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한반도 지정학 의식을 일깨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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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한반도 지정학 의식을 일깨우다
  • 김영진 국민대학교·정치학
  • 승인 2022.10.16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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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칼럼]

16세기 말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질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조선은 해양세력 일본이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과정에서 먼저 침략을 받았다. 그 후 한반도는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되면서 지정학적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마찬가지로 중요하게는 왜란으로 인해 조선 스스로 자신의 지정학 의식을 갖게 되었고, 그것은 중국과의 관계를 포함한 조선의 대외인식에도 커다란 변화를 내포했다. 

지정학(geopolitics)은 국제정치를 장소나 공간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지정학은 서양에서는 주로 19세기 제국주의 경쟁의 산물로 시작되었으나, 아시아에서도 오래전 그와 유사한 개념이 없지 않았다. 이를테면 근공원교(近攻遠交), 이이제이(以夷制夷), 순치관계(脣齒關係) 등에는 지정학적 인식이 들어 있다. 그럼에도 그러한 개념들은 주로 여러 국가들이 병존하던 춘추전국 시대에 국한되었다. 

전근대 동아시아 질서의 인식적 기반인 천하관이나 화이관과 같은 중국 중심적 관념에는 그러한 지정학적 인식은 크지 않다. 해당 관념에는 중화와 이적의 구분에 기초한 제국의 보편적 지배가 강조되고, 이적들은 일시동인(一視同仁), 즉 동질적으로 간주되었다. 조선과 관련해서 동번(東藩)이나 번병(藩屛)과 같은 개념들에 지정학적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제국을 지키는 울타리로서 의무를 내포했다. 이적에 대한 보호는 임의적인 선의(善意)나 시혜로 간주되었을 뿐, 제국 자신의 방어를 위한 것이라는 의식은 희박했다. 후에 한중간 지정학적 관계를 표현하는 개념으로 일반화되는 ‘순치(脣齒)’는 임진왜란 이전 양국 관계에서 사용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명의 다수 관료들은 조선 파병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것은 황제의 선의는 원칙에 불과했으나, 전쟁은 많은 비용과 희생이 요구되는 현실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예상과 달리 조선 스스로도 명에 대한 파병 요청에는 소극적이었다. 조선은 명 조정이 아닌 요동 주둔 명군 지휘부에 몇 천 명 수준의 지원을 계속 요청했을 뿐이다. 이러한 접근은 기존의 중화관념과 부합했다. 

그렇지만 조선에 대한 파병 여부를 둘러싸고 논의가 격렬해지자, 적어도 명 내부에서는 지정학적 접근의 금기가 쉽게 깨졌다. 파병 찬성론자들은 단순한 황제의 선의만으로 파병을 설득할 수 없었고, 제국의 안보에 대한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내세웠다. 다음은 당시 파병을 적극 주장했던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말이다. 거기에는 위의 천하관과 지정학적 인식이 혼재되어 있다.

무도한 나라는 멸망시키고 도가 있는 나라는 존속시키는 것이 천조(명)의 원칙입니다. 최근 조선이 왜적의 창궐을 보고했는데, ···· (왜군이) 우리의 공손한 속국을 함락시키고, 우리의 긴밀한 울타리를 제거했으니, 극악한 무리가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해악이) 몸속에 깊이 자리 잡으면, 화가 피부까지 미치는 법입니다. ···· 문무대신을 파견하여 토벌하면 자소지인(字小之仁), 즉 약자를 돌보는 인의를 빛낼 뿐만 아니라 내지(중국)를 침범하려는 그들(왜적)의 마음을 없앨 것입니다.

그렇지만 명 내부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제기된 지정학 논의는 조선과 명의 공식적인 관계에서는 여전히 허용되지 않았다. 

왜적이 침략했을 때, 조선은 일본의 정명가도(征明假道) 요구를 거절하여 침략을 받았다고 여겼다. 여기에는 천하관과 함께 일부 지정학적 인식이 내재되어 있었다. 다음은 선조가 1593년 1월 초 명군을 따라온 한 관리에게 한 말이다.

왜적이 부도덕해서 상국(명)을 침범하려 했습니다. 소방(조선)의 군신들은 의리에 의거하여 그것을 배척했고, 마침내 그들의 분노를 사서 먼저 흉악한 공격을 당한 것입니다. 지금 천자께서 소국을 구휼하시어 특별히 군대를 동원해 구원해주시니 황은이 망극합니다.

