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보면 음식이 보이고, 음식을 보면 역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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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면 음식이 보이고, 음식을 보면 역사가 보인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9.25 16: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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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으로 맛보는 조선음식사 | 주영하 지음 | 휴머니스트 | 280쪽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어떻게, 왜 먹었을까? 수백 년 전 그림을 살피자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삼시 세끼 먹고 마시고 취하고 요리하는 조선 사람들이 되살아난다. 만취해 비틀거리며 경복궁을 빠져나가는 왕세자의 선생님들과 남성 요리사 일색이었던 궁중 주방의 낯선 풍경, 그리고 날씨 좋은 날 소고기와 한잔 술로 야유회를 벌이는 사대부들. 또한 조선시대 어부들의 밥도둑 숭어찜 요리부터, 삼해주·감홍로·소국주와 같은 전통주, 그리고 ‘유사길(위스키)’ 한 잔에 곁들인 커틀릿처럼 생소하고도 매혹적이었을 음식까지 군침 도는 장면들도 빠질 수 없다. 

다양한 성격의 사료 중에서도 그림을 통해 조선의 음식문화를 읽어내는 이유와 그 의의는 무엇인가? 우선 과거의 음식문화를 밝히는 일의 어려움은 무엇보다도 사실성 파악에 있다. 35년이 넘도록 음식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다채로운 저술 활동을 선보여온 저자 주영하 교수의 말처럼 “요즘 우리가 먹는 배추가 100여 년 전의 요리책에 나오는 배추와 같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문헌의 내용이 실제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따져보고, 시차가 벌어진 현재와 얼마나 같고 다른지 견주는 작업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더군다나 전근대라는 시대적 특성상, 의존할 수 있는 사료는 종류와 양에 있어 근본적인 한계를 지닌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와 같이 조선을 대표하는 방대하고 충실한 기록에도 음식과 관련된 기사는 기대와 달리 소략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당대 식생활과 음식의 사실성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 ‘그림’ 자료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저자는 『그림으로 맛보는 조선음식사』에서 그림의 사료적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작가와 시기가 분명한 자료를 신중히 추리고, 왕실과 사대부들의 행사를 기록한 궁중 기록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신분의 일상적 풍경을 담은 풍속화를 두루 살펴 조선의 음식문화를 다채롭게 조망하고자 했다. 책을 읽는 독자가 그림을 꼼꼼하게 뜯어보는 저자의 시선을 쉽게 따라갈 수 있도록 배려한 편집 역시 이 책의 특징이다. 장의 초입에 회화의 전도를 널찍하게 싣고, 본문엔 글줄마다 설명하고 있는 부분의 그림을 확대해 긴밀하게 배치했다. 이로써 그림에 담긴 음식문화와 풍속 이야기를 읽어내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통시적인 관점으로 조선시대 음식문화의 변화상을 조명한다는 점이 가장 돋보인다. 이를 위해 서민, 궁중, 관리 등 주체, 혹은 상황이나 음식의 종류에 따른 차례가 아닌 16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시대순으로 나눠 총 4부로 구성했으며, 각 시대를 개설하는 머리글을 실었다. 또한 조선 전기인 16세기의 회화를 비롯해 시대상을 보여줄 수 있는 그림을 고루 안배하여 공백을 메우고 시대상을 더욱 촘촘하게 살폈다. 이로써 더욱 유기적이고 맥락 있는 ‘조선음식사’ 읽기가 가능해졌다.

1부 ‘새로운 왕조, 새로운 입맛’은 16세기부터 17세기 초반까지의 음식사를 다룬다. 불교를 숭상하여 육식을 기피했던 이전 고려 왕조와 달리, 태조를 위시한 조선 건국 세력은 고기와 술을 애호하여 술로 정치를 펼쳤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이러한 풍경은 『수운잡방』 등의 음식 문헌뿐만 아니라 「중묘조서연관사연도」, 「기영회도」 같은 그림에 생생하게 반영되어 있다. 2부 ‘전쟁과 대기근, 그 후의 밥상’은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후반까지 살피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잇따른 대기근은 조선 사회의 정치·경제뿐만 아니라 음식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 와중에도 영조와 청나라 사신의 연회에 오른 음식과 궁중에서 우유를 짜는 장면, 농민들이 벼를 수확하고 새참을 먹는 일상적 풍경까지 그림 기록이 두루 전한다. 

