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과학에서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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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과학에서의 자유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10.22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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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연단]

■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제23강_ 김대수 KAIST 교수의 「뇌 과학에서의 자유」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아홉 번째 시리즈 ‘자유와 이성’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자기실현의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간 인류가 걸어온 길은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합리성의 증대는 자유의 신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섯 섹션 총 4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고전 시대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자유 담론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 미래 사회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고자 한다. 자유의 이념과 지향에 관한 동서양의 지적 자산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세 번째 섹션 ‘기술적 환경과 인간의 자유’ 제23강 김대수 교수(KAIST 생명과학과)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뇌 과학에서의 자유


김대수 교수는 “현상으로서 분명히 존재”하는 “의식이나 자유의지에 대한 경험”을 인정하며 “자유의 주체는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가설을 살펴보고 뇌 과학적인 측면에서 그 중요성” 고찰을 시도한다. 먼저 “의식과 자유의지의 과학적 근거에 대한 연구”는 “객관적인 실험과 결론을 통해 접근하는 3인칭 시점인 반면 ‘의식’에 대한 경험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인 1인칭 시점”이기 때문에 유물론적 접근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유물론의 간단함과 그럴듯함으로 인해 이념적으로 많은 과학자들이 의식과 자유의지의 문제에 대하여 유물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설명에 대하여는 설왕설래”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관찰자 의식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라고 질문하는데, “뇌의 의식 작용과 자유의지”가 “본능이나 욕구 충족을 위한 선택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결론적으로는 뇌 과학이라는 학문이 “자유와 자유의지에 대한 본질을 설명하기보다는 관련된 철학적 심리학적 질문들을 재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닐까라고 유보적 답으로 마무리한다. 

 

지난 9월 17일, 김대수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자유와 이성>의 23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들어가는 말

자유란 자신의 행동과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자유는 개념상 자유를 누릴 주체가 있어야 한다. 뇌 과학에서는 자유의 주체로서의 ‘의식(Consciousness)’에 주목하며 뇌가 신경회로의 작용으로 만들어낸 의식 세계 속에서 느끼고 알고 행동하게 된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다만 뇌 속에 존재하는 주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Free will)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는 상황이다. 현대 과학의 주류적 관점인 유물론(materialism)에서는 모든 존재를 물질적인 요소로 환원하여 설명하기에 의식이나 자유의지는 일종의 착각이나 허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의식이나 자유의지에 대한 경험은 현상으로서 분명히 존재하며 많은 철학자, 심리학자, 뇌 과학자들이 이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뉴로버스(Neuroverse)로의 초대

뉴로버스란 신경(Neuron)과 우주(Universe)의 합성어로서 신경 신호로 만들어진 세상의 모형이다. 뇌는 세상의 존재를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물리적 자극으로부터 생성된 뇌 속의 신경 신호로 재구성된 세상을 인식한다. 본 논의에서는 뇌가 세상을 바라보는 의식 체계를 편의상 뉴로버스(Neuroverse)라 명명한다. 자유, 평화, 사랑과 같은 형이상학적 개념들도 모두 뉴로버스 안에서 생성된 신경 신호로서 정의하는 것이다.

뉴로버스가 세상의 존재의 일부 정보만을 반영하고 있고 표상의 과정이 주관적이기에 실존 세상과는 간극이 있다. 뇌가 뉴로버스와 실존 세계 간의 차이를 인지했을 때 ‘인지 부조화’ 현상이 나타난다. 인지 부조화의 뇌는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하다. 첫째는 합리적인 선택으로서 팩트에 맞도록 내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뇌가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뉴로버스에 변형이 일어나야 하고 이것은 스트레스를 받는 작업이다. 둘째, 생각에 맞도록 팩트를 바꾸는 일이다. 

생존과 적응을 위한 기관으로서 뇌는 팩트에 맞도록 생각을 바꾸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뇌가 생각에 맞도록 팩트를 바꾸려는 의지도 생존과 적응에 중요하며 개인이나 인류 문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개인이나 집단의 생각이 이념화되면 이렇게 생각에 맞도록 팩트를 바꾸어나가려는 노력이 가속화된다. 

 

뉴로버스는 신경 신호의 총체이며 감각과 개념을 인식하는 의식 체계이다. 출처 – 열린연단: 뇌 과학에서의 자유

자유의 주체는 무엇인가?

