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에 앞서 ‘실리’를 추구한 15세기 조선의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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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에 앞서 ‘실리’를 추구한 15세기 조선의 국제관계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10.23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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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벌과 사대: 15세기 조선의 대외정벌과 대명의식 | 이규철 지음 | 역사비평사 | 304쪽

 

15세기 조선의 대외정벌은 기존의 통설에서 여진이나 왜구 세력의 침입 혹은 약탈 때문에 시행되었다고 설명되었다. 하지만 당시 기록들을 보면 외부 세력이 조선을 침입한 횟수나 규모는 매우 적었다. 조선은 자신들이 입었던 피해보다 훨씬 큰 규모로 대외정벌을 시행했다. 심지어 침입의 주체를 파악하지도 않고 특정 세력을 대규모로 정벌한 사례도 있었다. 이는 15세기 조선의 대외정벌이 외부 세력에 대한 대응이 아니라 직접 기획하고 주도했던 대외정책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5세기 조선의 대외정벌은 대부분 여진 세력을 대상으로 시행되었다. 그런데 여진 지역은 명목상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명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조선의 대외정벌은 표면적으로는 여진과 왜구에 대한 군사행동이었지만 실제로는 명-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체와 연결된 문제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바로 사대(事大)이다. 조선 건국 이후 사대의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특히 태종과 세종은 지성사대(至誠事大)를 강조하며 명에 대한 존중심을 항상 드러냈다. 여진에 대한 대규모 정벌은 조선이 누구보다 강조했던 사대의 가치에 어긋나는 대표적 사례였다. 그러나 조선의 국왕들은 사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대외정벌의 필요성 역시 강조했다. 15세기의 조선은 사대를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가치가 아니라 국정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정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활용하는 수단으로 인식했다.

정벌 추진과 시행 과정에서 나타났던 조선의 대외의식은 정치적 목표에 따라 변용되었다. 조선에게 사대는 중요했지만 그 위에는 국왕권(國王權)이 있었다. 15세기 조선의 국왕들은 누구보다 사대를 강조하면서도 상황에 따라서는 누구보다 먼저 사대의 가치를 변용시켜 적용하는 일에 앞장섰다. 국왕의 권위와 정치적 권한을 유지하고 확대시키기 위해 사대명분을 활용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조선의 대외정책 기조는 이성계, 정도전과 같은 건국 핵심 세력의 주도하에 수립되었다. 조선은 건국 후 왜구에 대해서 새 왕조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대마도 정벌을 단행했다. 그리고 명과의 정면대결을 감수하면서까지 요동 정벌을 추진했다. 비록 요동 정벌은 좌절되었으나 조선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명도 공격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여줬다.

태종은 누구보다 사대명분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외교적 사안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여진 초유 문제에서는 명과 대립하는 양상도 보였다. 당시 조선은 여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태조대의 대명 강경론자들이 북방 지역 경략을 위해서는 명과의 군사적 충돌도 감수해야 한다는 견해였던 것에 비해, 태종대에는 북방 지역 경략을 위해 명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태도의 차이가 나타날 뿐이었다. 태종은 국정과 외교관계의 안정을 위해 사대를 더욱 강조했다.

세종은 지성사대를 강조하면서도 여진 정벌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이에 구애받지 않았다. 세종은 정벌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황제의 지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세종은 두 차례에 걸친 파저강 정벌을 단행했고, 정벌 이후 재위 전반기보다 더욱 강한 정치적 통제력을 행사했다. 특히 세종은 정벌의 추진 과정에서 신료들의 반대의견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국왕이 대외정벌을 활용해 군주의 위상을 높이는 동시에 정치 주도권을 확대하고자 했음을 설명해준다. 

세조는 명에 대한 사대 자체를 부정하거나 정면충돌을 야기할 수 있는 행동은 자제하면서도, 국익을 위한 대외정책을 유지하는 양면적 태도를 보였다. 세조대의 조선은 명의 청병 요구에 응하면서도 정벌 성공의 가늠자가 되는 적의 총수 포획과 처형에 성공함으로써 여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은 사대명분을 지키면서 여진 지역에 대한 영향력도 유지했다.

성종 재위기는 국왕의 정벌 추진에 대한 신료들의 반대 양상이 더욱 확대되어 나타난 시기였다. 조선은 사대의리를 지키는 일에 급급해 여진 지역에 대한 영향력 감소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는 여진 지역에 대한 조선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성종대를 중심으로 조선의 사대의식은 명분과 국익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모두 얻고자 하던 태도에서 점차 명분과 국익이 하나가 되는 방향으로 변하게 되었다.

“15세기 조선에서 사대는 결국 국왕권의 강화와 유지에 필요한 수단 중 한 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대가 국왕의 권위나 권력의 행사에 방해가 될 경우에는 쉽게 지켜지지 않았다. 15세기 조선의 국왕들은 사대명분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어느 시기보다 강한 국왕권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사대명분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대명분은 조선에서 점점 더 중요하게 인식되었고, 결국에는 사대명분이 국왕의 권한마저 제한할 수 있는 가치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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