3부 ‘세도가의 사치, 백성들의 굶주림’에서 묘사하는 시기는 18세기 초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로, 한양을 중심으로 부유층이 형성되어 빈부격차가 심해지던 때다. 식생활의 풍요와 사치를 누리는 인물을 생동감 있게 담고 있는 「주사거배」, 「야연」부터 동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백성의 일상이 녹아 있는 「대쾌도」, 「어장」, 「생선 채소 장수」까지 다수의 그림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 4부 ‘이국과 근대와의 조우’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음식사를 보여준다. 근대적 조약을 잇달아 맺으며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본격적으로 세계 식품 체제 속에 편입되기 시작했고, 타자와의 접촉으로 ‘조선적인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이국의 음식이 등장하고 서양식 작법과 시선이 투영된 「한일통상조약체결기념연회도」, 「국수 누르는 모양」 같은 그림은 이러한 시대의 물결 속에서 탄생했다.

 

이 화첩에서 주목해야 하는 장면은 제2폭이다. 조선시대 어느 기록화에도 보이지 않는 ‘숙설소(熟設所)’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 이쯤에서 남성 요리사 일색인 그림의 묘사가 이상하다고 여길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부분의 사극에서는 여성 나인들이 음식을 만들지 않았던가? …… 이것은 전근대 왕실의 벼슬 체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근대 사람들은 남성이 공식적인 일을, 여성은 비공식적인 일을 맡아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궁중의 공식적인 직책 대부분은 남성들 차지였으며, 여성들은 단지 왕을 보조하는 일을 맡았을 뿐이다. 많은 사람이 조선시대 요리사 하면 대장금 같은 여성 나인만을 떠올리곤 한다. 「선묘조제재경수연도」에서 보이듯이 조선시대 왕실의 핵심 요리사는 남성이었다. ‘요리=여성’이라는 인식이 오늘날의 편견일 수 있다는 점을 이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 3장 ‘「선묘조제재경수연도」 102세 노모 경수연에 남성 궁중 요리사가 나선 이유’ 중에서(46~51쪽)

사실 왕실에서 금주령을 내린 이유는 오로지 멥쌀을 아끼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음한 사람들 간엔 싸움이 잦았다. 『혜원전신첩』의 「유곽쟁웅(遊廓爭雄)」이란 그림에는 색주가 문 앞 골목에서 술에 취한 두 사대부를 말리는 별감의 모습이 나온다. 신윤복은 「주사거배」에서 중노미의 시선을 빌려, 술 제조로 인한 사대부들의 곡물 낭비와 풍기 문란한 세태를 못마땅하게 바라본 것은 아닐까? - 12장 ‘「주사거배」 느슨해진 금주령, 그래도 찾아간 술집’ 중에서(159쪽)

식탁 위 길쭉한 나이프와 포크, 스푼이 놓여 있다. 이 외에도 흰색 도자기 주전자, 흰색 막대가 여러 개 들어 있는 그릇, 뚜껑이 덮인 육각형 그릇, 굽이 달린 흰색과 짙은 색의 잔 여러 점, 그리고 낮은 굽의 쟁반이 놓였다. 그림을 자세히 뜯어볼수록 여느 조선시대 회화에서 보기 힘든 이국적이고 낯선 조합이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도대체 무슨 일을 기념하기 위한 연회였을까? - 19장 ‘「한일통상조약체결기념연회도」 식탁 위의 서양 음식이 말하는 것’ 중에서(231쪽)

김준근의 화법은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와는 사뭇 다르다. 그림의 선이 유려하고 인물과 사물의 묘사가 분명하여 자못 숙련된 화가임이 틀림없어 보이지만, 18~19세기 중반의 풍속화 화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김준근은 당시 조선을 찾은 서양인들이 요구한 ‘가장 조선적인 모습’을 그려주었던 화가였던 것 같다. 이 때문에 김준근의 명성은 국내에서보다 오히려 서양인들 사이에 자자했던 모양이다. - 20장 ‘「국수 누르는 모양」 국수틀에 사람이 올라간 사연’ 중에서(242~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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