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해 철학은 무엇을 알려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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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해 철학은 무엇을 알려줄 수 있는가?
  • 이민열 한국방송통신대학·법학
  • 승인 2022.10.23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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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에게 듣는다_ 『윤리학과 철학의 한계』 (버나드 윌리엄스 지음, 이민열 옮김, 필로소픽, 364쪽, 2022.09)

 

버나드 윌리엄스의 <윤리학과 철학의 한계>(Ethics and Limits of Philosophy)는 좋은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철학의 조언을 구하는 이들에게 곧바로 조언을 주는 내용이 아니다. 이 책은 그런 조언을 애초에 철학이 줄 수 있는가, 그리고 줄 수 있다면 어떤 면에서 줄 수 있는가를 다루는 책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이미 반성적 질문이다. 즉 현재 시점의 욕구와 성향, 그리고 전통의 완전한 포로가 된 채로는 애초에 던질 수도 없는 질문이다. 그런 사람은 그 질문에 대하여 어떤 답이 나오건, 살게끔 되어 있는 바대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성은 그런 욕구, 성향, 전통에서 한발 물러서서 하는 이성적 검토를 전제한다.

극도로 전통적인 사회의 구성원과는 달리, 현대인들은 실제로 합리적이고 합당한 반성을 하건 하지 않건, 반성 속에 내던져져 있다. 사람들은 당면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에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 목적들이 추구할 만한 것인가, 그리고 추구할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얼마나 중요하다고 여기고 어떤 방식으로 추구할 것인가에도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사람들이 읽고 보고 듣고자 하는 것은 돈을 벌게 해주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에 한정되지 않으며 가치를 구현하고 성품을 형성하고 덕을 발휘하며 존중과 경의를 보이는 것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된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라’는 이야기는 서로 너무나 다르며, ‘나처럼 살아라’라는 오만에 가득 찬 자기확신의 독선적 반복으로 흐르기 매우 쉽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철학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대학에서 연구되는 학문이라면, 이 주제에 관하여 통일적이고 포괄적인 데다가 체계적이며 분명한 답을 알려주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기대에 반응하여 많은 철학자들이 그런 답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런 대표적인 답으로 버나드 윌리엄스가 이 책에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는 덕 이론, 의무 이론, 공리주의 이론을 들 수 있다.

저자는 철학이 생성한 그런 이론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철학이 그 주제에 조언을 줄 수는 있지만, 그런 이론의 형태로는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이론들의 가장 큰 문제는 좋은 사태, 의무, 덕의 조화로운 발현과 같은 몇 안 되는 개념을 아르키메데스적 점―이성적 검토를 통해 행위하는 합리적 행위자라는 이유만으로 지지하게끔 되는 것―으로 삼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한 답을 환원하려는 것에 있다. 그러한 환원적 과업은 정당화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 정당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기획을 좇아서는 안 된다. 저자가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면서 전개한 논의는 대단히 풍부하고 세심한 것이어서 이를 요약하는 일은 상당한 누락과 단순화를 포함할 것이다. 이 점을 감안하고서 아주 개략적인 길잡이로만 약간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덕 이론은 인간이라는 존재라면 응당 갖추어야 하는 탁월한 성품을 아르키메데스적 점으로 삼는다. 그래서 미덕을 갖추고 이를 발휘하는 삶이야말로 좋은 삶이라고 한다. 그리고 무엇이 미덕인가는 사회 속의 인간의 이성적 활동에 필수적인 것, 인간이라면 달성해야 할 조화로운 기능이 무엇인가를 살펴봄으로써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덕은 습관화에 의해 획득할 수 있는데, 덕 이론의 도움을 가장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잘못된 습관으로 인해 덕 이론이 이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사람들이다. 둘째, 덕 이론은 어떤 사람이 바라지는 않지만 그 사람에게 진정으로 이익이 되는 것을 전제하는데 독재와 폭정을 합리화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진정한 이익과 정말 진정으로 이익이 되는 것을 분명하게 가려낼 기준이 없다. 

