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환경 철학
상태바
동양의 환경 철학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2.09.25 13: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제21강_ 이승환 고려대 명예교수의 「동양의 환경 철학」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아홉 번째 시리즈 ‘자유와 이성’ 강연이 매주 토요일 서울의 네이버 스퀘어 종로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자기실현의 원리라고 할 수 있으며, 그간 인류가 걸어온 길은 자유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합리성의 증대는 자유의 신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섯 섹션 총 44강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고전 시대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자유 담론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고 미래 사회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고자 한다. 자유의 이념과 지향에 관한 동서양의 지적 자산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세 번째 섹션 ‘기술적 환경과 인간의 자유’ 제21강 이승환 명예교수(고려대 철학과)의 강연을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동양의 환경 철학


이승환 교수는 “생태주의적 반문명론”으로 재해석된 도가 사상, 그리고 마찬가지로 생태주의적 재해석을 입은 불교 연기론(緣起論)에 대하여 우선 검토한다. 생태주의적 관심에서, 특히 “『장자』를 재해석하려는 연구자들은 장자 사상의 핵심으로 알려진 천인합일(天人合一), 물아일체(物我一體), 만물제동(齊物皆同) 등의 표제어에서 근대 과학·기술 문명의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생태주의적 세계관”을 발굴코자 하는데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고사의 예와 같이 “환경 문제와는 별로 상관도 없는 고대의 텍스트를 끌어다가 신비하고 과장된 주장을 펴는 일은 문제 해결”에 외려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존재에 대한 보살핌이라는 윤리적 태도를 도출”하고 그런 “윤리적 태도의 실천이 인간과 비인간 모두의 공동 번영”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보는 연기론적 세계관 역시 “생태계 안에서 모든 존재가 차별 없이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종 평등주의’의 주장”에 치우친다면 “생태계의 먹이사슬은 끊어지고 종국에는 생태중심주의자들이 원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사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렇듯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도입된, 동양 철학과 친화적인 생태중심주의 흐름이 일극으로 치달릴 수 있는 적실성에 대한 우려가 존재하는 만큼, “극단적인 인간중심주의를 버리고 인간이 우주 대가정의 여러 자식 중의 하나임을 인식하도록 권유”하는 것과 함께 “극단적인 생태중심주의를 버리고 인간이 우주 대가정의 능력 있고 책임 있는 적장자로서 천·지를 도와 다른 존재를 살리는 일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는 유교의 공동체주의적 생태 윤리에 새삼 주목해볼 것을 말한다. 

 

지난 8월 27일, 이승환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자유와 이성>의 21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20세기 중후반에 들어, 날로 심각해지는 환경 문제에 직면하여 생태주의자들은 근대 과학·기술 문명이 전제로 하고 있는 인간관과 자연관 그리고 인간-자연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모색하기 위하여 도가와 불교 등으로 대변되는 동양 사상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심층생태주의자인 네스(Arne Naess)와 세션스(George Sessions)는 1984년에 생태철학의 핵심 강령으로 세 가지 원칙을 천명하였다. 1) 인간 외적 존재의 고유 가치에 대한 긍정, 2) 인간 외적 존재에 대한 (부정적) 간섭의 최소화, 3) 인간중심적 이데올로기의 전면적인 폐기. 심층생태주의(deep ecology)의 이러한 강령은 자연계 안의 모든 존재가 본래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생태중심적 평등성(biocentric equality)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러한 전제로부터 인간 외적 존재들에 대한 불간섭과 보살핌(care)이라는 실천 규범이 도출되게 된다. 심층생태주의가 채택하고 있는 이러한 원칙들은 도가 및 불교의 생태 사상과 상당한 수준의 친화력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가 그간 학계에서 지배적인 관점으로 유지되어왔다.

