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근대문학 대문호들의 작품세계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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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근대문학 대문호들의 작품세계와 사상
  • 이영범 청주대·러시아문학
  • 승인 2022.10.09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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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이 읽기_ 『러시아 문학과 사상: 푸시킨·고골·도스토옙스키·톨스토이·체호프』 (이영범 지음, 보고사, 370쪽, 2022.09)

 

<러시아 문학과 사상: 푸시킨·고골·도스토옙스키·톨스토이·체호프>란 책은 러시아만의 독특한 고유의 역사와 정치, 사회문화적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 19세기 러시아 근대문학과 문화 및 예술에 대한 이해와 러시아인의 정체성 탐구 등에 작으나마 도움이 되는 저서다. 먼저 이 책의 내용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한 후, 러시아 근대문학의 대문호들의 작품세계와 사상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고대 러시아 문학은 동슬라브족(러시아 민족, 우크라이나 민족, 벨라루스 민족)에게 문자 문학이 생기기 오래전의 전설, 민담, 속담, 설화 등 다양한 구비문학적인 소재들이 10세기경 출현한 키릴문자(현재 러시아어 알파벳)로 표현되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1237년 바투의 몽골군의 침략으로 그 이듬해 모스크바가 점령당해 약 240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았고, 1861년까지 농노제도를 유지했으며, 1917년 2월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 황제 정부가 무너지기 전까지 동양식 전제주의 제도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그리고 르네상스 단계를 거치지도 못했고, 서구에 비해 상당히 늦게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표트르 대제(표트르 1세의 별명 1672~1725년, 재위: 1682~1725년)의 서구화 정책으로 인해 문화와 예술, 과학 기술, 관습과 종교 등 거의 전 영역에서 그 이전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크게 변화됨과 동시에 비약적인 수준의 진화와 발전이 이루어졌다. 

한편, 러시아 문학자와 사상가들은 서구의 문화와 사상 등을 비판적으로 수용해 러시아만의 특수한 독자적 발전 방향을 추구하려 노력했다. 예를 들어, 1840년대에 벌어진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 간의 치열한 논쟁이 이에 해당한다. 19세기 초 ‘러시아 시의 황금기 최고 시인’이자 ‘러시아 국민 시인’으로 불리는 푸시킨은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러시아는 그 지리적 위치, 정치적 상태 등으로 유럽을 재판하는 법정이며, 러시아인은 유럽의 비판자다.” 

이 책에 소개되는 러시아 대문호들(푸시킨1799~1837, 고골1809~1852, 투르게네프1818~1883, 도스토옙스키1821~1881, 톨스토이1828~1910, 체호프1860~1904)은 각 작가의 작품 속에서 훌륭한 러시아 여성의 형상을 창조했다. 예를 들어, 푸시킨의 운문 형식의 산문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의 여주인공 타티야나, 톨스토이의 장편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 카레니나 등이 그러한 형상이다. 

러시아 문학 비평 및 철학과 사상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던 게르첸이 말했듯이, 러시아 문학은 어떤 정치적 자유조차 없던 민중의 분노를 전달하고, 러시아 지성인(인텔리겐차)의 양심의 외침을 전달하는 연단으로서 그 역할과 사명을 감당했다. 이처럼 러시아 문학은 민중의 열악한 삶의 상태와 사회적 환경을 개선하는 길이자 도구로서 커다란 역할을 했다. 특히 푸시킨을 비롯한 고골,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와 같은 19세기의 위대한 러시아 문학의 거장들은 그 당시 서구에 비해 크게 뒤떨어진 러시아 사회를 개선하고, 인간과 인권을 중시하는 휴머니즘과 이에 토대가 되는 인문 정신 및 사회사상의 탐구 등에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했다. 또한, 그들은 국민적 의의를 지닌 중대한 문제를 국민(민중)의 편에서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해석하려는 입장을 취했다. (참고로 이 책은 19세기 러시아 전제주의 체제하의 민중을 염두에 두었으므로, 여기서 ‘국민’이란 ‘민중’을 의미함.) 

