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통 음식점과 40년 된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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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통 음식점과 40년 된 건축물
  •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학교·언어학
  • 승인 2022.09.19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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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형 칼럼]

서울역에서 멀지 않은 남산 기슭에 40년 된 호텔 하나가 서 있다. 1983년에 문을 연 밀레니엄 힐튼 서울 호텔이다. 이는 건축계에서 건축사적, 예술적 가치를 높이 사는 근대 건축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호텔은 곧 사라질 수도 있다고 한다. 한 자산운용사에서 이 호텔 건물을 사들여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 건물을 짓는다는 것이다. 건축계를 중심으로 반발이 일어나고 있지만 오직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의 위력 앞에서는 안타깝게도 속수무책인 듯하다.

물론 이 사안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이 호텔이 한양 도성의 경관이나 남산 조망을 고려하지 않고 도성 바로 앞을 깎아 내며 지은 건물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참고: <한겨레> 인터넷판 2022. 6. 24. “노형석의 시사 문화재 - 남산 가린 ‘힐튼호텔’을 보존하자고?”) 하지만 남산을 가린 건물이 이곳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울 구도심은 이미 거대한 빌딩 숲이 되어 버렸고, 그중에는 이 22층짜리 호텔보다 높이 솟은 건물들도 수없이 많다. 이제는 오히려 일반 대중들이 서울역 부근에서 남산과 서울 성곽을 한눈에 제대로 조망할 수 있는 장소가 그나마 이곳, 밀레니엄 힐튼 호텔 말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이제 와서 유독 이 오래된 호텔 건물만을 문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철거를 반대하는 이 호텔에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선 여러 건축가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밀레니엄 힐튼 서울 호텔은 모더니즘 양식을 한국에 선구적으로 도입한 작품으로서 건축학적으로 뛰어난 가치를 지닌 곳이다. 두 팔을 넉넉히 벌려 남산을 감싸 안는 듯한 외관, 준공 당시에는 한국 내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통유리 외벽, 미려하게 설계한 아트리움, 남산이 훤히 바라다보이는 호텔 출입구와 객실 등은 건축을 잘 모르는 사람의 눈에도 무척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1980년대 이후 역사적으로 굵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던 장소이기도 하다. 1997년 말 한국 사회를 뒤흔든 IMF 구제금융 협상이 바로 이 호텔에서 타결됐고, 역대 대통령 후보들을 비롯한 여러 거물급 정치인들도 이곳에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정치적 결단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만큼 이 호텔은 ‘40년 전통’을 품은 건축사적 역작이자 한국 헌정사의 주요 무대 가운데 하나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의 역사적 가치까지는 충분히 쌓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남다른 의미를 지닌 건축물로 자리매김했다는 점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건축물이라면 되도록 철거하기보다 보존하는 데 중점을 두고 간직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다. 설령 자본의 흐름에 따라 소유주가 바뀐다 하더라도 지난 40년 동안 역사적 의미를 켜켜이 쌓아 온 이 모더니즘 건축의 원형을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 건물을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해 나가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수백 년 혹은 그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세계 곳곳의 옛 건축물들도 대부분 첫 수십 년의 전통을 무시하지 않고 계속 보존해 온 덕분에 오늘날까지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곳들이다.

길을 걷다 보면 ‘○○년 전통’을 내세우는 음식점들이 많이 보인다. 그중에는 이름만 거짓으로 그렇게 내세운 곳들도 생각보다 꽤 되지만 정말로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터를 잡고 손님을 맞이해 온 노포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그런 노포에는 손님들 또한 세대를 넘어 꾸준히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일단 사람들이 ‘전통의 손맛’을 선호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어디 손맛 때문만일까. 적어도 수십 년 동안 이어 온 전통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자산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한 자리에서 오랜 세월 동안 영업해 온 음식점들은 보통 그 지역의 명소가 되고 때로는 외지인들에게까지 알려지곤 한다. 그리고 수십 년을 견디는 동안 자연스럽게 낡고 빛바랜 노포의 정취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호텔도 마찬가지다. 호텔은 물론 동네 음식점과 달리 돈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 또는 화려한 연회장을 빌려서 치르는 행사에 참석할 만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는 곳이기는 하다. 그러나 호텔도 사람이 모이는 곳이고 그 사람들이 크고 작은 역사를 만드는 곳이다. 그리고 남산 아래 밀레니엄 힐튼 호텔처럼 실력 있는 건축가가 공들여 설계하고 지은 건축물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예술적 가치가 빛나는 법이다.

작은 마을의 40년 된 음식점이 사라지는 것이 아쉽듯이 서울 한복판의 40년 된 호텔이 사라지는 것 또한 아쉬운 일이다. 이처럼 지은 지 오래된 건축물 중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들은 그 누가 소유권을 이어받든 허물기보다 보존하면서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했으면 한다. 애초에 등록문화재 제도도 있는 만큼 국가에서 이러한 제도를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건물주에게도 실질적인 혜택을 지금보다 더 주어서 문화유산 보존을 독려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 이는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민족이 지금 이 순간의 역사 또한 반만년을 이어 갈 수 있게 하는 값진 일이 될 것이다.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학교·언어학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하임 라이프니츠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천주가사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연구”, “텍스트언어학에 기반한 ‘쉬운 언어(Leichte Sprache)’ 텍스트 구성 시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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