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동아시아의 역사적 대전환 초한전쟁, 지리적 관점에서 재조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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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동아시아의 역사적 대전환 초한전쟁, 지리적 관점에서 재조명하다
  • 이동민 가톨릭관동대·지리교육학
  • 승인 2022.10.30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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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초한전쟁: 역사적 대전환으로의 지리적 접근』 (이동민 지음, 흠영, 432쪽, 2022.09)

 

한 고조 유방과 서초패왕 항우가 중국의 패권을 놓고 격돌했던 초한전쟁은 우리에게도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초한전쟁을 다룬 대하소설 『초한지』는 국내에서도 유명 작가들에 의해 여러 판본이 출간된 바 있고, ‘역발산기개세’라든지 ‘항우장사’ 같은 초한전쟁에 유래하는 말 또한 일상생활에서 심심치 않게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장기 역시 ‘한(漢)’과 ‘초(楚)’가 적힌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초한전쟁을 모티브로 삼았고, 장국영 주연의 걸작 영화로도 제작된 중국의 경극 〈패왕별희〉 또한 초한전쟁을 주제로 한 것이다. 한 고조 유방이 건달 출신이었다거나, 젊은 시절 건달의 바짓가랑이 사이를 기어갈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았던 한신이 배수진으로 20만 조나라 대군을 격파하고 북벌을 완수했다거나, 서초패왕 항우가 유방을 상대로 연승을 이어 갔지만 결국에는 유방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한 왕조를 세웠다는 등의 이야기도 독자 여러분의 귀에 익숙하리라 믿는다. 

그런데 초한전쟁의 전개와 과정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의문이 들 법도 하다. 유방은 어떻게 가진 것 하나 없는 건달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불과 몇 년 만에 초한전쟁의 승자가 되어 한 왕조를 수립할 수 있었을까? 한신의 배수진은 어떻게 이기는 배수진이 될 수 있었을까? 당대 최강의 군사력을 갖추고 연승을 이어가던 항우는 왜 초한전쟁의 승자가 아닌 패자가 될 수밖에 없었을까? 왜 한신은 토사구팽당해야 했을까? 그리고 초한전쟁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초한전쟁』(부제: 역사적 대전환으로의 지리적 접근)은 이 같은 물음에 대해 지리적 관점에서 심도 있으면서도 새로운 각도의 답을 제시한다.
  

초한전쟁, 땅으로 읽어야 할 필요성

『초한전쟁』은 초한전쟁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경과를 역사적 관점뿐만 아니라, 지리적 관점까지 적용하여 다각도로 재조명한 책이다. 이 책은 『사기』, 『한서』, 『자치통감』 등의 일차 사료와 초한전쟁에 대한 최신 연구논의에 대한 충실한 검토를 바탕으로, 40여 매에 달하는 방대한 지도를 활용하여 지리적인 시각에서 초한전쟁을 재조명하고 재해석한다.

유방이 건달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아울러 항우가 전투에서만큼은 패한 적이 없는 군사적 천재였다는 사실 역시 상식에 해당한다. 그런데 어떻게 건달 유방은 난세를 맞아 군사를 일으켜 한 세력의 지도자가 되고, 한 고조가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항우는 단순히 일신의 무용만으로 그토록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초한전쟁』은 고대 중국의 지리적 특징을 바탕으로 이에 대한 심층적이고 합리적인 대답을 제시한다. 즉, 고대 중국에는 공권력의 지배 밖에 있는 비주류 집단의 공간인 택(澤)이 존재했고, 유방은 비록 주류 사회에서는 건달이었지만 택에서는 인망과 수완을 갖춘 실력자였기 때문에 초한전쟁기에 두각을 드러내며 한왕, 나아가 한 고조로 성장할 수 있었다. 망국 초나라의 명문가 출신인 항우 역시 택중에서 싸움과 전투에 이골이 난 초나라의 유민들을 결집하여 서초패왕의 신화를 쌓아갈 수 있었다.

