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시의 행방 … 중국과 한국 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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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시의 행방 … 중국과 한국 ⑯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승인 2022.10.23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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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

세계의 어느 민족이든 구비서사시를 전승하면서 영웅의 위업을 노래했다. 중국의 한족도 예외가 아니다. <시경>(詩經)에 영웅서사시의 편린이 산재해 있다. <사기>에 기록된 이른 시기 군주들은 영웅의 일생을 시작했다가 선양(禪讓)에 의해 보위를 이었다고 한다. 후대의 관념에 의거해 과거를 정리해 진면목이 손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에도 쓴 영웅서사시가 없는 것은 아니라면서 본보기로 드는 <목란사>(木蘭辭)는 북방 선비족(鮮卑族) 전승의 수용이다. 한족이라는 민족이 무리하게 확장되면서 많은 변질을 일으켜 전승 공동체를 스스로 파괴한 탓에, 구비서사시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지배민족이 확대되어 지배력을 큰 규모로 행사할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가 한다. 일본의 왜인(倭人)도 구비서사시가 없는 이유가 이와 같을 것이다. 

한족의 한 갈래라고 하지만 오어(吳語)라고 하는 다른 말을 사용하는 장강 하류 주민들은 오가(吳歌)라고 일컬어지는 서사시를 구전하고 있다. <심칠가>(沈七哥)를 본보기로 들어 살피면, 창세서사시나 영웅서사시의 흔적이 남아 있는 범인서사시이다. 소중한 유산이지만 역사 전개와 관련을 가지지 않고, 중국문학사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

중국 서남쪽 운남지방 여러 민족은 창세ㆍ영웅ㆍ범인서사시를 다 잘 갖춘 구비서사시의 풍부한 유산을 자랑한다. 중원의 한족이 침공하고 지배하려는 데 맞서서 민족 주체성을 옹호하고 선양하기 위해 구비서사시를 적극 활용했다. 오늘날의 중국은 그 곳의 땅을 차지하고  다스리면서 구비서사시는 무시하고, 신화라는 이유에서 관심을 조금 가진다.

한국 제주도에서 구전하는 창세ㆍ영웅ㆍ범인서사시는 운남 지방 여러 민족의 것들 못지않게 풍부하다. 본토의 구비서사시와 동질성을 지녀 공동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고 인정되면서, 탐라국의 유산을 이어받고 본토의 억압에 항거하는 전승이기도 하다. 탐라국 건국서사시의 잔존 형태라고 생각되는 <괴내깃도본풀이>는 영웅의 일생을 본토의 이른 시기 건국시조 고구려의 주몽(朱夢)이나 신라의 탈해(脫解)와 거의 같게 갖추었다. 전국에 파다하게 구전되는 <바리공주>의 여성 주인공도 영웅의 일생을 손상되지 않은 형태로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구비문서사시의 유산을 기록문학에서 이어받아 재창조했다. 오랜 전승을 재창작한 영웅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은 한문으로, 조선왕조의 창업을 노래하는 새로운 내용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한글로 지었다. 유교가 존중해야 할 이념이 되었어도, 서사시 창작을 방해하지 않도록 했다. 이규보(李奎報)는 <동명왕편>을 지으면서, 유교 이념의 구속을 넘어서서 진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용비어천가>에서는 해동육룡(海東六龍)이 날아올라 “고성(古聖)과 동부(同符)”한 내력을 노래한다고 했다. 이것은 “유교에서 성스럽다고 하는 옛 제왕들과 대등하다”는 말이다. 

구비서사시에서 보이는 영웅의 일생을 <홍길동전> 이후의 여러 소설에서 이어 사건 전개의 근간으로 삼았다. 그 전통이 신소설까지는 명백히, 그 다음에는 잠재적으로 이어진다. 현대시에서도 영웅서사시를 민족서사시로 이어받아 재창조하려고 한다. 영웅서사시의 전승이 문학사에서 이렇게까지 일관되게 이어지는 나라가 더 있을 것 같지 않다.

인도의 불교서사시 <붓다차리타>(Buddhacarita)를 한문으로 번역해 <불소행찬>(佛所行讚)이라고 했다. 중국은 <불소행찬>으로 만족하고, 한국에서는 이것을 개작했다. 고려의 승려 운묵(雲黙)이 <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을 한문으로, 조선의 군주 세종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국문으로 지었다. 중국에는 없는 일을 한 것은, 서사시 창작의 열의가 한국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석가여래행적송>은 <불소행찬>보다 취급한 범위가 아주 넓다. 우주의 내력에서 시작해 석가의 일대기까지 이르고,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경위를 말한 다음 말법시대에 맞게 신앙의 자세를 바로잡으려고 했다. <월인천강지곡>은 석가의 일대기만 다루어 <불소행찬>과 겹치면서, 실제 내용은 다르다.   

석가가 출가해 득도하고 한참 지나 돌아가 부왕(父王)을 만났다는 대목을 보자. <불소행찬>에서는 망보는 사람을 보냈더니, 부처가 돌아오는 것을 알렸다고 했다. 그 다음의 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父王大歡喜       아버지 임금님 크게 기뻐하는데, 
父子情悉除       아버지와 아들의 정은 젖혀놓고,
空中蓮花座       공중의 연화 자리에 올라 앉아,
而位王說法       임금님을 위해 설법을 한다. 

<월인천강지곡>에서도 부왕이 부처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우타야라는 인물을 보냈는데, 부처의 제자가 되어 함께 돌아왔다고 했다. 돌아와 벌어진 일은 <불소행찬>과 더 다르다. 인용구를 이해하기 쉽게 현대어로 옮긴다.

과겁에 고행하다가 이제야 이루신 것을 우타야가 사룁니다.
열두 해를 그리다가 오늘에야 들으신 것을 아버님이 이르시다.
  

<불소행찬>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 하는 말은 없다. 부처가 공중의 연꽃 자리에 올라가 아버지를 위해 설법을 하면서, 아들 때문에 근심하던 마음을 다 없애주겠다고 했다.  오직 불법만 소중하다고 하면서, 부처를 아주 높이는 차등론을 확인했다.

<월인천강지곡>에서는 부자가 만나서 기뻐하는 것은 같으면서 그 이유는 아주 다르다고 했다. 아들은 여러 겁(劫) 고행하다가 이제야 성불의 소원을 이룬 기쁨을, 아버지는 열두 해를 그리워하다가 이제야 아들과 만나고 싶은 소원을 이룬 기쁨을 말했다. 성불의 소중함과 인정의 절실함을 대조해서 함께 말해, 아주 넓은 범위의 대등론을 알아차리도록 했다.

중국에서는 <불소행찬>을 읽는 데 만족했다. 한국에서는 <월인천강지곡>을 다시 지었다. 차등론을 계속 받든 것과 대등론으로 나아간 것이 많이 다르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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