19세기 러시아는 전제주의 제도와 농노제도(1861년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해방령으로 농노제가 폐지됨) 등 여러 영역에서 후진적인 정치·경제 체제 등 비민주적인 사회 환경에 있었다. 이처럼 열악한 사회적 환경과 조건 속에서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1세기라는 매우 짧은 기간에 서구 문학을 앞지를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러시아 국민 문학의 아버지’, ‘러시아 민중성의 최고 표현자’, ‘다양한 문학 장르의 천재 작가’ 등으로 불리는 푸시킨이 낸 ‘비판적 사실주의의 길’을 고골,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등 대문호들은 따라가면서, 그리고 그 길을 더 단단히 다져가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통해 사실주의 문학을 번영하게 했다. 

17세기 말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과 더불어 진행된 러시아 근대문학은 18세기 초부터 프랑스를 비롯한 영국 등의 영향을 받아 19세기에 이르러 러시아만의 고유한 특징을 지닌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즉, 서구(유럽)의 관점에서 러시아 문학이 세계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전성기는 19세기였다. 따라서 19세기 러시아 근대문학의 대문호들(푸시킨, 고골,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등)은 셰익스피어, 괴테, 세르반테스 등에 비견되는 작가들이다. 

러시아 최고의 낭만주의 시인이자 러시아 사실주의 작가인 푸시킨은 모스크바 귀족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의 어머니는 18세기에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았던 에티오피아의 한니발 장군의 손녀였다. 곱슬머리와 검은 피부를 가진 푸시킨은 자기의 몸속에 에티오피아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데 대해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어린 시절에 그는 프랑스인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유모 아리나 로지오노브나로부터 러시아어 읽기와 쓰기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민담과 민요를 들었다. 또한, 그는 유모를 통해서 러시아 민중의 삶에 대해 깊이 동정하고 이해했으며, 러시아 민간 전래 문학에 관해서도 관심과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는 12살 되던 해인 1811년 6년제 귀족자제 교육기관인 리체이에 입학했다. 천재 시인 푸시킨은 이 학교에 다니면서 120여 편의 시를 썼다. 리체이를 졸업한 후 외무성 관리로서 잠시 근무하던 중 진보적 문학 서클인 ‘녹색 램프’에 가입해 미래의 데카브리스트들과 교류했다. 그는 이 무렵 진보적인 시 <자유>, <차다예프에게>, <마을>을 발표했는데, 이로 인해 남러시아로 유형을 당했다. 

그는 캅카스(코카서스)에서 바이런의 작품을 읽고, 그 영향을 받아 바이런 풍의 시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키시네프(키시나우)에서는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냄새를 풍기는 작품들 - <캅카스(코카서스)의 포로>, <바흐치사라이의 분수>, <도둑 형제> 등 - 을 발표했고, 운문 형식의 산문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하일롭스코예 영지에서 <예브게니 오네긴>과 <집시들>을 집필하던 중 1825년에 데카브리스트 난이 발생하지만, 격리된 신분이어서 이 난에 참여하지 못한다. 여기서 그는 비극 <보리스 고두노프>를 완성했다. 니콜라이 1세는 데카브리스트 난을 평정한 후 푸시킨을 모스크바로 소환해 그의 작품을 직접 검열하고 감독하였다. 푸시킨은 1830년 가을 볼디노 영지에서 <예브게니 오네긴>, 작품집 『벨킨 이야기』, 4편의 『작은 비극』 등 많은 작품을 썼다. 

