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예술 작품의 샘』에서 샘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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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예술 작품의 샘』에서 샘은 무엇일까요?
  • 한충수 이화여자대학교·서양철학
  • 승인 2022.10.09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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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에게 듣는다_ 『예술 작품의 샘』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한충수 옮김, 이학사, 214쪽, 2022.08)

 

하이데거는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20세기 서양 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룹니다. 20세기에 활동한 독일과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들 가운데 하이데거의 철학을 연구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입니다. 또 그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1927)은 플라톤의 『파이드로스』(BC 370), 칸트의 『순수이성비판』(1781), 헤겔의 『정신현상학』(1807), 베르그송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1889)과 함께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가장 우수한 책으로 손꼽힙니다.

1930년대 초반부터 하이데거는 예술에 관한 철학적 숙고를 시작했습니다. 그 숙고의 산물은 1935년 독일 도시 프라이부르크에서 강연 「예술 작품의 샘에 대하여」를 통해서 처음으로 소개되었습니다. 하이데거는 이 강연의 내용을 대폭 수정 및 보완했고, 제목도 「예술 작품의 샘」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달라진 강연은 총 3부로 이루어졌고, 1936년 독일 도시 프랑크푸르트에서 삼 주에 걸쳐 발표되었습니다. 이때의 발표문은 1950년 논문집 숲길에 포함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예술 작품의 샘」은 당시 철학계에 선풍을 일으켰고 1960년 레클람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습니다. 그 바람은 여전히 잦아들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예술 작품의 샘」은 2012년 클로스터만 출판사에서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바로 이 책을 저는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이렇게 주목받아 온 「예술 작품의 샘」은 이미 한국에서 세 차례 번역되었습니다. 저의 번역은 기존 번역들이 없었다면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번역의 선배님들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기존 번역들과 제 번역은 제목이 조금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은 같은 글이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1936년 발표한 강연의 독일어 제목은 “Der Ursprung des Kunstwerkes”입니다. 영어 번역은 “The Origin of the Work of Art”입니다. 이런 제목을 기존 번역자들이 「예술 작품의 근원」이라고 옮긴 것과 달리 저는 「예술 작품의 샘」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니까 영어 “origin”에 해당하는 독일어 “Ursprung”을 다르게 번역한 것입니다. 저에게 새로운 번역은 큰 도전이었습니다. “근원”은 유장한 서양 철학의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다루어진 개념인 데다가 하이데거의 사상 속에서도 중요한 지위를 점하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주요 개념을 번역할 때는 이런 철학사적 맥락과 아울러 하이데거의 다른 근본 개념들과의 관계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새 번역은 오히려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미 익숙해진 기존의 번역을 쓸데없이 바꾸었다고 독자들의 원성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새로운 번역어 “샘”의 쓸모를 제시해야만 하고, 또 기꺼이 제시하려 합니다.

먼저 독일어 “Ursprung”의 의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독일어권의 사전들 가운데 가장 풍부한 내용을 갖춘 DWDS(Digitales Wörterbuch der deutschen Sprache)에 따르면, “Ursprung”은 “시발, 시작, 출발점, 생성, 원인, 근거”를 의미합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근원”은 “물줄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곳, 사물이 비롯되는 근본이나 원인”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두 낱말은 의미상 서로 가까우므로 Ursprung을 “근원”으로 옮긴 기존 번역은 바른 번역으로 보입니다. 이와 달리 “샘”은 “물이 땅에서 솟아 나오는 곳”을 가리키고, 비유적으로는 “힘이나 기운이 솟아나게 하는 원천”을 의미합니다. 이는 “Ursprung”의 사전적 의미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저의 새 번역은 잘못된 번역일까요?

하이데거의 글을 원문으로 읽거나 한국어로 옮길 때는 주의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그가 사용한 낱말 혹은 개념의 의미가 현재의 독일어 사전에서 풀이한 뜻과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점입니다. 하이데거의 강연 제목에 등장하는 “Ursprung”도 그렇습니다. 그는 강연이 끝날 무렵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술 작품의 샘은 예술입니다. [...] 예술이 이 같은 샘인 이유는 예술의 본재(本在)가 [진실의] 샘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술은 진실이 존재하게 되는 [...] 하나의 탁월한 방식입니다.” 여기서는 “근원”이 아니라 “샘”으로 번역해도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아마도 하이데거의 진실[진리] 개념이 추상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때 진실이 기운이나 힘과 같은 것이라면, 예술을 샘으로 보아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실이 과연 그런 것일까요? 어쨌든 하이데거에 따르면, 예술이 작품의 샘이고, 거기서 샘솟는 것은 존재의 진실입니다. 그 진실에 힘입어 예술 작가는 제품을 넘어 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술 작업의 근본은 진실이 샘솟도록 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설명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난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강의 출발점이 되는 샘을 한번 떠올려봅시다. 그 샘터에는 샘물이 고여 있습니다. 그 물은 샘터 바닥의 틈에서 새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닥 아래에는 풍부한 지하수가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샘터 바닥은 지하수를 덮고 있는 껍질과 같습니다. 그 껍질에 틈이 생기고 벌어지면 지하수가 새어 나와서 샘을 이루게 됩니다.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은 지하수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지하수가 고갈되면 모든 샘과 강이 말라 인간을 비롯한 어떤 생명체도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하수는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존재와 같습니다. 샘터 바닥의 틈에서 새어 나오는 물은 존재의 진실과 같습니다. 그 샘터는 진실이 깃든 예술 작품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샘의 언저리에서 샘물을 들이마시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다만 샘물 대신 존재의 숨결을 들이쉴 것입니다.