 

1. 도가 사상의 생태주의적 반문명론으로의 재해석

생태주의적 관심을 가진 지식인들에게 도가 사상은 일체의 인위적 행위 방식을 거부하고 자연과의 합일을 촉구하는 반문명론적 계시록으로 재해석되어왔다. 특히 『노자』ㆍ『장자』의 “무위ㆍ자연” 사상은 근대 과학·기술 문명의 폐해를 극복하고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자연과의 합일을 가능케 하는 양약으로 간주되었다. 프랭클린 앤드 마샬(Franklin & Marshall)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노스(John Noss) 교수는 도가 사상을 과학·기술 문명과 극단적인 대비의 각도에서 파악한다. 도가 사상이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자연의 모든 존재들을 평등한 시각에서 바라봄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추구하는 데 반해, 서구인들은 인간중심주의의 관점에 서서 자연을 정복하고 남획함으로써 심각한 환경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도가에서는 인위적 기술을 거부하고 자연친화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데 비해, 서구인들은 인위적 기술을 개발하여 자연을 훼손하고 환경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도가에 대한 이러한 생태철학적 평가는 정말 믿을 만한 것일까? 도가를 반문명론 또는 반기술주의적 사유 체계로 읽으려는 해석자들이 단골 메뉴처럼 인용하는 텍스트는 『장자』 「천지」 편에 나오는 용두레의 우화이다. 『장자』의 용두레 우화를 접하는 독자들은 항아리를 사용하여 물을 푸는 일이 용두레보다 더 친환경적이고 자연친화적이라는 생태주의자들의 독법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채 이 우화를 읽는다. 하지만, 항아리의 제작을 위해서는 용두레에 비해 훨씬 더 정교한 기술과 공정과 설비가 필요하며 나아가서 엄청난 양의 화목을 필요로 한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과연 항아리로 물을 푸는 일이 용두레에 비해 더 친환경적이고 자연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욱 중요하게, 과연 항아리 물 푸기는 인위가 아니라 자연에 속하는 일이고, 용두레 물 푸기는 인위적 기술로서 자연을 해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항아리야말로 제작 과정에서 더 많은 나무의 벌채를 요구함으로써, 용두레에 비해 훨씬 더 자연을 남획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인위적 기술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항아리가 용두레보다 더 친환경적이고 자연친화적인 물 푸기 방식이라고 여겨온 기존의 해석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생태주의적 관심에서 『장자』를 재해석하려는 연구자들은 장자 사상의 핵심으로 알려진 천인합일(天人合一), 물아일체(物我一體), 만물제동(齊物皆同) 등의 표제어에서 근대 과학·기술 문명의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생태주의적 세계관을 발굴해내고자 한다. 그들은 이러한 표제어에 “인간과 자연의 합일” “인간과 인간 외적 존재 간의 평등” “모든 존재를 차별 없이 관조하는 절대 자유의 경지”가 담겨 있다고 보고, ‘도’를 체득함으로써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환경 문제가 절로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도가 사상을 재조명하려는 해석자들은 『장자』 「양생주」 편에 나오는 포정해우(庖丁解牛)의 고사야말로 반생태적 기술을 거부하고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생태주의적 서사라고 주장한다. 생태주의적 해석자들은 장자가 ‘포정해우’의 우화를 통하여 자연을 타자화하는 도구적 기술을 비판하고, 자연의 결을 따르면서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생태주의적 기술을 예찬하였으며, 이러한 기술은 단순한 기술의 차원을 넘어 ‘예술’ 또는 ‘도’에 가까운 것이라고 설명한다.

생태주의적 해석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포정해우’ 고사에서 ‘욕망이 사라진 허정(虛靜)한 마음상태’ ‘일체의 인위와 의도가 사라진 자연스러운 몸동작’ ‘주체와 대상이 하나가 된 물아일체의 경지’ ‘예술의 경지로 승화된 춤사위 같은 칼놀림’ 등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제반 요소들이 풍기는 ‘자연스러움’의 이미지가 단박에 우리를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자연과 하나가 됨”, 그리고 “자연친화적이고 생태적인 기술”이라는 결론으로 안내한다.

하지만 ‘포정해우’의 서사가 풍기는 “자연스러움”이라는 이미지가 “생태주의”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은 엄밀한 논리적 추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호학적 연상 작용(semiological association process)을 통해서이다. 연상 작용이란 우리의 언어 구조 속에서 하나의 관념이 그것과 연관된 (또는 유사한) 다른 관념을 잇달아 불러일으키는 무의식 조어(造語) 과정을 말한다.