그는 1828년 겨울 모스크바에서 만난 16세의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미모에 반해, 그 이듬해 봄에 청혼했으나 그녀의 부모로부터 거절당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청혼하여 결국 1831년에 2월에 모스크바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해 가을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살던 중 1833년에 <예브게니 오네긴>을 발표하고, 그해 여름에 볼디노를 방문해 <스페이드의 여왕>, <대위의 딸>, <청동 기마상> 등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수도 페테르부르크의 사교계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그의 아내는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좋아해서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또한, 그녀는 남편의 문학적 재능이나 지적 활동에는 무관심했다. 니콜라이 1세와 자기의 아내와의 염문설이 떠도는 중에 그는 황제 시종관으로 임명되어 근무하게 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푸시킨은 1836년에 고골의 도움을 받아 문학잡지 『동시대인』을 발행하고, 이 잡지에 <대위의 딸>을 연재했다. 자기의 아내와 황제와의 염문설에 이어 네덜란드 대사의 양아들이자 프랑스인 청년 장교 단테스와의 염문설로 인해 괴롭힘을 당한 푸시킨은 그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단테스와 결투하여 치명상을 입은 그는 1837년 1월 7일에 사망했다. 황제 정부는 국민들의 조문시위를 두려워한 나머지 한밤중에 그의 관을 미하일롭스코예 부근의 스뱌토고르스크 수도원으로 옮겨 비밀리에 장례식을 치르도록 명령했다. 

푸시킨은 1812년 조국 전쟁(프랑스 군대와의 전쟁)의 승리로 고무된 러시아 민족의 애국주의 사상, 민족적 자각과 민족적 기운이 고조되는 역사적 시기에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 국민사상(민중사상)과 감정을 훌륭히 표현했으며, 러시아 문학어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국민 생활과의 밀접한 유대, 시대의 선구적 사상의 반영, 내용의 풍부 등의 측면에서 그를 따를 러시아 시인은 없다. 투르게네프가 푸시킨 이후의 작가들은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것처럼 그의 문학적 영향력은 매우 크다. 

고골은 산문 분야에서 푸시킨의 직접적 후계자다. 그는 이 시인에 대한 회상록에서 “푸시킨의 조언이 없었더라면, 난 무엇 하나 고찰해 낼 수도 없었고, 쓸 수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희곡 <검찰관>과 장편 <죽은 혼>의 주제도 푸시킨으로부터 얻은 것이라 말했다. 그렇다고 고골이 푸시킨의 모방자는 아니었다. 고골 스스로 ‘눈물 속의 미소’라고 이름을 붙인 풍자는 숭고한 이상에 대한 직접적인 호소가 아니라, 추악한 것에 대해 무감각해지려는 독자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었다. 푸시킨이 아름답고 시적인 면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인 데 비해, 고골은 생활 속에서 추악하고, 천박하며, 우스꽝스러운 것들을 예리하게 주목해, 이를 확대해서 묘사했다. 고골 작품의 의의는 국민의 이익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부정의 색채로 묘사해, 아름다움에 대한 긍정과 이상을 향한 동경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는 1840년대 ‘자연(학)파 시대’ 또는 ‘고골 시대’를 연 작가다. 

고골은 우크라이나의 카자크 지주 귀족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신학교를 졸업했으나,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영지 관리, 연극 등 예술에 재능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매우 감상적이고 신앙심이 돈독했지만, 지나친 미신적 믿음을 지닌 여인이었다. 그러한 어머니로부터 종교적 영향을 많이 받은 그는 어머니로부터 죄를 범하면 반드시 사후 심판받게 되며, 죄인은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고골은 고향 네진에서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그 당시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3년간 내무성 관리로 근무하면서 당대의 유명한 시인인 주콥스키 및 푸시킨과 친교를 맺어, 그들에게서 작가로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푸시킨은 고골의 문학적 재능과 작가로서의 발전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를 격려해 주었고, <검찰관>과 <죽은 혼>을 비롯한 많은 작품에 대한 모티프를 제공하고 조언해 주었다. 고골은 러시아 현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추악하고 천박하며 우스꽝스러운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확대 재생산해 그가 ‘눈물 속의 미소’라고 말한 당대의 사회 현실에 대한 신랄하고 씁쓸한 미소가 깃든 유머러스한 작품을 창조했다. 또한, 어둡고 비극적 색채를 띠는 그의 작품들은 가혹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쓴웃음을 반영한다.

