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미국을 만든 도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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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을 만든 도시 이야기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10.31 13: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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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개 도시로 읽는 미국사: 세상을 움직이는 도시가 들려주는 색다른 미국 이야기 | 김봉중 지음 | 다산초당 | 376쪽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사는 미국독립전쟁과 남북전쟁, 베트남전쟁 등 몇 가지 주제에 한정되어 있다. 역사적 인물도 조지 워싱턴, 링컨, 케네디 등 소수의 인물만 떠오를 뿐이다. 거대하고 다양한 그리고 복잡한 미국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시작된 이 책은 국내 최초로 도시로 읽는 미국사이다. 

30개 도시를 선별해서 각각의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면서 작게는 그 주와 인근 지역, 크게는 미합중국의 합체를 모자이크처럼 완성해 보려는 시도이다. 30개 도시를 통해서 미국 역사와 문화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조명하는 동시에 그 다양함을 관통하는 미국적 가치와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 필라델피아와 라스베이거스 두 도시 이야기를 들어보자.

* 산업혁명의 심장에서 좀비들의 거리로, 필라델피아

1993년에 발표한 ‘필라델피아의 거리들’ 뮤직비디오에서 유명한 록 뮤지션인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필라델피아의 거리를 걷고 있다. 그런데 화면 속 모습들에는 화려함보다는 암울한 분위기가 가득하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흑인들 사이를 지나치는 스프링스틴의 옷도 다 해져서 남루하다. 이 노래는 같은 해에 개봉된 영화 [필라델피아]의 O.S.T.이다. 동성연애자이며 에이즈 환자인 주인공이 죽어 가면서도 변호사로서 자신의 일을 꿋꿋이 처리하는 얘기를 다룬 영화이다. 왜 영화 제작자들은 필라델피아를 선택했을까. 미국 독립 기념관과 ‘자유의 벨’이 필라델피아의 상징이다. 식민지 시대부터 자유와 평등의 상징이었으며, 그 이상을 추구한 곳이 필라델피아였다. 필라델피아는 헬라어로 ‘형제애의 도시’이다. 동성애자이며 에이즈 환자인 주인공이 그를 향한 편견과 불평등에 맞서 싸우는 모습이 필라델피아답다.

19세기 내내 필라델피아는 미국 산업화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876년 세계 박람회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미국 최초로 세계 박람회가 열린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세계 자본주의 강자로 급부상하는 미국의 위상을 만천하에 떨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타자기, 재봉틀, 전화기와 같은 새로운 발명품에 매료되었고, 자유의 여신상의 일부가 될 손과 횃불 동상에 감탄했다. 무엇보다도 박람회의 수많은 건물과 전시물에 동력을 제공하는 어마어마한 증기기관에 압도당했다. 그러나 발전을 거듭하던 필라델피아는 1929년 대공황으로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대공황의 어두움이 걷히고 나서도 필라델피아의 경제는 회복되지 않았다. 도심은 황폐화되어 갔고 백인 중산층은 도시를 빠져나갔다. 대신 남부에서 올라온 흑인들이 도심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흑인 대이동의 중심지가 필라델피아였다. 미국 산업화가 필라델피아에 집약된 만큼 그것의 황폐화는 빠르고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켄싱턴 거리는 마약에 중독된 ‘좀비의 거리’가 되고 말았다. 도로는 마약에 중독된 노숙자들로 가득하고, 그들은 마치 영화 속의 좀비 같은 괴이한 몸동작을 하고 있다. 세계 자본주의 최정상에 있는 미국의 모습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 황무지에 들어선 세계 최대의 환락 도시, 라스베이거스

1931년은 라스베이거스 발전에 기폭제가 된 역사적인 해였다. 네바다주가 도박을 합법화했고, 이혼 필요조건으로서 거주하는 기간을 6주로 단축시켰다. 게다가 그해에 후버댐 건설이 시작되었다. 건설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라스베이거스 인구는 순식간에 5,000명 정도에서 2만 5,000명으로 불어났다. 라스베이거스 사업가들과 마피아 큰손들은 카지노와 쇼걸 극장을 운영하면서 노동자들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후버댐 노동자들뿐만 서부 사람들 사이에 라스베이거스는 남자들의 환락가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라스베이거스에는 화려하게 꾸민 호텔들이 들어섰다. 1957년에는 ‘밍스키의 폴리스’라는 최초의 토플리스 쇼가 공연되기 시작했다. 전후 라스베이거스의 성장에는 마피아의 역할이 컸다. 유대계 마피아 큰손이었던 ‘벅시’ 시걸이 1946년에 건립한 플라밍고 호텔이 그 대표적인 것으로서, 1950년 이전에 건립된 호텔 중에서 아직까지 영업하고 있는 유일한 호텔이다.

1966년 추수감사절 휴일에 괴짜 억만장자 하워드 휴스가 라스베이거스의 ‘데저트 인’에 묵으면서 라스베이거스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데저트 인’은 1950년에 문을 연 호텔로서 당시까지 라스베이거스에서 가장 큰 9층짜리 호텔이었다. 그런데 휴스는 한 달 내내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주인이 강제로 쫒아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휴스는 호텔을 사 버렸다. 그리고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이후 무려 4년 동안 호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그는 매니저들을 통해서 주변 호텔과 카지노를 사들였다. 그 매니저 집단은 모두 모르몬교도들이었다. 이들은 휴스의 ‘모르몬 마피아’로 불렸다. 휴스 자신은 모르몬교도가 아니었지만, 그들이 술, 담배, 도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고용했던 것이다. 2000년에 부동산 업자인 스티브 윈이 ‘데저트 인’을 매입했다. 이때도 모르몬 마피아가 개입했다. 2004년 윈은 유서 깊은 그 호텔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호텔 카지노를 건축했다. 그것이 지금의 윈-앙코르 호텔이다. 라스베이거스는 미국 최고의 휴가지가 되었다. 주변의 그랜드캐니언이나 옐로스톤 국립공원보다 더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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