포정의 허정한 마음 상태가 탐욕으로 얼룩진 도구적 기술 문명에 대한 거부를 뜻하는가? 허정한 마음 상태란 한 가지 일에 몰입하여 일체의 잡념과 욕망이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동양 철학의 수양론에서 빈번하게 언급되는 주일무적(主一無適)과 전일집중(專一集中) 등이 이에 해당한다. 허정한 마음 상태는 ‘몰입’의 태도로서, 기술 문명 비판이나 자본주의적 욕망의 초월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다음으로, ‘물아일체’가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뜻하는가? ‘포정해우’의 고사에서 ‘물아일체’란 소를 해체하는 기술자가 해체 대상인 소와 하나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나가 되었다” 함은 해체 기술자가 소의 해부학적 구조와 관련된 지식을 완벽하게 갖추고서 수많은 연습을 거쳐, 마침내 아무런 실수나 주저함 없이 능란하게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아무리 능란하게 뼈와 뼈 사이를 가르고 힘줄과 힘줄 사이를 가른다 해도 그것은 죽은 소(즉 무생물)이지 살아 있는 유기체(즉 생물)가 아니다. 죽은 소를 해체하는 일에 무슨 “인간과 자연의 합일”이 있고 생태주의적 기술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포정해우’의 고사는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선 생태평등주의를 말하고 있지도 않다. ‘포정해우’의 고사에서는 “인간과 인간 외적 존재에 대한 평등한 고려”라는 생태중심적 태도 역시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소는 당연히 인간을 위해 도축당하는 식재료라는 생각이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포정은 그저 무의식적이고 능란한 솜씨로 칼날을 놀릴 따름이다. 어떻게 해서 이처럼 정서적으로 무감각하기 그지없는 도축 기술로부터 “인간과 자연의 합일” 그리고 “생태주의적 기술관”이라는 결론이 도출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환경 문제와는 별로 상관도 없는 고대의 텍스트를 끌어다가 신비하고 과장된 주장을 펴는 일은 문제 해결에 도움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들을 엉뚱한 방향으로 호도하는 더 큰 오류를 낳을 수 있다.

 

2. 불교 연기론(緣起論)의 생태주의적 재해석

심층생태론은 사유 구조에 있어 불교와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심층생태론이 강조하는 인간 외적 존재의 가치에 대한 긍정은 세계의 모든 존재가 동등하게 불성(佛性: Buddha nature)을 가지고 있다는 불교의 입장과 통한다. 또한 세계의 모든 존재들이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상호 연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생태론의 입장은 불교에서 설하는 무아설 및 연기설과도 합치한다. 자아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보는 불교의 무아설은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해서 일어나고 스러진다는 연기설에 근거하고 있다. 

이처럼 연기(inter-dependent co-origination)설에서는 모든 존재를 고정적 실체가 아니라 상호 의존적 관계망 속에서 인연에 의해 일어났다 스러지는 임시적 존재로 파악하기 때문에, 자아를 독립적이고 자족적 실체로 여기는 개체주의나 인간중심주의는 전도망상(顚倒妄想)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러한 연기적 세계관은 심층생태론에서 말하는 탈개체적, 탈인간중심적, 상호 연결적 자아관과 자연스럽게 조우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수행자가 자아의 공성(Sūnyatā) 및 연기적 세계관을 깨달음으로써 모든 존재를 나와 한 몸으로 여기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자비감이 솟게 된다고 본다. 이와 마찬가지로 심층생태론에서는 모든 존재에게 본래적 가치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존재에 대한 보살핌이라는 윤리적 태도를 도출해낸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태도의 실천이 인간과 비인간 모두의 공동 번영(mutual flourishing)으로 이어지게 되며, 이러한 공동 번영을 통해 지구가 안고 있는 환경 위기는 저절로 해결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간 근시안적 인간중심주의로 인한 경제 논리와 개발 지상주의가 생태계의 위기를 불러온 것은 사실이지만, 생태계의 보전을 위해 인간중심적 사고를 버리고 생태중심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생태계 안에서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축소함으로써 오히려 생태 문제에 대한 인간의 책무를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 이 같은 입장을 견지하는 심층생태주의에서는 우주 안에서 인간의 지위를 숙주에 기생하는 벼룩처럼 여기거나 다른 생태계에 해를 유발하는 암 덩어리처럼 간주하기도 한다. 이러한 입장은 생태계 안에서 인간의 역할과 책임까지도 무화시켜버리는 극단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윤리학계에서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는 입론 근거는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동물이 고유한 또는 본래적 가치를 가진 “삶의 주체(subject-of-a-life)”이기 때문에 권리를 가진다고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고(톰 레건), 다른 하나는 동물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sentient being)이기 때문에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리처드 라이더와 피터 싱어). 동물권의 정당화 근거에 대한 입장 차에도 불구하고 동물권의 보장과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국내외를 물론하고 날로 커져가는 중이다.