셋째, 진정한 이익을 가려낼 기준으로 그나마 유망한 것은 인간으로 기능하기에 필수적인 것들의 결여나 부족, 즉 일반적 무능력뿐인데, 이익이 되는 것 중 인간으로 기능하기에 필수적인 것은 일부에 불과해서 다양한 삶 중 무엇이 좋은 삶인가를 답해줄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자연종 사물이 목적을 갖는다는 아주 강한 잘못된 전제 위에서도 진정한 이익이 되는 것을 명확하게 가려내지 못했다. 자연의 사물이 과학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는 현대과학의 전제를 받아들이고서 이 작업을 하기에는 더욱 난망하다. 게다가 그 내용을 더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 어떤 성품이 특정 사회에서 기능하기에 유리하다는 조건을 도입하게 되면, 좋은 삶과 생태적 적소(niche)에서 번성하는 삶을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의무의 이론은 스스로 가치 있는 목적을 설정하고 이를 자신의 행위로서 달성하고자 하는 이성적 존재가 보편적으로 의욕할 도덕법을 아르키메데스적 점으로 삼는다. 도덕법에 일치하는 삶이 좋은 삶이며, 도덕법은 그런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준수해야 하는 의무를 알려준다. 이성적 존재가 특정한 결과들을 낳으려는 바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 결과들을 낳기를 원하므로 자유를 필요로 한다. 합리적 행위자는 자신의 자유를 보장받게 하는 원리의 참을 일반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보편화 가능성 원리에 의거하여 이 자유를 모두에게 보장하는 의무의 체계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첫째, 행위를 위한 실천적 숙고는 모든 면에서 일인칭적이므로 이성적 존재가 이성적이라는 이유만으로 평등의 관점에서 규칙 제정에 헌신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고 지적한다. 즉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일이 애초에 규칙을 제정하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에 답하지 못한다고 한다. 둘째, 의무의 원리에 따른 행위를 제외한 모든 행위를 맹목적으로 결정되었고 이기적 쾌락에 휘둘리는 행위로 보아, 윤리적 결정에 무관한 사항으로 치부하는 것은 잘못된 이분법이다. 법칙적 의무의 영역에 속하는 이유는 아니지만 개인에게는 실천적으로 필연성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들을 지지하는 이유를 가지는 것들이 있다. 셋째, 자기 자신을 개선할 의무나 자비의 의무와 같이 모든 윤리적 고려사항을 의무의 범주로 쓸어넣는 개념화는, 의무의 규칙을 집행하는 활동 이외에 사실상 삶에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으며 이는 우리의 자기 이해에 반한다.

공리주의 이론은 유정적 존재의 복리(福利)와 불편부당한 관점을 아르키메데스적 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두 개념 모두 상당한 난점에 빠진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첫째, 복리 자체도 쾌락의 향유와 고통의 회피인지 욕구의 만족과 좌절인지 그 자체로 가려내줄 수 없는 불명확한 개념이며, 공리주의 전통 내에서 인간 삶의 목적으로 지칭된 것은 오히려 덕 이론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인간 삶의 실천과 거리가 먼 협소하고 빈약한 환원적 개념이다. 둘째, 불편부당하게 받아들일 만한 것이 자신이 그 누구라도 될 확률이 동일하다고 전제하고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과 같다는 전제가 틀렸다. 

셋째, 불편부당한 관점을 구성하는 모든 행위자들의 이익을 그 행위자들의 선호 위에서 가늠하고 합산하는 이상적 관망자란 지성적으로 이해불가능한 행위자이다. 서로의 목적을 좌절시키는 완전히 상충하는 욕구, 게다가 비합리적인 욕구까지 빠짐없이 가진 단일한 행위자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성향과 욕구, 믿음을 가진 누구라도 그런 이해 불가능한 행위자의 관점에서 채택된 것을 삶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넷째, 어느 정도의 공감적 동일시에 따른 자비로운 행위를 해야 한다는 윤리적 고려사항은 이상적 관망자의 욕구 충족과 전혀 같지 않다. 다섯째, 오류에 빠진 선호를 교정하고 만족의 최대화를 추구하는 공리주의는 현대의 반성적 삶과 전혀 맞지 않다. 사람들의 삶을 지도하는 힘을 가진 극소수의 엘리트를 제외하고는 공리주의가 아닌 다른 것을 삶의 지침으로 삼는 대중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Bernar Williams (1929.09.21 – 2003.06.10)

저자가 윤리적 삶이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환원적 이론을 거부한다고 해서, 전통적인 의미에서 상대주의를 취하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저자는 극도로 전통적인 사회를 찬성하면서 반성을 반대했을 것이다. 저자는 적어도 우리가 현실적 선택지에 대면할 때에는 우리가 최선을 다하여 잘 살기 위해 숙고한 결과 실천적으로 헌신하고 있는 것에 따라 행위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나 그러한 숙고가 환원적 개념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저자에 따르면 좋은 삶을 살기 위해 검토해야 하는 이유들은 순수한 기술적 사실들과 규정적인 평가, 승인의 규범만으로 환원할 수 없다. 우리는 반성, 자기 이해, 비판의 과정을 견뎌낸 것들을 고려하여 그리고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의 윤리적 개념들을 활용하여 신중하게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철학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반성, 자기 이해, 비판의 가능성을 보존하고 그것들이 틀린 추론으로 잘못 나아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이 주된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저자는 대가답게 큰 붓으로 윤리이론들을 다루면서 필요한 곳에서 풍부하고 섬세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그 덕택에 책을 읽는 이는 이 질문 자체와 그 질문에 대하여 제시된 답들에 관하여 매우 중요한 통찰들을 얻을 수 있다. 어떤 부분은 저자가 간략하게 처리하고 넘어갔지만 곱씹어보면 경탄을 자아낸다.

