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차 세계 기호학 학술대회 참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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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차 세계 기호학 학술대회 참관기
  • 김성도 고려대 언어학과 교수
  • 승인 2022.09.24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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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참관기]

 

제15차 IASS/AIS 세계대회, 그리스 테살로니카 – 개막 행사. 사진 출처=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Semiotic Studies - Home | Facebook

제 15차 세계 기호학 학술대회가 2022년 8월30일부터 9월3일까지 그리스 마케도니아 지방에 소재하는 2,500년의 유서 깊은 역사를 갖고 있는 고도(古都) 테살로니카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대회는 전 세계 80여 개국에서 1천 명에 가까운 인원이 참석했고 700편이 넘는 논문들이 발표된 것을 비롯해, 양과 질 차원 모두에서 큰 학술적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 기호학회(IASS=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Semiotic Studies)는 1969년,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들이라 할 수 있는, 구조주의 인류학의 창시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소쉬르 이후 20세기 최고의 언어학자로 손꼽히는 로만 야콥슨,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와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뜻을 모아 창립했다. 초대 회장은 프랑스 언어학계의 태두인 에밀 벵베니스트가 맡았고, 초대 사무총장직은 이탈리아가 배출한 세계적 기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가 수행했다.  이처럼 20세기 지성사에서 한 획을 그은 출중한 인물들이 기울인 노력이 학회의 밑거름이 되어 제도적 기틀을 마련한 결과, 20세기 세계 인문학계의 수많은 국제학회들 가운데서도 특별한 위상과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본 학회에서 1년에 6회 발간하는 학술지 ‘세미오티카’(Semiotica)는 A&HCI와 SSCI를 비롯한 주요 국제학술 색인에 등재된 것은 물론, 전 세계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에서 발간되는 수천 종의 학술지에 대한 평가에서 최상위 10%에 속한다는 점에서 인문계열 분야에서 최고의 학술적 권위를 자랑하고 있다. 

세계 기호학회 학술대회는 제 1차 세계 대회를 밀라노에서 개최한 이후로, 초기에는 5년 주기로 유럽과 북남미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개최되다가 중반기부터는 2~3년마다 열리며 국적, 세대, 사조를 초월해, 기호학을 연구하는 모든 학자들에게 학술 경연의 마당을 제공하는 명실상부한 기호학자들의 올림픽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2014년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개최된 제 11차 학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2019년 제 14차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회에서 재신임을 받아 5년 기간의 두 번째 임기를 맡고 있으며, 앞서 언급한 ‘세미오티카’의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어, 1994년 미국의 버클리 대학에서 개최된 제 5차 세계기호학 학술대회 참석을 시작으로 이번 학술대회까지 10여 차례 참석한 바 있다.

 

