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이성이 아닌 신앙에 기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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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이성이 아닌 신앙에 기초한다
  • 이태하 세종대·철학
  • 승인 2022.09.25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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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에게 듣는다_ 『흄의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입문』 (앤드류 파일 지음, 이태하 옮김, 서광사, 248쪽, 2022.06)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는 흄이 거의 일생을 두고 집필했으며 임종 직전까지도 수정을 했기에 결국 사후에 출간된 유작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흄의 저작 중 가장 논리적으로 정교하고 깊이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흄은 우리나라 철학계에 칸트의 길을 예비한 회의론자 정도로 알려져 있으며, 그가 언급되는 것도 주로 인식론 분야나 윤리학 분야였다. 그러나 흄이 가장 관심을 갖고 주력했던 연구 분야는 종교였다. 이는 흄뿐이 아니라 영국경험론의 앞선 선배들, 즉 로크나 버클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살았던 17~8세기 유럽의 시대적 배경을 돌아보면 그들이 철학적 사유의 주제가 종교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드러난다. 

17세기의 전반은 종교개혁으로 인해 발단이 된 30년 전쟁(1618년~1648년)으로 얼룩졌다. 16세기 “오직 성서로, 오직 믿음으로”를 기치로 내걸고 일어난 종교개혁은 뜻하지 않게도 무엇을 믿느냐는 교리 논쟁을 유발하게 되었으며, 이는 안타깝게도 800여만 명이 죽고 유럽이 황폐화되는 참혹한 전쟁으로 이어졌다. 물론 그 배후에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유가 깔려있었지만 전면에 드러난 것은 교리적인 이유였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인류의 공존과 평화를 추구해야 할 종교가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주역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17세기 지성인들이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일차적 과제는 종교분쟁이었다. 이 종교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지성인들이 모색한 것이 바로 최소 교리를 주장하는 이신론(deism)이었다. 신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였음은 이성과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명확한 사실이며, 신은 창조 시에 물질인 세계에는 자연의 법칙을, 영적 존재인 인간의 마음에는 도덕의 법칙을 심어 놓았기에 세계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운행하고, 인간은 도덕법칙, 즉 양심대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 이신론의 교리인 것이다. 이신론의 신(Deity)은 세계를 창조한 이후에 세계의 운행에 관여하지 않기에 인간의 종교적 제의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며, 신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유일한 종교적 실천은 창조 시 인간의 영혼에 각인된 양심대로 사는 것이다. 이신론은 종교적 믿음의 근거를 신의 계시에 두는 계시종교(revealed religion)와는 달리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토대를 둔 인류의 보편적이며 원초적인 믿음이라는 점에서 자연종교(natural religion)라고 부른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중반까지 유럽은 한마디로 이신론, 즉 자연종교의 시대였다. 당시 지성인들 사이에는 계시종교인 기독교가 신이 세계를 창조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인간사에 관여한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전통적인 유신론을 믿는 한, 기독교는 성직자의 부패를 막을 수 없고, 교리 해석으로 빚어지는 종교적 분쟁을 막을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있었다. 구교인 가톨릭의 종교적인 억압과 부패를 경험했던 유럽의 지식인들은 종교개혁이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 기대했으나 기대와는 달리 교리 논쟁으로 인한 종교적 분쟁을 몰고 온 것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또한 르네상스로부터 시작되어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눈부신 성과를 보이기 시작한 자연과학은 섭리와 기적을 통해 자연의 운행과 인간의 삶에 직접 개입한다고 보는 기독교의 세계관과 양립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기독교로부터 마음을 돌려 무신론으로 가기에는 여전히 기독교가 미치는 힘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것이 바로 이 세계를 창조한 신의 존재를 믿고 양심에 따라 사는 것이 곧 신의 뜻을 따르는 삶이라고 믿는 자연종교였던 것이다.  

흄은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를 통해 신의 존재와 본성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 간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과 경험만으로는 신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 같은 결론은 최소 교리의 자연종교(또는 이신론) 역시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이성이 아닌 신앙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회의론자인 필로는 마지막 진술에서 인간 이성의 한계를 올바로 깨달은 사람은 신에게 계시를 구하게 된다고 말하며, 철학적 희의론자가 되는 것은 건전하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나가는 첫걸음이자 가장 중요한 과정이라고 말한다. 필로의 이 마지막 말은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에서 “기독교는 이성이 아닌 신앙(즉 계시)에 기초를 두고 있다”라는 흄의 말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많은 연구자가 흄을 무신론자이며 반종교론자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흄이 무신론자이며 반종교론자라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연구자가 제시하는 근거는 주로 흄의 서간들이나 역사서인 『영국사』, 최초의 비교종교학 저술인 『종교의 자연사』와 같은 저술에 들어있는 종교의 역기능에 관한 언급들이다. 그러나 흄의 서간은 학술적 견해가 아닌 사적인 의견을 담고 있으며, 『영국사』나 『종교의 자연사』는 기성 종교의 역기능에 대한 언급일 뿐이다. 게다가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는 대화체라는 점에서 흄을 무신론자나 반종교론자로 간주할 어떤 직접적인 논거도 없다. 독자들은 자신의 입장에 따라 이들 흄의 원전에서 유신론이나 무신론, 또는 계시종교나 자연종교 그리고 반종교론의 논거를 단편적으로 취해왔을 뿐이다.  

예전에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를 읽으며 이 책보다 더 깊이 있는 종교철학 저술은 더 이상 나올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해. 이 책이야말로 종교철학의 완결판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흄의 대표작이 무어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인간 본성에 관한 연구』나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진정한 흄의 대표작은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라고 생각한다. 흄의 인식론 분야의 저술은 이미 낡은 이론이 되었지만, 오늘날 현대인의 상당수가 유신론이 아닌 이신론을 믿는 자연종교론자라는 점에서 이 책은 여전히 우리에게 생각해 볼 거리를 제공해주는 명저이기 때문이다.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는 철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나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평소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신과 종교의 문제에 고민했던 사람들에게는 유익한 사유의 길잡이가 되리라 생각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회의론자인 필로, 경험론자인 클레안테스, 신앙주의자인 데미아의 대화를 곁에서 엿듣고 있는 느낌이 들며, 이들의 대담에 끼어들고 싶은 마음까지도 생겨난다. 이번에 출간한 『흄의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입문(Hume's Dialogues Concerning Natural Religion』이라는 해설서는 영국의 흄 연구자인 앤드류 파일(Andrew Pyle)이 쓴 것으로 다른 어떤 해설서보다 자세하며 논리적으로 명쾌하다. 이 해설서는 거의 원전의 절반에 해당하는 원전을 인용하며 자세히 해설하고 있어 원전을 읽지 않은 독자라도 이 책을 읽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다. 역자가 읽어본 다수의 해설서 중에 단연 최고의 해설서라고 생각한다. 사실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그러기에 먼저 이 해설서를 일독한다면 원전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태하 세종대·철학

서강대학교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세인트루이스대학교 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세종대학교 대양휴머니티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역서로는 『성서를 통해 본 기독교의 이치』(역서), 『근대영국철학에서 종교의 문제』, 『종교의 미래: 반종교와 무신론을 넘어서』,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역서), 『다윈주의시대의 윤리: 이론과 적용』, 『종교의 자연사』(역서), 『기적에 관하여』(편역서), 『다윈주의자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가』(역서), 『종교적 믿음에 관한 몇 가지 철학적 반성』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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