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처리즘의 미디어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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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리즘의 미디어 개혁
  • 김대호 인하대학교·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 승인 2022.10.10 21: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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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말하다_ 『자유시장주의 미디어 거버넌스』 (김대호 지음, 커뮤니케이션북스, 360쪽, 2022.09)

 

이 책은 나의 지적 여정의 큰 흐름에 있는 책으로,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큰 저술이다. 1980년대 대학에서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한 학생들에게 문화연구, 정치경제학, 구조주의 등을 탐구한 비판 커뮤니케이션은 커다란 인기가 있었다. 그중에서 ‘문화연구’의 본산은 영국 버밍엄 대학교(University of Birmingham)의 현대문화연구소(CCCS, Center for Contemporary Cultural Studies)였다. 리처드 호가트(Richard Hoggart),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 스튜어트 홀(Stuart Hall) 등의 문화연구 이론가들이 활동한 현대문화연구소는 ‘버밍엄 학파’의 본산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버밍엄 학파는 하위문화, 미디어, 인종, 젠더 등의 연구에서 발군의 역량을 발휘했다. 특히 스튜어트 홀은 문화, 언어, 이데올로기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당대 문화 분석을 통해 실천의 지향점을 찾고자 했는데, 이것이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도 홀의 1980년대 대처리즘(Thatcherism)에 대한 분석은 당시 지식 세계를 이끈 커다란 사상 체계였다. 신좌파 (New Left)의 대표적 학자인 스튜어트 홀은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영국 총리로 재직한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가 영국 사회를 개혁한 프로그램을 비판하기 위해서 하나의 이념형(ism)으로 이 용어를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대처 총리의 정책을 하나하나 통렬히 비판했다. 

나는 이러한 대처리즘 비판 연구를 계승하고 보편성을 갖는 논의로 발전시키기 위해 버밍엄 대학에서 연구했다. 그러나 대처리즘이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시대를 정확히 파악하여 변화의 화두를 던지고 실천한 개혁 프로그램이었음이 드러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후에 확립된 사회민주주의 정책과 제도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를 확대하면서 재정지출이 늘고, 세금을 더 많이 징수하면서 민간 경제 활동은 완전히 위축되었다. 게다가 주요 산업의 국유화로 기업들은 무사안일에 빠졌고, 국민들은 근로의욕을 상실하고 정부에 의존적이 되어갔다. 더욱이 노동조합은 정치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노조 천국’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이 모든 상황들이 함께 닥치면서 ‘영국병’이라고 부를 정도가 되었다. 

대처 총리는 ‘영국병’이 치유되어야 할 역사적 과제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대처 총리는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데 머물지 않고, 병의 근원을 완전히 제거하는 개혁으로 나아갔다. 전임 노동당 정부와는 대조적으로 매우 활기차고 열정적이며 자신감을 가지고 개혁을 추진했다. 이것은 중요한 정치적 분수령으로서, 사회민주주의적 합의와의 결정적인 단절, 자유민주주의 영국 사회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던 것이다. 따라서 대처리즘이 오히려 역사적 보편성을 가지며 시대정신의 가치를 보여준 것이었다. 

이 책은 이러한 맥락에서 비판 커뮤니케이션의 이론적 지향과는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대처리즘을 재해석하고, 대처 정부의 미디어 개혁을 재논의한 저술이다. 대처 총리의 미디어 개혁 프로그램은 무엇보다도 60여 년간 고여서 썩은 물처럼 되어 갔던 공영방송을 개혁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공영방송은 1920년대 방송 서비스를 전송하는 주파수 자원이 제한되어, 방송 채널이 국가마다 2~3개에 불과하던 시절에 탄생한 것이다. 소수의 방송만 가능했던 시절에 방송을 민간 사업자가 운영하지 않고, 국가가 운영하지 않는 제3의 섹터를 상정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공영방송의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 고정된 개념으로 바라보면 공영방송 논의가 공허해진다. 

대처 정부의 방송 개혁은 탄탄한 소비자를 기반으로 했다. 시청자와 그 이익을 보호하는 책임을 지는 것이 지금까지 영국에서 방송을 통제해 온 보호자의 역할보다 소비자의 이익을 더 잘 구현하고 제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기존 방송사들이 시청자와 청취자의 이익에 대해 유능하지도 않은 보호자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송사, 방송인의 이익에 ‘포획’된 것으로 간주했다. 즉 공영방송이 겉으로는 공공성을 내세우면서도 공공의 이익이 아닌 내부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는 자기 영속적인 특권 시스템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방송의 규제도 소비자보다 제작자의 이익을 선호하고, 납세자나 시청자로서의 대중보다 방송사의 이익을 선호하는 과정으로 여겨졌다. 그러면서 BBC와 ITV의 ‘안락한 복점’이 보여주는 비효율성을 지적했다. 

 

                          마가릿 대처 영국수상 (Margaret Hilda Thatcher 1925.10.13 ~ 2013.4.8 )

안락한 복점의 60년 시간은 너무 긴 기간이었다. BBC는 점점 관료화되었고, 시대의 변화에 무감각했으며, 비효율적인 기관이 되어 갔다. BBC에 대한 개혁이라도 제기가 되면 ‘공공성’을 내세워 그러한 개혁의 목소리를 잠재우곤 했다. 소비자 주권이 부재하고 비효율적인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채널, 그리고 기술 변화에 관계없이 방송을 추상적인 공익이나 사회적 이익으로 영속적으로 유지한다는 생각에 빠져 있던 것이다.