도스토옙스키는 톨스토이와 함께 세계문학 사상 최고의 작가, 철학자, 심리학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는다. 그는 모스크바의 마린스키 빈민 병원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 병원의 의사였는데, 그리 넉넉한 생활을 하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는 상냥하고, 교양과 품위가 있었으며, 러시아 정교 신도로서 신앙심이 두터웠고, 시와 소설을 즐겨 읽었다. 도스토옙스키가 16살 때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는 약 2년 뒤 은퇴 후 툴라 현에 내려가 영지를 경영하던 중 비명횡사했는데, 농노들에게 원한을 사서 참살 당했다고 한다. 이 비극적 사건은 그에게 강한 충격을 주어 평생 그의 뇌리에 남아 그의 마지막 장편 <카라마조프 집안의 형제들>을 집필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는 공병학교를 졸업한 후 장교로 임관되었다가 곧 퇴직하고, 창작에 열중하여,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을 써서 문단에 화려하게 등단했다. 그는 도박 빚 등으로 인한 가난한 삶과 간질과 신경증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다. 또한, 그는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페트라솁스키 서클에 가입해 활동하다 체포돼, 사형 집행 직전 알렉산드르 2세의 특사로 형 집행이 정지돼, 시베리아 옴스크 감옥에서 4년간 유형 생활을 했다. 이처럼 독특하고 비극적인 삶의 체험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시대에 따라 도스토옙스키를 “휴머니즘의 설교자”, “가난한 사람들과 학대받고 모욕당하는 사람을 노래하는 시인”, “병적이고 잔인한 재능의 소유자”, “비극 소설의 창조자”, “영혼의 심연을 파헤친 잔인한 천재”, “탁월한 정신병리학자”, “위대한 종교 사상가” 등 다양하게 평가한다. 그는 1880년 마지막 장편 <카라마조프 집안의 형제들>을 완성한 후 그 이듬해에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운명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문제, 종교, 자유, 사회, 민족 문제 등과 연관된 사상을 표현한 ‘사상소설’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인도주의적 성격, 극단적 성격, 비극적 대립, 죄의 문제, 궁극적 죄로서의 무신론 문제를 다룬 ‘비극 소설’로도 불리며, ‘형이상학 소설’로도 불린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의 미학적 특징은 작가 자기의 다양한 체험으로 인한 매우 복잡하고도 상징적인 철학 체계로 구축돼 있고, 각 등장인물의 사상이 ‘다성적(多聲的)’ 체계로 구성돼 있다. 

톨스토이는 모스크바의 남쪽 약 200km에 위치한 야스나야 폴랴나의 명문 백작 가문 출생이다. 3살 때 어머니가, 10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다. 17살 때인 1844년 카잔 대학 동양학부 아라비아 튀르크(터키)어 과에 입학했다가, 흥미가 없어 그 이듬해에 법학과로 전과했다. 그는 공부에 싫증을 느껴 필수 과목인 역사 강의에 자주 결석해서 근신 처분을 받아 징벌실에 감금되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프랑스 계몽사상에 관심을 가졌는데, 특히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사상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는 25살 때 카프카스(코카서스) 포병연대 소위보로 입대해, 군 복무 중 자전적 3부작 소설 - <유년 시대>, <소년 시대>, <청년 시대> - 을 썼다. 그는 1855년 당시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장교로 근무했고, 문단과 사교계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또한, 그는 거기서 술과 도박에 빠지기도 하고, 집시 여인들과 방탕하게 생활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는 곧 도시 생활에 염증과 회의를 느껴, 제대한 뒤 고향의 영지인 야스나야 폴랴나로 갔다. 톨스토이는 1857년 1월 폴란드, 프랑스, 스위스 등을 여행하면서, 서구 자본주의 문명사회의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을 체험했다. 그는 서구에서 귀국 후 학교 건립, 교과서 저술 등을 통해 농민 교육과 계몽 활동을 하면서 농민들과 함께 농사를 짓기도 했다. 

