않는 자 어디 있겠습니까?”라며 에라스무스가 자신을 지지해 주기를 간청한다. 그렇지만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가톨릭 비판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편을 들지 않는다. 루터와 종교개혁가들의 거친 격정과 가톨릭교회에 대한 증오 섞인 비난은 그가 가장 멀리하는 바였기 때문이다. 

루터가 가톨릭교회에 반기를 든 이후 로마에서는 그를 향한 파문장이 마련되고, 많은 개혁가가 종교재판에 넘겨지며, 곳곳에서 화형대의 불길이 치솟는다. 한편 민중의 거센 혁명 의지를 마주한 개혁가들은 타락한 교회를 바로 세우겠다는 당초 목적과 달리 맹목적인 광신에 사로잡혀 점차 격렬해진다. 그렇게 그리스도교, 그리고 유럽은 둘로 갈라진다. 하지만 에라스무스는 그런 혼란과 분열에 빠져들기를 거부한다. “에라스무스가 원하는 것은 평화, 평화, 평화뿐이다. 어느 편에도 들지 않고 비켜서 있겠다는 것, 평온뿐이다.”

이제 시대는 끔찍한 증오로 묻는다. 교황이냐 루터냐, 가톨릭 편에 설 것인가 신교의 길을 걸을 것인가, 교리인가 복음인가. 정신의 자유와 내면의 독립을 추구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에겐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도, 루터와 신교의 맹목적인 혁명 의지도 견디기 힘든 것이었으리라. 정신적인 것, 지고한 인류애를 바탕으로 한 인문주의를 내세운 에라스무스는 양편을 화해시키고자 노력한다. 교황청에 루터를 파문하는 것은 가혹한 처사이며 루터가 지적한 오류와 잘못을 논의할 종교회의를 열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내고, 반대로 루터에게 화급하고 거칠게 나서지 말 것을 조언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에라스무스의 비극이다. 정신의 인간 에라스무스는 갈등을 중재할 뿐 해소하지 못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보름스에서 종교회의를 열어 루터를 불러들일 때 그는 자신의 연구실에 머물렀다. 추방당한 루터가 복음을 앞세워 교황과 가톨릭교회의 탈선을 비판하며 그에게 자문할 때에도 자신은 루터의 글을 정확히 읽지 않았다며 빠져나간다. 이와 동시에 교황이 종교전쟁에 내몰리는 독일 민중을 위해 앞으로 나설 것을 요구하지만 역시 이런저런 말로 둘러댈 뿐이다. 에라스무스는 언제나 결정적인 언사를 피하고, 중립을 지킨다.

츠바이크는 인물을 찬양하거나 그의 강점만을 드러내지 않고 위대함과 그 한계를 여과 없이 서술한다. 이 책에서도 에라스무스와 인문주의의 성과는 물론 미흡한 부분까지 낱낱이 드러내 보인다. 양쪽에 모두 관계하고 있는 에라스무스 내면의 갈등, 평화와 화합을 향한 고뇌, 양편과 함께 허물어져 가는 그의 상황을 밀도 높게 그려 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