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바람과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거문고 소리가 난다” … 울산 방어진 슬도
상태바
“갯바람과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거문고 소리가 난다” … 울산 방어진 슬도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2.10.01 2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류혜숙의 여행이야기] 울산 방어진 슬도

 

                                               소리체험관에서 본 동진방파제와 슬도.

오래전, 방어진 버스 터미널에 내리면 2층 정도의 높은 건물들이 번화가를 이루고 있었다. 거리에는 차려입은 젊은이들과 건달과 어부들이 활기차게 엉켜 있었고 경양식집의 반투명 유리 너머로는 연인들이 보였다. 가겟집들이 벅적하게 늘어선 상가길 모퉁이에는 바나나 빵을 파는 아저씨가 있었다. 바나나 모양의 틀에 반죽을 붓고 계란 하나를 깨어 넣고 노랗게 구워낸 빵. 그것 하나를 오물오물 삼키며 가까운 바다로 향했다. 그렇게 20대의 몇 년간 무시로 방어진을 찾았었다. 

 

                                 동진방파제에서 본 방어진. 앞쪽은 구 방파제인 서방파제.

바다로 가는 길은 쉬웠다. 상가 지나 INP조선소 담벼락을 따라 나아가면 곧 바다였다. 조선소 자리는 1929년 방어진에 세워졌던 ‘방어진 철공소’가 있던 자리다. 그곳을 근대적 의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조선소로 보는데, 본격적으로 엔진 제작을 통한 동력어선을 생산했기 때문이다. 방어진 철공소는 1930년대 말 200명 이상의 직공을 거느린 조선 최대의 조선소 중 하나로 성장해 지역 경제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이후 1960년에 청구조선공업사로 바뀌었다. INP중공업으로 바뀐 것은 1999년이다. 2007년에는 세광중공업으로 변경되어 명맥을 유지하다 2012년 파산했다. 지금 조선소 자리에는 대규모 오피스텔이 들어서 있다. 뒤로 넘어질 듯 고개를 젖혀야 꼭대기가 보인다. 감각은 길을 잃고 바다를 찾아 헤맨다. 세상에! 옛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땅끝마을 입구의 소리체험관과 슬도교의 고래.

위압적인 오피스텔 일대를 지나자 조금씩 눈에 익은 길이 나타난다. 수협 위판장 옆 건물이었을 게다. 그곳 1층에 창 넓은 다방이 있었다. 늙은 어부들이 정물처럼 앉아 있는 그곳에서 몇 시간이고 바다를 보곤 했었다. 두리번두리번 하지만 쉬이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바다가 느껴진다. 킁킁 날것들의 냄새가 난다. 방어진은 ‘방어(魴魚)가 많이 잡히는 나루’다. 울산 동부 최대의 어업 전진기지로 고려시대부터 왜적의 침입이 잦아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1921년에는 울산 최초로 전기가 공급됐다. 1923년에는 동해안 최초의 방파제가 들어섰다. 지금의 서방파제다. 나는 방어진항의 동쪽 끝 곶으로 향하고 있다. 거기에는 동진방파제가 있다. 
    

동진방파제와 슬도교가 이어져 있다. 외항의 테트라포트는 군데군데 색을 입었고 고래조형물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방어진항 동쪽 곶에서부터 동진방파제가 뻗어나간다. 그것은 앞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무인도인 슬도(瑟島)로 향한다. 섬은, 거문고처럼 구슬픈 소리를 낸다고 해서 슬도다. 방파제는 고래와 조개와 해초와 문어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외항의 거대한 테트라포트는 군데군데 색을 입었다. 커다란 고래 조형물이 하늘을 향해 로켓처럼 서있다.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 가운데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새끼 업은 고래’를 형상화했다. 방파제는 슬도교 다리로 이어진다. 기잉 기잉 다리가 소리를 낸다. 안전상의 문제로 펜스의 접합 부위를 용접하지 않은 듯하지만 꼭 일부러 바람 소리를 잡는 것 같기도 하다. 기잉 기잉, 기이한 바람 소리. 