윌리엄스가 삶을 향도하는 포괄적 이론으로 덕 이론, 의무의 이론, 공리주의 이론의 약점을 드러낸 것은 탁월한 성과이다. 그가 이 약점들을 드러내고 찌르는 방식은 이 중 어느 한 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관례적으로 논의하는 방식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예리하며 재기 넘치는 면이 있어 사고를 흥미롭게 자극한다.

다만 규범학을 연구하는 역자로서는 몇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첫째, 저자의 비판은 포괄적인 윤리적 삶에 관한 이론과 그로부터 정치철학적 지침을 끌어내는 이론에 대한 공격으로서만 일단 유효할 뿐이다. 저자가 인정했듯이, 보편적 법을 제정하는 과업에 헌신하는 경우에는, 보편적인 원칙의 규범적 힘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구성원 모두에게 적용하는 법을 제정하면서 그 법은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법의 제정과 집행이라는 과업과 실천적으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둘째, 저자는 도덕을 하나의 특이한 제도로 비판하면서 윤리적 삶에 대한 반성에 미치는 악영향을 근거로 의무와 권리에 관한 도덕적 담론을 도매급으로 비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윤리와 엄밀한 도덕의 구별을 전제하는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좋은 삶을 살기 위해 고려해야 하는 것을 모조리 의무의 지침으로 바꾸어 의무 이외의 영역을 남겨두지 않는 칸트나 로스의 의무 체계에 대한 비판은 탁월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와는 별개로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것을 빚지고 있는가의 좁은 의미의 도덕의 영역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그 중에서도 기본적 인권과 그에 상응하는 의무의 영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숙고에서 우선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세상에서 은둔하고 사는 선택을 할 수는 있어도, 광기에 찬 명작을 그리기 위해서 사람을 살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실천적 숙고가 근본적으로 일인칭적인 것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아니하는 영역에 관한 것이며, 엄밀한 의미에서의 권리와 의무가 관련된 한, 일인칭 이유로 환원 불가능한 이인칭 이유들(도덕적 권위를 가진 이성적 존재들의 관계에 관한 이유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셋째, 저자는 복리주의에 근거하고 단순히 계약장치를 사용한 평균 공리주의와 스캔런이나 롤즈와 같은 계약주의의 차이를 무시하는 논의를 하는데, 이는 계약장치를 사용하는 이론과 도덕적 권위를 가진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 사이의 정당화를 근본적인 것으로 보는 이론의 중대한 차이를 간과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몇 가지 유의할 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현대 윤리학에서 우뚝 솟은 성과임은 부인할 수 없다. 버나드 윌리엄스는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천재로 소문이 난 명민한 사람이다. 그의 공리주의에 대한 독특하면서도 날카로운 비판은, 관련 주제를 공부했던 사람이라면 이미 어떤 경로로든 접해보았을 것이다. 윌리엄스의 저작 중에서도 <윤리학과 철학의 한계>는 그의 사상을 알기 위해서 꼭 보아야 하는 주저로 손꼽힌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윤리적 삶이 그저 살고자 욕구하는 삶과 어떻게 다른가, 좋은 삶에 관한 이성적 검토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관하여 제시된 사상들의 구조는 무엇이고 어떤 약점을 갖고 있는지,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헌신에 관한 지식은 어떤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충하는 지식과 만났을 때 어떤 변화를 겪는가라는 질문을 대가가 다룬 솜씨를 보는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달음에 읽기 버거운 사람은 한 장씩 음미하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함께 적어보면서 읽기를 권한다.


이민열 (李珉烈, 이한) 한국방송통신대학·법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교수이자 변호사.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정치철학과 분석철학의 성과를 발전시키고 활용하여 헌법해석의 정교한 논증대화적 틀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두고 연구를 이어 가고 있다. 〈존 롤즈의 원초적 입장의 조건과 헌법해석의 지침〉(2021), 〈국가 완전주의 쟁점과 법해석〉(2019) 등의 논문을 썼다. 지은 책으로는 《헌법논증이론》(공저, 2021), 《철인왕은 없다》(2018),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2012) 등이, 옮긴 책으로 《관용의 어려움》(2021), 《너절한 도덕》(2021), 《자유의 법》(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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