뉴로버스에서 존재는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실제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쌍둥이 표상이다. 사과를 보면 사과의 이미지가 뉴로버스 내에 형성되고 사과의 상태에 따른 변화와 연동된다. 둘째, 외적 대상이 없이도 뉴로버스 내부에서 기억 혹은 의식 작용으로 만들어지는 대상이다. 예를 들어 사과를 떠올리면 실제 사과가 없어도 사과를 느낄 수 있고 관련된 기억이 소환된다. 셋째, 위의 두 가지 대상을 인식하는 관찰자 존재이다. 누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소위 ‘나(self)’에 대한 느낌을 가질 수 있으며 이러한 관찰자 의식은 사람들 간에 상호주관적으로 확인되며 사회적 관계에서 행위와 책임의 주체로서 인정된다. 

 

의식이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의식이란 비물질적인 요소인 영혼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유물론적인 세계관이 발전하면서 의식을 물질로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예를 들어 뇌 과학에서는 뇌 속에 신경들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생성된 물질적인 요소로 설명된다. 뇌를 의식 기능의 핵심으로 보는 과학자 중 한 명이 프랜시스 크릭이었다. 그의 주장은 “기쁨과 슬픔, 기억과 꿈, 그리고 자아와 자유의지에 대한 느낌은 모두 신경세포와 관련된 분자의 구조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가설이 뇌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수년 내에 증명될 것으로 봤다. 마치 유전 정보를 밝히듯 신경 정보를 밝혀나가면 해결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특히 그들은 뇌가 특정 대상에 집중하는 선택적 집중(Selective attention)이 의식과 연관되는데 이 과정에서 시상핵(thalamus)과 대뇌피질의 상호작용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밖에도 의식을 관장하는 뇌 부위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의식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신경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의식과 관련된 신경을 연구해도 풍부한 의식 현상과 신경생물학적 설명 사이에는 갭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의식에 대하여 오랜 시간 연구한 과학자일수록 이러한 한계를 잘 알고 있으며 그중의 한 명이 크릭의 동료였던 코흐이다. 그는 의식이 물질이 아니며 물리적 법칙이 아니라 다른 법칙에 의한 것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의식의 본질은 신경회로가 아니라 우주의 고유의 디자인이라는 주장으로 일종의 범신론(panspiritism)적 주장이다.

 

벤자민 리벳의 실험: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이 무엇인지를 떠나 많은 이들이 현상적으로 관찰자의식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뇌 속의 관찰자가 자유의지를 가졌는지 여부는 또 다른 논쟁거리다. 만일 의식이 자유의지가 없다면 사실 의식의 존재가치는 많이 떨어지게 된다. 자유의지론(free-will theory)에서는 뇌 속의 관찰자는 자유의지가 있고 선택의 폭이 넓고 유동적이다. 자유의지를 가진 개인을 의사 결정의 주체로 인정한다면 개인이 선택하는 자유는 비교적 간단히 설명된다. 결정의 주체로서 인간은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면 된다. 

반면 세상의 모든 존재와 현상이 물질의 물리적인 상호작용이라면 우리의 선택도 물리적인 현상이므로 사전에 결정될 수밖에 없으며 자유의지는 허상에 불과하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벤자민 리벳 교수는 이러한 물리학적 결정론을 기반으로 자유의지의 허구를 실험으로 검증하고자 하였다. 그는 뇌가 손가락을 누르는 것을 결정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뇌파(EEG)를 측정하였고 누르는 순간을 결정하기 위해 근육파(EMG)를 측정하였다. 또한 피험자에게 자발적으로 누르고 싶은 충동을 처음 인지하는 순간에 버튼을 누르도록 하였다. 버튼을 누른 시점이 EEG보다 앞서면 자유의지가 작동을 하는 것이고 만일 EEG보다 뒤쳐진다면 착각인 셈이다. 실험 결과 EEG는 늘 버튼을 누르기 0.4초 앞선다는 결과를 보고하였다. 

이런 실험 결과들은 이미 결정된 판단을 우리 의식이 나중에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석하였으며 우리의 의식은 아예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지 않고 나중에나 통보받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그러나 논란은 여전하다. 신경과학자들의 행동과 연관 실험에서 행동 시점 전에 신경 신호가 나타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다. 다만 그 신호가 실제 행동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벤자민 리벳은 그 신호가 행동을 주도한다는 전제하에서 해석을 그리했을 뿐이다. 

 

유물론적 접근의 한계

의식과 자유의지의 과학적 근거에 대한 연구는 근본적으로 방법론적인 한계가 있다. 과학적 방법론은 객관적인 실험과 결론을 통해 접근하는 3인칭 시점인 반면 ‘의식’에 대한 경험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인 1인칭 시점이다. 