유방은 어떻게 항우를 상대로 고전을 이어가다가 결국에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 이 역시 당시 중국의 지리적 여건, 그리고 땅을 바라보는 유방과 항우의 지리적 안목 차이에 기인하는 부분이 작지 않다. 유방은 고대 중국의 중심지였던 관중분지에서 선정을 베풀어, 이곳을 자신의 확고한 세력 기반으로 다질 수 있었다. 그리고 항우에게 수세에 몰린 와중에서도 진나라의 대규모 식량창고가 있던 형양‧성고를 장악하여 보급 문제를 해결하고, 한신에게 북벌을 명해 서초를 지정학적으로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항우는 초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에 대한 복수심으로 관중분지를 초토화하여 관중의 민심을 잃었음은 물론, 중국 각지의 지정학적 정세를 고려하지 않은 제후 분봉을 시행하여 제후와 유력자의 지지까지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자신의 근거지이기는 했지만 중국을 다스리기에는 적합하지 못한 지리적 입지조건을 가졌던 팽성을 도읍으로 삼음으로써, 제후들을 통제하고 위기에 대처할 역량을 스스로 제한하고 말았다. 이러한 점에서 『초한전쟁』은 항우는 전투에서는 연승을 거두었지만 지리적 패착 때문에 결국 초한전쟁의 패자로 전락했고, 유방은 군사력으로는 항우보다 열세였지만 지리를 볼 줄 아는 눈을 갖춘 덕분에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한 왕조를 건국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초한전쟁』은 여러 편의 지도를 활용하여 초한전쟁기에 일어났던 여러 전투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에서 심도 있는 이해를 제고하고 있다. 일례로 한신의 배수진으로 유명한 정형 전투에 대해서, 이 책은 한신의 배수진은 전력이 열세인 병력의 사기를 고취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전장 공간의 지리적 환경을 고려한 승리의 비책이었음을 지도를 통하여 밝히고 있다. 『사기』나 『자치통감』부터 한신의 배수진을 군사들을 일부러 불리한 환경에 몰아넣어 필사적으로 싸우게 하려는 시도였다고 논한 것을 고려하면, 지리적 관점에서 정형 전투를 재해석한 『초한전쟁』의 시각은 분명 참신하면서도 학술적으로도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초한전쟁』 253쪽에 실린 정형 전투 지도. 이 지도는 한신의 배수진이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배수진이 아니라, 전장 공간의 지리적 환경에 착안한 승리의 배수진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초한전쟁, 통일 중국과 동아시아 문화권이라는 영역의 기초를 만든 역사적 대전환
  
『초한전쟁』은 초한전쟁의 과정과 결과를 지리적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마지막 장인 13장은 초한전쟁 종결 직후~한 무제 재위기까지 한나라의 역사적‧지리적 변화 과정을 따라가면서, 초한전쟁을 통해 이룩된 한 왕조가 이전의 상‧주 왕조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통일 중국과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에 중요하게 이바지할 수 있었는지를 지리학자의 시각에서 논의한다. 즉, 『초한전쟁』은 초한전쟁이라는 거대한 전쟁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이 인한 중국과 동아시아를 어떻게 변화‧발전시켰는가에 대한 이해까지 제공한다는 의의도 가진다.

아울러 『초한전쟁』은 중국사를 다룬 책이면서도, 한국의 독자들이 초한전쟁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국사, 한국지리와의 비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책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상‧주 왕조와 한 왕조의 결정적 차이를 삼국시대의 신라‧고구려‧백제와 가야‧동예‧옥저의 차이를 사례로 설명하고, 유방이 팽월을 이용해 항우를 교란하는 부분은 고려 태조 왕건이 금성(오늘날 전남 나주시)을 장악하여 후백제를 지리적으로 견제했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이는 초한전쟁을 다룬 고전 문헌이나 번역서가 제공할 수 없는, 『초한전쟁』만이 갖는 독보적인 의의라고 할 수 있다. 

초한전쟁은 대중적으로도 어느 정도 알려진 역사적 사건이다. 하지만 초한전쟁을 지리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초한전쟁에 대한 이해를 심화함은 물론 새로운 견지에서 초한전쟁을 바라볼 수 있다. 이는 비단 초한전쟁에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역사의 전개와 발전은 지표 공간상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지리적 접근과 재조명은 지리학은 물론 역사학의 발전, 그리고 역사 인식 심화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여겨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초한전쟁』이 초한전쟁사에 대한 이해의 제고는 물론, 역사와 전쟁사에 대한 지리적 재조명을 견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빈다.

 

이동민 가톨릭관동대·지리교육학

가톨릭관동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 서울대학교 지리교육과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 『초한전쟁』, 수필집 『서해에서』, Geography Teacher Education and Professionalization(공저), 역서 『세계화와 로컬리티의 경제와 사회』,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공역), 『지리의 모든 것』을 발간했으며, 2019년 가톨릭관동대학교 연구우수교원으로 선정되었다. 역사, 특히 전쟁사를 지리학 및 지리교육의 견지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에 천착하고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사를 지리적으로 재해석한 교양 과목 「지도와 지리학으로 읽는 제2차 세계대전사」는 매학기 수강 초과가 될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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