대처 정부는 알란 피코크를 위원장으로 하는 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방송 개혁의 청사진을 그리도록 요청했다. 피코크 위원회는 기존 방송의 특권 블록을 해체하고, 방송이 외부에 더욱 개방되고, 시청자가 자신의 이해를 더욱 드러내고 행동할 수 있도록 대중의 일반적인 의지에 더 잘 반응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정보통신기술 발전이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는 방송 정책의 기본 목표를 소비자 선택의 자유와 프로그램 제작자가 대중에게 여러 가지 대체 상품을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는 것으로 확립했다. 

피코크 위원회는 이런 철학적 기초하에 BBC가 기존의 안락한 복점에서 탈피하여 효율성과 책임성을 증가시켜야 한다는 점을 통렬하게 지적했다. 그 결과 BBC는 프로그램의 25%를 외부 독립제작사에 개방하였고, 자체 개혁을 추진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BBC는 경쟁을 도입하여 효율성을 높이고 비용을 절감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방송 프로그램이 다루는 내용과 형식의 범위를 넓히겠다고 약속했다. 민영방송에서도 거의 천지개벽 수준의 변화가 일어났다. 공공적인 민영방송으로 간주되어 왔던 ITV 허가에 경매를 도입한 것이다.

이런 개혁의 기반 위에 대처 총리와 메이저 총리의 뒤를 이은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정부는 2003년 커뮤니케이션법을 제정하였다. 커뮤니케이션법은 대처 정부의 1990년 방송법 제정의 연장선상에서 미디어의 자유화와 방송, 통신, 미디어 융합을 촉진하기 위한 더욱 진전된 법이었다. 2003년 커뮤니케이션법은 그 명칭에 있어서도 방송법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법으로 정한 만큼, 내용에서도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융합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였다.

그 결과 영국의 미디어는 미디어 융합을 선도하며, 디지털 컨버전스로 이어지는 혁신을 이루어냈다. 이러한 모든 출발은 대처 총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처 총리가 기초를 만들고, 노동당 정부가 유지 확대하고, 다시 보수당 정부가 이어받는 과정을 통해 40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 특히 노동당 정부가 대처리즘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킨 것은 1979년 이전의 노동당으로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그 결과 대처 총리의 전망대로 산업이 활성화되고, 소비자의 선택이 확대되고, 산업과 소비자에게 모두 혜택을 주는 체계가 확립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35년간 영국 사회를 지배해 온 사회민주주의 컨센서스는 1979년 이후 40년간 자유민주주의 컨센서스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오로지 공공성만 강조하던 미디어를, 창의성이 넘치고 융합하며 글로벌 시장을 대상으로 한 개방적인 미디어로 변화시킨 대처 총리의 유산이 여전히 영국의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분야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대처 총리 시절의 공영방송 문제는 지금 한국의 공영방송 문제와 맞닿아 있다. 최근 MBC의 대통령 순방 관련 비속어 보도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공영방송이 언론의 기본인 취재·보도 윤리를 준수하지 않고, 공정한 보도 노력도 하지 않고, 오히려 고의적 편파 보도 의혹까지 받은 것은 공영방송의 존재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제 공영방송이 누구를 위한 방송이며, 과연 소비자의 이해에 충실한 방송을 하고 있는지 심각하게 검토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이런 때 대처 정부의 미디어 개혁은 우리에게도 큰 영감을 줄 것이다. 이 책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대처 총리의 미디어 개혁이 집권할 때에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 이후 특히 노동당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지며, 그것을 기반으로 더욱 혁신의 길을 걸었다는 데 있다. 이 책이 자유시장주의 미디어 거버넌스로 공영방송을 개혁하고 창조적인 새로운 미디어 시대를 만드는 모델을 찾아 나가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김대호 인하대학교·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인하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이며 사회과학대학 학장으로 일했다.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버밍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미디어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정부의 여러 위원회, 공공기관 등에서 활동했다. 주요 저서로 『AI시대에 가치있는 것들』(2021), 『한국의 미디어 거버넌스』(2020), 『블록체인 거버넌스』(2019), 『Media governance in Korea 1980∼2017』(2018), 『인공지능 거버넌스』(2018), 『공유경제』(2017)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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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2022-10-20 12:39:16
"대통령 순방 관련 비속어 보도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 고의적 편파 보도 의혹까지 받은 것은 공영방송의 존재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아이고야...
"편파 보도"라는 "의혹"을 받으면 곧바로 "공영방송의 존재에 대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나요?

그럼 저도 한번 의혹을 드려보겠습니다 --> 필자의 글은 편파적이라는 의혹을 받음으로써, 학자로서의 존재에 대해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원글이 비문이라는 의혹이 있어서 좀 바꿨습니다. 혹은 이렇게 쓸 수도 있겠군요 --> 필자의 글은 비문이라는 의혹을 받음으로써, 학자로서의 존재에 대해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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