동물의 권리를 어느 선까지 인정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만약 일부 ‘종(種) 평등주의자’들이 주장하듯 동물에게도 인간과 동등한 수준의 ‘법적 인격체’로서의 지위를 부여한다면, 인간의 육식 행위는 당장 금지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개의 목에 줄을 매어 통제하는 행위도 동물의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 행위로 전락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극단적 입장이 우리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드는 일은, 도롱뇽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일도 개구리라는 동물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에 해당하므로 이를 금지시켜야 하게 된다. 만약 이런 식으로, 생태계 안에서 모든 존재가 차별 없이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종 평등주의’의 주장을 따른다면, 생태계의 먹이사슬은 끊어지고 종국에는 생태중심주의자들이 원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사태, 즉 생태계의 대붕괴가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3. 유교의 공동체주의적 생태 윤리

근대 이래 과도한 인간중심주의가 환경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환경 문제의 이해와 해결 또한 철저하게 인간의 지성에 의해 가능하며, 생태계를 보전하려는 노력 또한 인간과 자연의 균형 잡힌 조율을 통해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과도한 인간중심주의는 ‘약화된 인간중심주의’로 변모할 필요가 있으며, 과도한 생태중심주의 또한 ‘약화된 생태중심주의’로 바뀔 필요가 있다. 유학의 ‘공동체적 생태 윤리’가 지향하는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유학의 사유 체계에서 생태계는 아버지인 하늘[天]과 어머니인 땅[地]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자식들로 구성된 ‘우주 대가정’이다. 유학에서는 가정 안에서 부모와 자식의 역할이 다르듯이, 우주 대가정 안에서 천·지의 직분과 인간의 직분이 구분된다고 여긴다. 만약 생태중심주의에서처럼 인간과 다른 존재가 차별 없이 평등한 가치를 갖는다고 한다면,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역할의 구분이나 직분의 구별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생태계를 하나의 ‘우주 대가정’으로 간주하는 공동체주의의 모델에서는 구성원들의 고유한 역할 수행과 상호 협력을 통해서 공동체가 조화롭게 유지ㆍ보존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천·지의 직분과 인간의 직분을 구분하는 주자의 공동체주의적 생태관은 자칫하면 ‘인간중심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1차 자연’에 개입해서 합목적적으로 자연을 변형시키면서 진화해왔다. 과연 오랜 시간 동안 축적해온 진화의 성과를 던져버리고,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무화시켜버린 채 들판에서 짐승들과 더불어 소위 ‘평등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옳은 길일까? 주자는 이러한 심층생태주의(deep ecology) 또는 생태중심주의(eco-centrism)의 주장에 찬동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공동체적 생태관(community ecology)의 지지자로서 주자는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 비해 인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월등히 뛰어나며, 천·지를 도와서 만물을 화육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주자는 인간이 다른 존재와 더불어 무차별적으로 평등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모든 생명체들이 존중받아야 할 ‘본래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이러한 가치를 인식하고 존중해야 할 책임은 오로지 우주 대가정에서 가장 영특한 구성원인 인간의 도덕적ㆍ인지적ㆍ미학적 능력에로 귀결된다. 우주 대가정 안의 다른 어떤 존재도 인간을 대신할 만한 이러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천·지를 보조하여 만물을 자라나게 도와주는 ‘참찬화육(參贊化育)’의 능력은 오직 인간만이 간직한 고유한 능력이다. 

 

우주 대가정인 생태계를 보전하고 그 안에 속한 다양한 구성원[種]들의 다양성과 연속성을 유지하는 일은 생태공동체주의적인 ‘참여적 공진화(participatory co-evolution)’ 즉 ‘참찬화육(參贊化育)’의 노력에 의해 가능해지리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참여적 공진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 인간의 도덕적ㆍ인지적ㆍ미학적 능력과 책임 의식이다. 『중용』에서는 ‘참여적 공진화’의 실천적 과정을 “성기(成己)ㆍ성물(成物)”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타존재를 이루어주기[成物]’ 위해서는 타존재의 본성과 수요를 파악하여 각기 필요로 하는 요소를 지원해주어야 한다. 즉 ‘참여적 공진화’를 위해서 인간은 인간 이외 존재들의 본성에 대해 충분한 지식[知]을 확보해야만 한다. 이때 ‘타존재의 성취[成物]’를 위해 필요한 지식은 단순한 과학·기술적 지식이 아니라 도덕적인 의미까지 함께 담고 있는 지식이어야 한다. 단순한 과학·기술 지식은 가치중립성과 객관성으로 무장한 채 오직 인간이라는 소수의 종(種)만을 위하여 봉사하기 쉽다. 하지만 ‘참여적 공진화’를 위해 필요한 지식은 우주 대가정의 모든 구성원들을 고루 성취시켜줄 수 있는 도덕-과학적 지식이어야 한다.

