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위기는 모든 학문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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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위기는 모든 학문의 위기
  • 김현주 원광대학교·철학
  • 승인 2022.10.23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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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후설의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1937)이라는 책은 나치의 등장으로 인한 유럽의 위기를 자연과학과 객관주의적 사고를 맹신하여 인간이 과학에 지배받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책이다. 이것은 후설이 「유럽인의 위기 속에서의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1935년 강연한 내용을 토대로 한 책이었다. 1차 세계대전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은 당시 또 다시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던 상황을 후설은 “유럽의 위기”라고 진단한 것이었다. 후설보다 앞서 슈펭글러가 『서구의 몰락』이라는 책으로 주목받았던 적이 있었던 만큼, 유럽인들이 느꼈을 위기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21세기를 사는 우리들도 ‘위기’라는 단어가 생소하지 않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위기는 하나로 쉽게 규정할 수도 없기 때문에 ‘복합적’ 위기라고 부른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도 예외일 수 없다는 점에서 ‘글로벌’ 위기라고 말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복합적 글로벌 위기에 직면한 우리는 그 해답을 논의해야 하는 철학을 버리고 있다. 산업화, 자본주의화, 과학화를 경쟁적으로 추구해오던 우리는 그 바탕으로 기능하던 철학을 버리고, 오직 과학만을 추구해오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이 아닌가? 그렇다. 슈펭글러나 후설이 말했던 “유럽의 위기”는 단순히 역사적 한 시기, 한 지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이제 “한국의 위기” 나아가 “글로벌 위기”의 전야를 보여주는 것이다. 


위기 속에서 ‘철학과’ 폐지?

언제부턴가 대학은 학령인구 감소 위기, 입학생 충원 위기, 재정적자 위기 등등 위기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위기를 해결하는 대안의 하나로 많은 대학에서 철학과를 폐지하고 있다. 어떤 대학은 전임교수를 충원하지 않는 방식인 소극적인 방식으로 철학과를 서서히 죽이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이미 철학과를 다니고 있는 학생들은 그것이 철학과 폐지 수순이 아닐까 의구심을 갖는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 철학과를 없애기 위한 것이다. 학생들의 의혹은 사실이다. 

쓸모없는 학과로 폐지되어야 하는 운명을 갖는 학과는 철학과뿐이겠는가? 대학의 학과 구조조정 ‘바람’이 거세게 일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모든 학문의 어머니”라고 불린다. 철학은 사랑을 의미하는 라틴어 ‘Philo’와 지혜 또는 진리를 의미하는 ‘sophia’로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철학은 많은 학문 분과를 탄생시켰기 때문에 “모든 학문의 어머니”인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곧 그가 낳은 자식들의 죽음을 의미한다. 즉 철학을 필두로 모든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순수 자연과학의 죽음으로. 그것은 더 이상의 진리 탐구는 필요 없다는 의미이고, 새로운 학문의 탄생은 차치하고라도, 이제는 현존 과학과 기술문명에 더 이상 의구심을 품지 않고 따르겠다는 복종의 선언이다. 기업이 원하는 대로 대학을 운영한다는 비판, 대학이 사회문제는 간과하는가 하는 비판, 대학이 기술에 종속되어야 하는가 하는 비판 등등 상아탑으로서의 대학교육에 대한 비판이 하루 이틀이었는가? 위기는 그런 모든 불만을 집어삼켜 버렸다. 권위주의 시기 저항의 아이콘이었던 대학은 이제 저항력을 상실했다. 그리고 위기에 대한 저항력은 ‘0’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저 위기에 모든 것을 내어주고 있다.


학문의 위기는 곧 인간성의 위기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실감하도록 해주었다. 코로나의 확산을 막고, 코로나에 감염된 이들을 치료하여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백신과 치료약이 필요했고, 의료 요원들이 어느 때보다 절실했다. 과학과 기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그것은 바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것을. 인간의 생존, 그것은 가장 중요한 철학의 과제이다. 철학은 언제나 인간 자신, 인간의 삶, 인간 사회 등 인간을 둘러싼 문제들을 탐구해왔다. 과학과 기술이 인간 생명, 생존, 그리고 좋은 삶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잊는 순간, 코로나의 확산을 막기 위해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고, 개인의 사생활을 폭로할 수 있고, 심지어 문 앞에 못을 박아 출입을 통제할 수도 있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말았다. 

과학과 기술이 ‘좋은’ 과학과 기술이 되려면, 철학이 동반되어야 한다. 아무리 빅데이터, AI, 로봇 등이 계발되어 인간의 삶의 조건이 향상된다고 해도, 철학이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면, 즉 우리가 과학과 기술문명에 대해 계속해서 탐구하고, 의심하고, 논의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인간을 위한 삶이 될 것이라는 보장은 할 수 없게 된다. 철학을 시작으로 한 학문의 위기는 곧 인간성의 위기로 나타날 것이다.  


김현주 원광대학교·철학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박사수료 후 중국 칭화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 및 역서로는 『춘추전국시대의 고민』(2021), 『만국공법』(2021)이 있고, 공동저서 및 역서로는 『시민의 조건, 민주주의를 읽는 시간』(2022), 『국제질서의 대분화와 한중관계의 재구성』(2022), 『더 많은 민주주의를 향하여』(2021), 『궐위의 시대: 미국과 중국이 사는 법』(2021), 『현대중국정치』(2020), 『중국의 당국가체제는 어디로 가는가』(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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