 

슬도와 1958년에 설치한 슬도 등대. 슬도는 섬 전체가 구멍 뚫린 바위다. 파도가 구멍 속을 드나들 때마다 거문고 소리가 난다고 한다.
                                                         슬도명파를 만나는 자리.

슬도는 섬 전체가 구멍 뚫린 바위다. 그래서 어떤 이는 곰보섬이라 부르기도 한다. 구멍은 1백 20만 개다. 아무도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섬은 퇴적된 사암으로 구멍은 조개류 따위가 파고 들어가 살면서 생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파도가 구멍 속을 드나들 때마다 거문고 소리가 난단다. 그것을 ‘슬도명파(瑟島鳴波)’라 한다. 귀를 기울인다. 무작스러운 바람이 거문고 소리를 지운 걸까. 슬도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섬 한가운데에 1950년대에 세운 하얀 무인등대가 서 있다. 등대에서 음악 소리가 들린다. 거문고 소리다.   

 

                       슬도에서 다시 서쪽으로 뻗어나가는 방파제 끝에 빨간 등대가 자리한다.

섬에서부터 다시 방파제가 뻗어 나간다. 방어진항을 감싸듯, 서방파제를 향한다. 방파제 끝에는 방어와 고기잡이 하는 어부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빨간 등대가 있다. 내항의 석축 아래에는 낚시꾼들이 점점이 서 있다. 이따금 은빛 학꽁치가 파닥거리며 공중에 포물선을 그린다. 그들의 고요한 부동 너머로 공업도시 울산의 위용이 솟아 있다. 방어진항과 고층 아파트들이 잔뜩 들어서 있는 시가지, 그리고 우뚝 솟은 크레인들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커다란 배가 내항으로 들어선다. 낚싯줄이 하늘을 가르는 소리, 갈매기가 낚시꾼의 미끼통을 탐하는 소리, 그리고, 무언가 두르릉 하는 소리. 이것인가. 섬의 소리가. 아주 약간의 쇠 맛을 가진 현의 울림이 들린다. 이것이 슬도의 소리인가.   

 

                                      성끝마을에는 벽화골목이 조성되어 있다. 일명 향수바람길. 
                                   소리체험관 내부. 울산의 소리9경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동진방파제가 시작되는 곶의 나지막한 언덕은 ‘성끝마을’이다. 슬도에서 바라보면 파란 지붕들이 층층이 쌓인 작은 마을이다. 마을의 동북쪽 너머는 현재 대왕암 공원으로 옛날 조선시대에는 그 일대에 말을 키우는 목장이 있었다고 한다. 목장을 둘러싼 울타리를 마성(馬城)이라고 했는데, 울타리의 끝 부분이 바로 ‘성끝’이다. 성끝마을에는 벽화골목이 조성되어 있다. 일명 ‘향수바람길’로 섬끝슈퍼에서 시작해 200m 남짓 이어진다. 집들은 파스텔 색이다. 무성한 동백나무 궁륭이 입구인 집도 있고, 싱그러운 동백나무가 담인 집도 있다. 손바닥만 한 텃밭을 지키는 순둥이 개도 만나고, 파란 지붕 너머로 방어진 항도 보인다. 인적은 드물고, 빛은 많고, 바람은 잠잠하고, 골목은 곱다. 마을 입구의 하얀 건물은 소리체험관이다. 현대중공업의 엔진소리, 마골산의 숲 바람 소리, 주전해변의 몽돌 소리 그리고 슬도명파 등 울산의 ‘소리 9경’을 들어볼 수 있다. 내용은 소소하지만 전망이 멋지다. 슬도 바다가 한눈이다. 다섯 명의 청년들이 방파제 위를 걸어가고 있다. 어깨에 낚싯대를 멘, 씩씩한 출사다. 바다와 오후와 친구로 충만하다.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