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 실존자로서의 인간은 이중적 존재…‘자기존재(Selbstsein)’와 ‘로서의 존재(Alss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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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 실존자로서의 인간은 이중적 존재…‘자기존재(Selbstsein)’와 ‘로서의 존재(Alssein)’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10.23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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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과 존재/인간질서의 의미에 관하여 | 베르너 마이호퍼 지음 | 심재우·윤재왕 옮김 | 박영사 | 312쪽

 

19세기로부터 20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법학계는 법실증주의의 물결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법을 통한 국가권력의 남용과 횡포를 몸소 뼈저리게 체험한 인류는 2차 대전 후 법실증주의를 버리고 다시 자연법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이에 따라 자연법의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했으나 그 자연법의 “자연”의 개념의 다양성 때문에 여러 갈래의 자연법론이 전개되어 나왔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마이호퍼는 특이하게 법존재론적 관점에서 자연법을 파악하는 시도를 했다.

그는 현대의 실존철학에서 파악된 ‘자기존재(Selbstsein)’ 이외에 ‘로서의 존재(Alssein)’라는 현존재 유형을 존재론적 영역에서 새로이 발견해 낸다. 그는 이 ‘로서의 존재’에서 사회적 존재 영역의 기본개념과 기본구조를 밝혀내며, 그것으로 체계적 법존재론의 확립을 시도한다. 그 시도를 담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현대의 고전에 속하는 법철학적 저작으로서 20세기의 대표적 철학인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의 존재론에 입각하여 법철학에서 ‘법존재론(Rechtsontologie)’이라고 하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 놓았다. 원래 하이데거의 존재해석에 따르면,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의 현존재의 문제성은 본래적인 ‘자기존재’가 비본래적인 ‘일반인(das Man)’으로 해소되어 자기존재성을 상실하여 버린다는 데 있다. 따라서 일상성의 세계에서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사회적 존재는 현존재의 비본래성의 양태로서 ‘실존의 타락형태’ 또는 ‘자기존재의 결핍된 형태’로 이해된다.

마이호퍼는 하이데거의 이러한 존재이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현존재의 존재론적 지평을 사회세계로 확장해 ‘로서의 존재’도 자기존재와 똑같은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실존범주임을 밝힌다. 그에 의하면 법의 세계에서는 개인적 존재로서의 인간(Individualperson)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Sozialperson)이 중요하며, 그 사회적 존재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추상적 일반인’이 아니라 구체적 일반인, 즉 ‘로서의 일반인’이며 그것은 사회세계의 본래적 인간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인간실존의 타락형태’가 아니고 오히려 사회적 존재의 현존재 양식으로서 사회적 실존의 본래성을 뜻하며, 이를 통하여 비로소 법의 세계, 즉 실천이성의 세계에 이르러 갈 수 있다고 한다.

‘로서의 존재’는 주관화된 자기존재에서가 아니라 객관화된 타인존재에서 사회성과 일반성의 요소를 바라본다. 나의 자기존재의 객관화를 타인의 입장으로부터 바라본다면 너의 자기존재의 주관화를 뜻하게 되므로, 결국 그것을 나의 입장으로부터 바라볼 때는 ‘타인의 세계(die Welt der Andern)’를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자기존재의 객관화에 의하여 나는 유일자로서의 ‘나’가 아니라 이미 타인에 대하여 ‘하나의 다른 타인(ein fremder Anderer)’이 되는 것이다. 자기의 개인적 입장으로부터 자기화된 너와 나가 아니라, 타인의 사회적 입장으로부터 타인화된 나와 너의 사회적 존재로서 파악된 인간존재가 이른바 ‘로서의 존재’이다. 이러한 ‘로서의 존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갖는 사회적 지위 또는 신분의 명칭으로부터 따온 말이다. 

그런데 이 ‘로서의 존재’에게는 그러한 사회적 지위 또는 신분에 상응하는 역할(Rolle)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러한 자로서(als Solcher)’의 현존재 양식이며 그때그때 그러한 자로서의 역할에 상응하는 태도를 취할 것이 이미 법 이전에 하나의 규범으로 요구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법적 권리와 의무는 법 이전의 ‘로서의 존재’의 사회적 직분으로부터 생겨 나온다는 것이다. 즉 법적 권리·의무의 모체는 ‘로서의 존재’의 역할, 다시 말해 ‘직분’이다. 이처럼 ‘로서의 존재’의 역할 또는 직분은 법 이전에 존재하는 사회질서의 원형으로서 역사적 현실 가운데서 사실상의 규범력을 가지고 질서적 기능을 하므로, 이것을 일컬어 ‘제도적 자연법(ein institutionelles Naturrecht)’이라 한다.

그러나 ‘로서의 존재’의 제도적 자연법과 ‘자기존재’의 실존적 자연권은 긴장관계를 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전자는 객관적 자연법으로서 “일반적이 돼라!”라는 정언명령에 입각하고 있지만, 후자는 주관적 자연법으로서 “너 자신이 돼라!(Werde Du-selbst!)”라는 준칙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율배반적 요구명제는 그 자체로서는 모순으로 남게 되며 순수한 해결책은 있을 수 없지만, 그러나 그러한 모순은 ‘자기존재’와 ‘로서의 존재’의 실존론적 변증법에 의하여 완화될 수 있다. ‘자기존재’와 ‘로서의 존재’는 각각 병렬되어 있는 현존재 유형(Selbstsein und Alssein)이 아니라 중층적으로 “‘로서의 존재’ 가운데서의 자기존재(Selbstsein im Alssein)”로 이해되므로, 양 존재의 평면적인 충돌은 면할 수 있다.

이 세계 내에서 모든 현존재는 그의 사회생활에 있어 그때그때 이미 규정되어 있는 ‘로서의 존재’의 틀 안에 끼어 들어가게 되며, 이 틀을 벗어날 수 있는 인간존재는 현실적으로는 없다. 부모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고, 선생도 아니고, 학생도 아니고, 이웃도 아니고, 국민도 아닌 어떤 추상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란 것은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기존재의 실현이란 언제나 ‘로서의 존재’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자기존재의 가능(Selbstsein-Konnen)은 언제나 ‘로서의 존재’ 가운데서만 가능한 것이다. 법질서는 바로 이 ‘로서의 존재’의 역할을 권리·의무로 보장하는 사회제도이며, 그 가운데서 자기실현을 가능케 하는 실존조건으로 이해된다. 이것이 법-내-존재(Im-Recht-sein)로서의 인간이다.

마이호퍼는 이렇게 하이데거의 존재해석의 일면성에 검토를 가하고, 자기존재에 내재하는 개인적·주관적 성질을 ‘로서의 존재’의 사회적·객관적 성질로 재구성함으로써 고립된 개인이 아닌 공존자로서의 사회인을 실존론적·존재론적으로 정당화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대담하고도 독창적인 시도는 현대 법철학에서 하나의 체계적인 법존재론의 확립을 가능케 하였으며, 그로부터 ‘법적 존재’의 의미를 해석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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