현대 우세한 뇌 과학적 설명들은 모두 유물론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유물론이 과학적 검증의 결과라기보다는 이념적인 유물론이 과학적 연구 결과를 해석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유물론은 다양한 사회적, 철학적 문제들에 대하여 비교적 단순하고 선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유물론의 간단함과 그럴듯함으로 인해 이념적으로 많은 과학자들이 의식과 자유의지의 문제에 대하여 유물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어떻게 그런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에 대하여는 유보적이다. 유물론 내에서도 결정론과 비결정론이 있으며 결정 여부와 무관하게 자유의지의 존재를 인정하는 양립론과 반대하는 양립불가론이 존재하지만 모두 유물론에 근거한 가정일 뿐이다.

이념을 떠나 사실로 돌아가자면 자연과 우주는 물질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물질이 탄생한 공간은 물질이 아니다. 공간이 물질이라면 공간을 이루는 물질이 탄생하기 위한 또 다른 공간이 필요하게 된다. 물리학에서 빠지지 않는 개념인 시간도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또한 물리학에서 물질의 존재와 거의 동일시되는 에너지와 에너지가 힘으로 변환된 핵력, 약력, 전자기력, 중력의 본질도 물질로서 설명하기 어렵다. 비물질이지만 물질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또한 의식이나 자유의지의 존재를 무시하는 유물론적 세계관에 의하면 유물론에 기반하여 주장하는 학자들의 주장 또한 유물론적 관점에서 의심해봐야 한다. 유물론에 의하면 그들은 과거의 기억이나 결정된 프로그램에 의해 지껄이고 있을 뿐 무엇이 옳은 것인지 결정하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물론적 결정론은 비물질적 존재들과 형이상학 개념들의 실체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무관심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허무주의로 귀결되며 형이상학적 개념을 아우르는 인간의 철학적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게 된다. 또한 사회주의 이념에서 볼 수 있듯이 개인의 자유보다는 개인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사회 구조가 보다 중요한 가치로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자유의지의 필요성: 뇌는 무엇을 선택하는가?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보다는 실제 자유의지가 있다면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기능이 없다면 존재 여부도 큰 이슈가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선택의 자유도는 뇌 안에서 다양한 측면에서 역할을 하고 있다.

첫째, 본능 선택에 있어 자유도가 관찰된다. 뇌하수체에는 적어도 다섯 가지 이상의 본능 신경들이 존재하고 이들이 욕구를 만들어낸다. 뇌는 늘 이들 욕구들 중 하나를 선택할 의무가 있다. 
둘째, 욕구에 해당하는 목표가 있을지라도 획득 행동을 제한하는 자유도 역시 중요하다. 
셋째, 행동 전략선택에 대한 자유도가 있다. 같은 상황에서도 서로 다른 개체는 본인에게 유리한 전략을 설정할 수 있다. 

관찰자 의식: 뇌 과학적 기능은 무엇인가?

관찰자 의식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가장 쉬운 설명은 남과 나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나와 남을 구분하는 것은 나의 생존과 적응을 극대화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물론 뇌가 없이도 나와 남을 구별하며 생존과 적응을 이어나가는 동물이나 식물이 존재한다. 그러나 의식은 나와 남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구분하여 지식을 효과적으로 축적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대상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저장하는 데에는 많은 에너지가 소요되지만 나를 기준으로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 위험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클러스터링은 에너지가 훨씬 적게 든다. 이러한 효율성이 생존과 적응을 극대화할 수 있다.

 

뇌 과학적 자유와 한계

유물론적 관점에서는 높은 차원의 결정도 내 스스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결국 나의 기억이나 학습된 정보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의지나 자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개인의 결정에 영향을 주는 사회 구조와 체계가 더욱 중요하게 된다. 반면 자유의지론적 관점에서 나는 다양한 욕구를 선택할 수 있고 때로는 거부할 수 있는 능동적인 주체이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바라볼 때, 그것에 적응하거나 바로잡고자 하는 주체는 자유의지를 가진 개인이며 행동의 책임을 가진 주체로서의 자아이다. 사회 개혁의 내용 역시 사회 구성원인 개인들은 동일한 자유의지를 가졌으므로 서로가 그것을 존중하고 해치지 않기 위한 책임을 전제로 한 사회 개혁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나아가 너 자신을 부정하라고 했다. 뇌 과학적으로 해석하자면 뉴로버스 내에 존재하는 신경 신호에만 이끌려가지 말라는 명령이다. 스스로는 관찰하고 반성하여 보다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라는 조언인 셈이다. 뉴로버스에 갇혀 지내지 않을 수 있는 자유야말로 뇌가 가진 특권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그 선택은 뇌가 가진 자유도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며 그 한계를 아는 것이 인간이 자유를 인식하게 되는 출발이 된다.


강연 바로보기: [열린연단]_ 뇌 과학에서의 자유 (김대수 KAIST 생명과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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