선조에 의하면, 왜군의 목적은 명나라 침략이고 조선이 길을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공격을 당했다. 그의 말은 명의 군사적 지원이 명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지정학적 인식에 근거했다. 선조의 말은 곧장 비판에 직면했다. 그 관리는 며칠 뒤 선조의 말을 직접 거론하면서 기존의 중화적 관념으로 파병 이유를 제시했다.

만약 왜적이 상국을 침범하려 했다면, 절강의 영파 등지로 와서 침범하면 되지 하필 귀국을 경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비록 요동과 계주의 높은 고개들과 험한 청석령(靑石嶺)을 넘고자 하더라도, 그들이 날아서 넘을 수 있겠습니까? 황상께서 속국이 병화를 당했음을 걱정하여 대군을 내어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 귀국은 단지 은혜에 감사해야 할 뿐이고, 그런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조는 앞으로 명심하겠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뒤 명의 관리들은 한 문서를 보내 파병의 취지를 재확인했다. 즉, 평소 조선의 충정을 생각하여 황제가 어려움에 처한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파병했다는 것이다.

그 후에도 공식적 문서에서 지정학적 표현은 견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를테면 명군이 벽제관 전투에서 일격을 당하고 교섭을 통해 왜군을 서울에서 철수하게 한 뒤, 명군 지휘부는 강화에 치중했다. 조선은 외교적 역량을 집중하여 거기에 반대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이 명 조정에 보내는 진주문 서두에서 “적이 (명나라의) 문정(門庭, 문 안의 뜰)을 점거하고 있다.”고 쓰자, 당시 조선 문제를 총괄하러 요동으로 나온 고양겸(顧養謙)은 도중에 해당 문서의 수정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조선 내부에서는 조선과 명의 관계에서 순치와 같은 지정학적 개념들이 점차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명의 일부 관리나 장수들조차 조선의 관리들에게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개념들을 종종 사용했다.

더욱이 전쟁 상황이 이어지면서 명 내부에서도 보다 정교한 형태의 지정학 논의가 전개되었다. 여기서 자세히 나열할 수는 없으나, 조선의 지정학적 의미를 세분화하여, 요동 이외에도 연해 지역 방어, 수군을 통한 서해안 전역에 대한 방어, 조선의 직접 경영 등 방안들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논의를 기초로 정유재란 시기에는 왜군의 한반도 진출에 대한 단계적 방어선의 구축과 같은 방안이 나왔다. 

결국 전쟁이 재발하는 시점에서는 조명관계에 대한 지정학적 인식은 양국 사이에 공식화되기에 이르렀다. 1597년 2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자극적인 표현을 써서라도 파병을 촉구하도록 했다. 그 결과 조선의 사신이 지참한 진주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포함되었다.

왜적의 흉계는 반드시 원교근공(遠交近攻)의 계책에 그치지 않을 것이며, 장래의 화는 소방에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 지금 (일본이) 명과의 약속을 준수하지 않고 다시 대군을 내어 침략을 자행하는 것은 ‘먼저 조선을 취한 뒤에 중원을 엿본다.’는 허의후(許儀後)의 말을 지금에 이르러 더욱 증명하는 것입니다. …· 지금 (조선을) 병탄하면 훗날 천하(중국)가 왜적의 세력을 걱정하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입니다. 

허의후는 명나라 사람으로 일본 체류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 계획을 사전에 명에 보고한 인물이다. 비록 명은 명실록과 같은 공식기록에서 문건의 해당 구절을 포함시키지 않았으나, 조선에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한반도에 왜군의 존재가 명에게는 지근거리의 걱정거리일 수밖에 없다는 지정학적 근거에서 조선은 명의 파병에 낙관했고, 실제 명은 왜군의 재침 소식을 듣자마자 파병을 결정했다. 

요컨대 임진왜란은 중국은 물론 조선에게도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일깨우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다만 그 뒤 청나라 중심의 국제질서 하에서 그 의식은 약화되었고, 그 결과는 식민지배와 분단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대외정책에 과연 독자적인 지정학 의식이 반영되고 있는가? 그저 특정 강대국 중심의 질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김영진 국민대학교·정치학

국민대학교 중국학부 교수로 글로벌인문·지역대학 학장을 맡고 있다.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주 관심 분야는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중국정치이다. 대표적인 저술로 『임진왜란: 2년 전쟁 12년 논쟁』(2021), 『중국, 대국의 신화: 중화제국 정치의 토대』(201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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