                              세계기호학회 회장 Paul Cobley 박사의 개막식 선언.  사진=필자 제공

이번 15차 세계 기호학회 학술대회는 대주제로서, “생명 세계에서의 기호학”(Semiotics in the lifeworld)을 설정하여, 인류세와 기후 변화와 같은 자연환경의 생태학적 변동에 직면한 21세기 현 문명에서 기호학이 제시할 수 있는 해법을 마련하기 위한 학술적 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기호학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에 대한 치열한 성찰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기존의 세계 기호학계의 양분화된 두 흐름, 즉 인간의 문화와 사회의 커뮤니케이션과 의미 작용 현상을 연구의 중심부에 두었던 소쉬르 기호학 계열의 구조 기호학과, 퍼스의 자연주의와 프래그매티시즘(pragmaticism)의 영감을 받아, 북미와 북유럽의 기호학자들이 지난 30년 동안 주도해왔던, 생명과 생태 중심의 자연 기호학의 이분법을 극복하려는 매우 중요한 인식론적 방법론적 혁신과 새로운 방향설정을 함의한다. 그만큼, 이제 세계 기호학계에서는 기호학의 영역과 연구대상과 관련된 순수 이론적이거나 사변적인 논의를 하는 데 공력을 쓸 여유가 없을 정도로, 인류세 시대의 생태학적 위기에 직면해, 상이한 학파의 이론적 논쟁을 계속하기보다는, 심각한 현재의 생태위기 상황에 대한 기호학적 비전 및 진단, 아울러 구체적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할 계제가 되었다는 긴박한 상황 인식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2020년 초 전 세계 곳곳에서 거의 동시에 발발한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과 그로 인한 현대 과학기술 문명의 한계에 대한 인식을 통해, 이번 학술대회에 모인 몇몇 석학 기호학자들은, 이 같은 전 지구적 위기 상황을 되레 기호학의 외연 확장을 도모해 볼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역발상을 제시하였다. 예컨대 프랑스의 심리기호학의 대가인 이반 다로-해리스 교수는 자신의 수십 년 동안의 임상 체험에 기초해 팬데믹 기간 동안 급증한 프랑스 청소년들의 자살에 대한 기호학적 예방의 구체적 방안과 효과를 학술적으로 입증하는 논문을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간단히 말해, 자살 위험에 처한 청소년들의 공통점은 삶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연구를 추구하는 기호학의 시각에서 보면 비기호적 세계라고 규정할 수 있고, 이들을 기호학적 의미의 세계로 다시 불러오기 위한 처방을 마련함으로써 기호학이 사회병리 현상의 해결에 일조할 수 있다는 설득력 높은 주장이었다. 

 

이 같은 문제 인식을 반영해 마련된, 특별 세션, “팬데믹의 공공계에서 나타난 삶과 죽음의 기호들”에서는 브라질과 그리스의 사례를 중심으로 팬데믹의 시각적 표상과 그것의 정치적 함의를 읽어내려는 8편의 논문이 발표되었으며, 이 세션에서 필자는 Covid-19의 서사 구조에 대한 기호학적 독법을 제시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Covid-19와 관련해 마련된 또 다른 흥미로운 세션은, Covid-19 봉쇄 기간 동안 나타난 정서적 성적 관계의 기호학적 설명을 주로 중남미의 다양한 구체적 사례를 중심으로 발표된 논문들이었다. 인간의 내밀한 정서와 은밀한 성(sexuality)과 관련된 이 같은 민감한 주제는 국내 학계에서는 여전히 다루기가 어렵거나 주저된다는 점에서 이 같은 시의적절한 주제를 다룰 수 있는 남미와 유럽 기호학자들의 학문적 개방성과 자유분방함이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그렇지만 학문적 보수성과 개방성의 틀을 벗어나, 완전 봉쇄(lockdown)라는 극단적 상황에 놓인 인간들이 밀폐된 근접성의 공간에서 경험하는 감정과 정서의 관계, 더 나아가, 성적 관계에 대한 학술적 논의는 결코 흥밋거리로 치부될 수 없는 인간학적 차원에서 본질적 의미를 내포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생명 세계에 대한 기호학적 관심의 부상을 읽어낼 수 있는 다수의 세션들이 마련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인간과 동물의 친밀성에 대한 기호학적 원근법’과 같은 세션으로서, 이 세션에서 발표한 학자들은, 상이한 종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에 대해 기호학적 시각에서 치열하게 성찰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동물 다큐멘터리를 시각자료로 제시하며, 인간과 문어 사이에 형성될 수 있는 친밀성에 대한 기호학적 시각은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보였다. 

물론,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생명과 환경과 관련된 시의성 높은 주제뿐만 아니라, 기호학 본령에 속하는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는 약 30여 개의 세부 주제 세션들도 마련되었다. 예술과 문화, 물질문화, 음식과 요리, 건축, 도시 공간, 정치, 지식의 형식, 언어와 교육, 공연 예술, 문학, 번역과 텍스트의 횡단성, 이미지와 시각성, 마케팅과 브랜딩, 디자인, 음악, 박물관 및 예술관, 대중 장르, 페미니즘, 디지털 실천과 공간적 실천, 신체적 실천들, 이민자들의 서사, 인지과학과 AI, 생명기호학 등의 다채로운 세션들을 손꼽을 수 있다. 특히,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패션 기호학에 대한 기호학자들 및 관련 분야 연구자들의 관심을 반영하듯, 패션과 라이프 스타일을 다루는 10여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으며, 세계 패션기호학회의 창립을 선언하기도 했다.

