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교 시절은 지구의 공전과 함께 이러구러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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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교 시절은 지구의 공전과 함께 이러구러 흘러갔다
  •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 승인 2022.10.29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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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명의 생활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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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舊 경기고등학교 화동 교사

ㅎ군이 내게 전화를 했다. 졸업 50주년 문집에 글을 왜 안 보내냐고. 안 보낸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라 수백 명일텐데 내게 전화한 걸 보니 내가 그런 글을 보내 마땅한 사람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아니지. 그저 나와 친분이 있어서 그랬겠지.

내가 글을 안 보낸 까닭은 학창 시절에 관한 글을 써 보았자 좋은 얘기가 나올 것 같지 않아서였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내게 가장 우울한 시절이었다. 직접적인 이유는 모르겠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호르몬 작용이 아니었나 한다. 내가 정확한 이름을 모르는 우울 호르몬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하면 재미가 없으므로,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라도 간접적인 이유라도 말해볼까 한다. 

나는 중학교를 부산에서 나왔는데, 공부를 워낙 잘하여 부산에서 썩기 아까워서(?!) 서울의 최고 명문 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대학생이었던 형과 함께 가회동에서 하숙을 하였다. 가을에는 아버지께서 직장을 서울로 옮기셔서 같은 방에서 잠시 지내다가 나중에 집이 다 이사를 왔다. 처음 서울에 오니 상투적인 말처럼 모든 것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많은 것이 낯설었다. 우선 말씨가 매우 세련되고 얍삽하여 투박한 사투리의 나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얍삽한 건 말씨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행동거지도 그런 것 같았다. 요즘도 적당한 상황에서 내가 하는 말 중에 “부산에서는 야 내가 빵 사줄게 하였는데 서울에서는 야 빵 좀 사 줘 하더라”가 있다. 

나는 그것이 서울 아이들의 특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최근에 가까워진 동창생 ㅇ군에게 그런 얘기를 하였더니 “아냐. 내가 다녔던 중앙중학교에서는 그렇지 않았어.” 하는 것이었다. 아, 서울 아이들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구나. 어쨌든 나는 그런 서울의 얍삽함이 좋을 때도 있다. 쉰 살 남짓부터 경남중고등학교 동창들 모임에도 나가는데 그쪽 분위기는 역시 좀 더 거칠다. 우리가 남이가의 분위기 말이다. 나는 우리가 남이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경기의 얍삽함이 좀 더 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10대의 우울은 고3 때 극에 달해 하반기에는 거의 공부를 하지 못하였다. 대조동 집에서 통학하는 것도 몸에 부치어 부모를 졸라 삼청동에서 한두 달 하숙을 하기도 했는데, 보다 못한 주인 아줌마가 어머니에게 연락하여 데려가라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데려갔다. 아니 내가 짐 싸서 용달차에 싣고 집에 갔다. 공부는 안 하고 잠만 잤기 때문이었다.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었다. 결과는? 물론 대학 입시의 실패였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경남중학교에서 경기고등학교로 진학한 여러 명 가운데 대부분이 제 해의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 나처럼 우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방황하기 일쑤였다. 요즘 해외 조기 유학의 예전 판, 국내 판이라고나 할까?

우스운 것이, 재수 시절에는 활기를 찾아 재수 친구들과 놀면서 공부하면서 재미있게 지냈다. 학교도 무난히 좋은 데로 들어갔다. 나의 우울은 20대를 걸쳐 찌꺼기가 남아있었지만 다른 한편 조증 같은 활기도 있었다. 뭐 조울증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화동 언덕의 학교 정문 옆에는 한반도에서 가장 북쪽의 대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그 옆에서는 등교 길(나는 등굣길이라고 쓰기를 거부한다)에 까만 운동화의 하얀 끈까지를 단속하는 선생님이 단장을 허리 뒤로 들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에는 서장석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을 운동장에 일렬로 세워 놓고 “경기 에네르기”를 외쳤다. 어떤 경우였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전체 체조를 하는 시간도 있었는데 ㅅ군이 대표로 앞에서 시범을 보였다. 생물 실험실(?)에는 예쁜, 아니면 예뻤다고 기억하고 싶은 누나가 있었다. 제물포 고등학교에서 전근 와서 수업 시간에 만날 “제고” 얘기를 하던, 아이들을 겁나게 패던, 요새 같으면 수사 받았을 독어 선생도 있었고, 수업 시간에 축구 얘기에 열 올리다 교과서를 반밖에 안 뗀 국어 선생도 있었고, 그를 신씨라고 지칭하던 장가 안 가거나 못 간 황금박쥐 선생님도 계셨다. 이러구러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세 차례 지구의 공전과 함께 흘러갔다.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글문화연대 대표 등을 지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담론에서 실천으로: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 『단일 사회 한국: 그 빛과 그림자』,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대한민국 정치사』, 『한국 정치의 성격』, 『정치란 무엇인가: 김영명 교수가 들려주는 정치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최근 수필집 『봄날은 간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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