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탐구 … 중국과 한국 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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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탐구 … 중국과 한국 ⑮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2.09.25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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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

중국은 빼어난 인물뿐만 아니라 역사 전체가 대단한 관심사이고, 반드시 알아야 했다. 이것이 필수의 공부였다. 중국사를 공부하다가 의문을 가지고 자기 관점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이것은 자발적 탐구였다. 자발적 탐구는 새로운 역사관 정립에 이르렀다. 

중국사 공부는 물론 탐구를 한 성과도 너무 많아 목록 작성도 어렵다. 좋은 본보기를 하나만 들기로 하고,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의 <청성잡기>(靑城雜記)를 선택한다. 그 책 도처에 중국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한 자취가 남아 있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 몇 가지만 긴요한 내용을 간추려 옮긴다.

같은 하늘 아래에 살고 있지만 사는 땅이 다르고, 같은 땅에 살지만 사는 사람이 다르고, 사람은 같지만 사는 시대가 다르다. 모습과 언어가 다르고 복식(服食)과 습성이 달라, 중국의 오행(五行)으로 다스릴 수 없고 오성(五性)으로 거느릴 수 없고, 오례(五禮)로 가르칠 수 없고 오륜(五倫)으로 바르게 인도할 수가 없음이 분명하다.

중국 중심주의 역사관의 잘못을 이렇게 나무랐다.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말고, 상대적인 관점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차등론의 허위를 버리고 대등론의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고 풀이하면, 더욱 빛나는 견해이다.  

역사책에서 천하의 호구(戶口)가 그 왕조에서 최고에 달했다고 기록되면, 번번이 난리가 뒤따랐다. 송나라 휘종(徽宗) 당시 호구 수가 아주 많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엄청난 난리가 일어나, 중국과 이적(夷狄)의 위치가 역전되었다. 정강(靖康)의 변란으로 왕족이나 사족이 금나라 오랑캐에게 잡혀가 노비가 되었다. 한 사람당 한 달에 다섯 말을 주고 스스로 찧어 먹게 했다. 한 해에 삼 다섯 다발씩 주고 직접 길쌈해 옷을 해 입으라고 했다. 길쌈할 줄 모르는 남자는 일 년 내내 알몸으로 지냈다. 오랑캐가 간혹 불쌍히 여겨 불을 지피게 하면, 얼었던 살가죽이 떨어져 나갔다.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어찌 중국과 이적의 차별이 있겠는가. 주(周)나라는 그래도 명분과 의리로 배척하던 이적을, 양한(兩漢) 때는 전적으로 무력만 사용해 오랑캐로 대하고 짐승으로 보아 반드시 섬멸한 뒤에야 그만두려고 했다. 오랑캐도 중국을 원수로 보고 대대로 이를 갈면서 반드시 한번 보복을 하려고 했는데, 중국이 스스로 되돌아보는 것은 도리어 그쪽보다 못했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고 했듯이, 번영이 극도에 이르면 몰락의 길에 들어선다. 지나치게 늘어난 자만심이나 낭비가 자기를 해치기 때문이다. 이런 원리를 북송(北宋)에서 확인했다. 북송이 중국 역사의 절정을 보여주면서 허점투성이일 때, 북방 민족의 금(金)나라가 쳐서 멸망시킨 사건이 정강(靖康)의 변란이다. 그때 잡혀간 왕족이나 사족이 어떤 고생을 했는지 위의 글이 잘 말해주었다. 무능한 남자는 알몸으로 지내야 했다는 기막힌 사정은, 상하ㆍ남녀의 차등이 무너지는 것이 당연하고, 길쌈하는 능력을 가진 하층 여성이 진정으로 위대한 줄 알도록 한다. 총평을 달아, 한나라 이래로 중국이 오랑캐를 무력으로 짓밟으면서 짐승처럼 여기다가, 반격을 당한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중국은 잘못한 줄 모르고 아직까지 반성하지 않는다.

청나라 섭정왕(攝政王)이 이자성(李自成)을 무찔러 연경(燕京)을 접수하고 황극전(皇極殿)에 들어가, 투서(投書)인 듯한 작은 편지를 주웠다. 거기 써 있기를, “삼가 문팔고(文八股)는 두 번 절하고 만리강산(萬里江山)을 바칩니다”고 했다. 아마도 명나라의 유신(遺臣)이 과문(科文) 탓에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을 무척 애통하게 여겨, 그런 글을 지은 것 같다.

“섭정왕”은 청나라 태조의 아들 다이곤(多爾袞)이다. 청나라 군대를 지휘했으면서 왕이 되지 않고 어린 왕을 보좌해 섭정왕이라고 했다. “이자성”은 농민반란의 주동자이며, 명나라를 유린해 무너지게 했다. 청나라 군대가 이자성을 치고 중국을 차지했다. “문팔고”는 과거시험에서 요구하는 글 ‘팔고문’(八股文)을 사람의 성명처럼 고쳐 적은 말이다. 그 글이 내용은 공허하고 형식만 야단스럽게 차려, 명나라가 망하게 했다. 이에 대한 고발을 기발한 방식으로 했다. 명나라 대신 중국을 차지한 청나라도 그 길을 따른 것은 말하지 않았다.

효종(孝宗)은 10년 동안 심양(瀋陽)에서 생활했으며, 청나라가 북경을 함락하고 나서야 귀국이 허락되었다. 그때 산동(山東) 출신 왕봉강(王鳳崗)ㆍ왕문상(王文祥)ㆍ풍삼사(馮三仕)ㆍ유허롱(柳許弄)ㆍ왕미승(王美承), 대동(大同) 출신 유자성(劉自成)ㆍ배성삼(裴成三), 항주(杭州) 출신 황공(黃功) 등 여덟 사람이 효종을 수행해 우리나라로 왔다. 효종은 이들을 본궁(本宮) 곁에 살게 하면서 벼슬을 주려고 했으나, 우리나라에서 벼슬하지 않고 명나라가 다시 회복될 때를 기다렸다가 돌아가려고 했다. 효종도 억지로 일을 시키지 않고, 관청에서 생활용품을 받아쓰게 했다. 그 뒤 이들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켰는데, 나중에는 모두 서민이 되었다.  

청나라에 잡혀 있던 효종을 수행해 조선으로 온 중국 선비 여덟은 명나라가 다시 일어서기만 바라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무능력자였다. 망명지를 위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밥이나 축냈다. 명나라가 무너져 중국이 한물간 이유를 알 수 있게 했다. 인용한 글 다음 대목에서는, 중국에서 온 역대 망명자의 위세가 차츰 하강하고 기여한 바가 없어진 사실을 들고, 그 이유가 무엇인가 물었다. 

그 물음에 대답하자. 중국인이 절정을 넘어서자 단계씩 어리석어졌다고 하면 절반만 맞는 대답이다. 처음에는 많이 모자라던 한국인이 분발해 시대마다 더욱 슬기로워져, 중국인과의 격차가 없어지다가 역전되었다고 하는 것이 정답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성대중보다 훨씬 더 나아가야 한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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