 

                                      개막식 기조발제의 사회를 보고 있는 필자  사진=필자 제공

이밖에도, 21세기 현대 문화에서 상징의 새로운 의미 세계를 심층 분석하려는 세션이 마련되어, 현대 사회에서 디자인, 예술, 의례 등이 갖는 상징성에 대한 심층적 해석을 시도했으며 이 세션에서 필자는, 대통령 집무실이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이전한 새로운 정부의 정치적 행위가 갖는 의의를 공간 기호학의 시각에서 읽어내려는 논문을 발표해,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기호학자들로부터 집중적 질문을 받아 관심을 끌었다. 또한 세계 기호학계에서 우수한 논문을 꾸준하게 발표해온 한국의 대표적 기호학자인 이윤희 교수(한국외국어대)가 한반도 최남단에 소재하는 이어도의 시각 자료와 담화를 소재로 삼아 지정학과 기호학의 접목 가능성을 시사하며 ‘장소의 체험과 서사적 상상계’를 다룬 독특한 논문도 많은 학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이밖에도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한류에 대한 세계적 관심을 실감나게 할 정도로, 한류 문화 텍스트에 대한 유럽 및 남미 기호학자들의 심층적 분석 논문들이 발표되었다는 점에서, 이제 한류가 문화 현상에서 기호학을 비롯한 전 세계의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학술적 관심과 연구의 장으로 본격적으로 들어왔다는 점을 일러주고 있다.

학제적 성격이 강한 기호학의 본질을 반영하듯, 다른 학제적 방법론과의 연대와 합류 가능성에 대한 인식론적 논의의 장도 마련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세션은 현재 세계 인문학과 사회과학계에서 초학제적 방법론으로서 큰 호응을 얻고 있는 프랑스의 과학 사회학자 브루노 라투르 (Bruno Latour)의 행위자 기반 이론(Actor Network Theory)과 기호학을 사상사의 계보학적 인식론적 관점에서 조망하는 다수의 수준 높은 논문들 역시, 이번 학술대회의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끝으로,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참여 학자들의 숫자와 학술적 수준 두 차원 모두에서, 기존의 기호학 헤게모니를 갖고 있던 프랑스로부터 발군의 논문들을 가장 많이 발표한 이탈리아 기호학계로 무게 중심이 이동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타계한 움베르토 에코 선생의 학문적 아성에서 비롯된 훌륭한 유산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쉽게도 이번 세계 학술대회에서 동아시아 학자들의 참여 숫자는 예년에 비해 저조했는데, 그 이유는 중국학자들의 해외 출국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년 2021년 필자가 주도해서 창립한 세계아시아기호학회는 이번 학술대회 총회에서 정식으로 추인되었고, 이제 본격적 활동을 통해 아시아기호학의 도약을 위해 시동을 걸었다. 참고로, 세계아시아기호학회는 한, 중, 일, 인도, 이란, 터키 등을 비롯해 총 12개국의 회원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0월 14~15일 양일간 고려대에서 제 1회 세계아시아기호학회를 개최해, 총 24편의 논문이 발표될 예정이다. 


김성도 고려대 언어학과 교수·세계아시아기호학회 회장

고려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10대학에서 언어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고려대 언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기호학, 문자학, 언어학사, 사회언어학, 매체 언어학 등을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로고스에서 뮈토스까지』,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 읽기』, 『기호, 리듬, 우주』 등이 있고, 『구조에서 감성으로』, 『생태복원의 인문학적 상상력』, 『언어인간학』, 『도시인간학』, 옮긴 책으로 『그라마톨로지』, 『소쉬르의 마지막 강의』, 『의미에 관하여』, 『퍼스의 기호사상』 『기호학과 언어철학』 등이 있다. 1996년 한국출판대상(번역부문), 1994년 세계 기호학회 학술지 최우수 논문상(Mouton d’Or)을 수상한 바 있다. 한국기호학회 회장과 한국영상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세계기호학회 부회장과 세계아시아기호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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