그는 러시아 역사와 민족 문제에도 커다란 관심을 가졌으며, 이러한 관심을 소재로 삼아 장편 <전쟁과 평화>과 같은 작품을 썼다. 또한, 그는 장편 <안나 카레니나>에서 연애, 결혼, 종교, 그리고 가정 등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1879년 러시아 정교회 탈퇴를 선언했으며, 자기의 과거와 삶. 그리고 문학을 부정하는 <참회록>을 썼다. 그는 무정부주의와 무저항 정신에 입각한 ‘톨스토이주의’를 몸소 실천했으며, 기독교적 계율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성자의 길을 가려고 노력했다. 이로 인해 그는 결국, 1901년 2월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톨스토이는 자기의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하려 했으나, 아내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가출했다. 그는 1910년 11월 7일 아스타포보 역에서 82세의 나이로 객사하여, 고향 야스나야 폴랴나에 묻혔다. 

체호프는 남러시아의 항구도시 타간로그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농노 출신의 보수적인 성격을 지닌 아버지로서 자식들을 가혹하게 길렀고, 식료잡화점을 경영하다가 파산해서, 모스크바로 야반도주했다. 체호프는 유머 잡지에 투고해 돈을 벌어 모스크바대 의학부를 1884년 졸업한 후 모스크바 근교에서 의료 활동을 하며 얻은 체험을 소재로 작품을 썼다. 1880년대 초는 러시아 문학의 전환기로서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 톨스토이를 계승할 우수한 신진작가를 기대하던 시기였다. 인생을 자연과학적이고 의학적인 방법론을 사용해서 이를 유물론적이고 무신론적으로 이해했다. 그는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듯 주변의 현실과 인간의 삶을 다양한 관점에서 철저히 관찰하고 조사 분석해서 모순으로 가득 찬 러시아 현실을 묘사했다. 또한, 그는 기존의 전통적 장르들을 패러디해 작품을 썼다. 그는 시베리아를 거쳐 1890년 사할린에 도착해서 사할린 섬의 강제수용소 상황을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사할린섬』을 썼다.

체호프는 1880년대에 톨스토이로부터 철학적 영향을 받았지만, 사할린 여행 이후부터 톨스토이주의와 그의 사상에서 벗어나 이를 비판했다. 그는 그 이듬해인 1891년에 발생한 기아로 고통당하는 농민들을 구제하는 대규모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892년에는 콜레라가 창궐하자 무료 진료 활동을 했다. 그는 폐결핵 병을 치료하기 위해 1899년 멜리호보에서 얄타로 이사했고, 1904년에 건강이 악화하자 아내와 함께 독일로 가서 요양 치료를 하다가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수도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끝으로 러시아 문학 이론과 사상 및 철학, 심리, 정치, 종교, 역사, 문화와 예술, 사랑, 젠더, 결혼과 이혼 등 다양한 주제를 연구한 자료로 쓴 이 책이 러시아 문학과 문화 및 예술에 대한 이해와 러시아인의 정체성 탐구 등에 조금이나마 유용하게 쓰이길 바란다. 독자가 이 책의 내용을 정확히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글에 텍스트로 사용한 작가의 작품을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영범 청주대·러시아문학

청주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과 학사 및 석사 과정을 수료하고,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노어노문학회 회장, 청주대학교 러시아어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 『애니메이션 러시아어』, 『파워중급러시아어』, 『러시아어 말하기와 듣기』(공저), 『러시아 문화와 예술』(공저), 『한-러 전환기 소설의 근대적 초상』(공저), 『쉽게 익히는 러시아어』(공저), 『러시아 문학과 사상』, 역서로 『러시아 제국의 한인들』(공역), 『대위의 딸』, 『인생론』, 『참회록』,『크로이처 소나타』, 『체호프 유머 단편집』, 그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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