주자의 공동체적 생태 윤리에 따르면, 문화적인 것(예를 들어 인간의 지식)은 자연적인 것(천·지의 생명 활동)과 서로 협력할 수 있어야 하며, 사회적인 것(예를 들어 인간의 제도)은 자연적인 것과 서로 조화하도록 운영되어야 한다. 자연재해를 관리할 수 있는 인간의 대처 능력 즉 과학 지식이 부족할 경우 생태계의 안정이 오히려 흔들리게 되고 나아가서는 생태계에 더 큰 재난과 손상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재해에 대처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하여 아직 남아 있는 온전한 자연으로 눈을 돌리고 그곳을 향하여 집중적인 수렵과 채취 그리고 남획을 자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단 자연재해뿐 아니라, 지배 계층의 과도한 수탈과 착취 역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피지배 계층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아직 남아 있는 온전한 자연으로 눈을 돌리게 만든다.

이로 볼 때 사회적인 것(정치ㆍ경제 제도)이 자연적인 것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대한 영향을 미치며, 문화적인 것(과학ㆍ도덕ㆍ지식) 역시 생태계에 상호 연관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자의 공동체적 생태관에 의하면, 인간에 의한 자연의 파괴를 막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가 제거되어야” 하며,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가 줄어들수록 인간의 자연에 대한 착취 역시 감소할 수 있다. 인간은 자연과 결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이 만든 사회적 제도나 문화적 성취가 생태 공동체에 직간접적으로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사회 제도가 ‘자연적인 것’에 알맞게 조정되고, ‘문화적인 것’이 생태계에 적합한 방식으로 운영될 때 비로소 ‘참여적 공진화’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4. 나가면서

오늘날 생태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가 인간이 자연을 무분별하게 남획하고 착취하려는 인간중심주의의 입장이고, 다른 하나가 인간을 생태계의 평등한 일원으로 간주하고 인간 종의 고유한 능력을 무장 해제시키려는 생태중심주의의 입장이다.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에서 인간중심주의의 관점이 자연 세계의 약탈과 남획을 개발과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였다면, 신비주의를 신봉하는 생태중심주의자들은 인간을 자연 세계의 평등한 일원으로 복속시킴으로써 진화를 통해 획득한 인간의 고유한 능력을 무장 해제시키려고 한다.

인간중심주의와 생태중심주의는 서로 너무나 반대 방향으로 치달린다. 하나는 인간이 계속 생태계에 대한 성공적인 약탈자로 남기를 원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이성과 도덕적 능력을 버리고 새나 짐승과 함께 뒹굴기를 원하는 입장이다. 주자는 이 양극단의 중간에 선다. 주자는 우리에게 극단적인 인간중심주의를 버리고 인간이 우주 대가정의 여러 자식 중의 하나임을 인식하도록 권유하는 한편, 극단적인 생태중심주의를 버리고 인간이 우주 대가정의 능력 있고 책임 있는 적장자로서 천·지를 도와 다른 존재를 살리는 일에 동참할 것을 권유한다. 인간의 지적 능력, 단순히 과학·기술적 지식이 아닌 도덕-과학적 지식은 이러한 공진화의 가능성을 더욱 증진시킬 수 있다. 『중용』에서 ‘타존재를 이루어주는 일[成物]’을 인간의 지성적 능력[知]과 연관시킨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우주 대가정 안에서 참여적 공진화의 주체로 나설 것을 제안하는 유학의 공동체적 생태 윤리는 극단적으로 치닫는 두 노선에 비해 한결 지속가능한 미래를 보장해줄 것으로 보인다.


강연 바로보기: [열린연단]_ 동양의 환경 철학 (이승환 고려대 명예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