예술 작가와 그 작업에 대해서도 샘의 비유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강이 발원한 샘터는 자연의 힘으로 생겨났습니다. 땅속의 지하수면이 높아져 지표면과 가까워지면 그곳에서 물이 솟아 나오고 풍화 작용을 통해서 지표면이 깎이고 갈라지면 그 틈에서 물이 새어 나옵니다. 그런데 샘터는 인간의 힘으로도 만들어집니다. 땅을 파서 지하수면에 다가가 구멍을 내면 그곳에서 물이 솟구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땅을 파고 구멍을 내는 일은 예술 작가의 작업과 닮았습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 속에는 존재가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존재자의 표면과 존재의 수면이 가까워지고 그 표면에 갈라진 틈이 생기면 존재의 진실이 새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존재자는 예술 작품이 됩니다. 그러니까 예술 작가는 존재자의 표면과 존재의 수면 사이에서 그 간격을 좁히며 균열을 내는 작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Young-Jae LEE, Keramische Werkstatt Margaretenhöhe, Essen, Germany

저의 비유 또한 어렵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나의 예술 작업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독일 도시 에센에는 도자기 공방 마르가레텐회에(Keramische Werkstatt Margaretenhöhe)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바우하우스(Bauhaus)의 이념에 따라 아름다운 생활 도자기가 빚어집니다. 공방을 대표하는 도예가 이영재(Young-Jae LEE)는 예술 도자기를 만들어 자신의 예술관을 펼치며 세계 곳곳에서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생활 도자기와 예술 도자기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도자기 표면의 틈의 유무일 것입니다. 도예가에 의해 도자기 표면에 틈이 벌어지고 그 틈에서 존재의 진실이 새어 나오면 비로소 그 도자기는 예술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틈이나 진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예시도 난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샘터 바닥의 틈도 맨눈으로 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또 너무 맑은 샘물은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도 손을 뻗어 보면 새어 나와 고인 물이 손에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샘터와 마찬가지로 예술 작품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의 틈이나 진실이 있을 것입니다.

 

                                          방추형 항아리를 만들고 있는 도예가 이영재

저는 도예가 이영재가 도자기를 빚는 작업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물레 위에 놓인 점토 덩어리는 도예가의 손이 닿자마자 순식간에 우아한 형태의 도자기로 변신했습니다. 마치 마술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저의 눈에 도자기는 이미 완성된 것으로 보였는데도 작가의 손길은 한동안 쉬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돌아가던 물레가 멈추었습니다. 이영재는 도자기를 손에 들어 가만히 살펴보았고, 잠시 후 옆의 선반에 내려놓았습니다. 그것은 생활 도자기가 아니었습니다. 예술 도자기가 빛나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것을 제품이 아니라 작품이 되게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도예가의 손길이었습니다. 한동안 쉬지 않던 그 손길은 틈을 내며 존재의 진실이 새어 나오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 진실은 흩어져 버리지 않고 작품이라는 샘터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영재의 작품전에서 관람객들은 존재의 샘물을 들이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하이데거의 예술관을 소개 및 설명하고 비유와 사례를 통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샘이라는 표현과 비유가 쓸모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무용하지 않았다면 제가 하이데거의 Ursprung 개념을 “샘”으로 옮긴 것이 크게 잘못된 번역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예술 작품의 샘』에서 “샘” 말고도 여러 새로운 번역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표현들 때문에 이 책이 전체적으로 생소하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독자 여러분이 인내심을 가지고 저의 번역을 읽어주시고, 저의 크고 작은 도전들을 너그럽게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 나은 번역을 위한 피드백도 부탁드립니다.


한충수 이화여자대학교·서양철학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인문융합전공의 주임을 맡고 있다. 서울대학교 기계항공공학부를 졸업한 뒤 동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와 란다우대학교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Erfahrung und Atmung bei Heidegger(Ergon, 2016)가 있고, 역서로는 한병철의 『선불교의 철학』, 하이데거의 『철학의 근본 물음』, 야스퍼스의 『철학적 생각을 배우는 작은 수업』, 하이데거의 『예술 작품의 샘』이 있다. 2021년에 출간된 The Routledge Handbook of Phenomenology and Phenomenological Research에서 한국의 하이데거 철학 연구사를 소개했고, 현재 한국 하이데거 학회 및 Heidegger Circle in Asia에서 활동하며 국내외 하이데거 철학 연구에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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