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진과 이상, ‘삶의 예술’을 구축하다
상태바
김복진과 이상, ‘삶의 예술’을 구축하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9.18 10: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한국 구축주의의 기원: 1920~30년대 김복진과 이상 | 김민수 지음 | 그린비 | 320쪽

 

이 책은 100년 전 일제강점기라는 상실의 시대에도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 김복진과 이상의 치열한 ‘삶의 예술’을 다루고 있다. 책의 표지에 활용된 김복진의 『문예운동』(文藝運動) 표지 레터링은 부품으로 조립된 기계의 모습으로, 현실을 변혁해 내려는 목적과 운동성을 드러내고 있다. 

저자는 이처럼 현실 속에서 투쟁으로 해방의 길을 찾아낸 김복진과 우주적 가상세계를 통해 새로운 삶을 창조해 낸 이상의 구축주의를 통해, 개개인의 사유를 가능하게 하며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힘으로서의 예술에 대해 말한다. 더 나아가 우리의 현실에서 앞으로 어떤 형태의 사회와 예술이 지속 가능하며, 진정 삶을 위한 것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예술이란 절름발이 세대의 사회적 삶의 산물”이라고 알렉세이 간은 말했다. 인간의 역사는 위기의 반복이고, 인간은 위기와 더불어 살 수밖에 없다. 이런 암담한 현실을 넘어설 힘이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을 만들어 내는 ‘예술’이다. 국내에서 구축주의는 그동안 일본을 통해 소개된 구성파 또는 구성주의의 맥락으로 그 용어와 개념이 이해되어 왔다. 러시아 구축주의의 개념을 다진 로드첸코에 따르면, 구성(kompozitsiia)은 목적적 조직이 결핍된 것으로 제작자의 취향에 따른 요소 선택의 문제인 반면, 구축(konstruktsiia)은 목적에 따라 요소와 재료를 조직하는 것이다. 즉, ‘기하학적 추상미술’과 동일시되기도 하는 구성주의는 순수회화의 시각요소 배치를 통해 현실에서 벗어난 내면세계를 표현한 예술이며, 구축주의는 목적과 본질을 담고 있으면서 개인과 사회의 운동성과 공명하는 예술로 둘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1920~30년대는 국권 침탈 이후 식민지 자본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때였다. 1926년 수도 경성에는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완공되었고, 조선인들은 새로운 도시적 감수성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려한 식민지 근대의 이면에는 모순적이고 살인적인 사회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 시기, 한국 최초의 근대 조각가로 알려진 김복진은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를 이끈 조소예술가이자 문예운동가로서, ‘형성예술’과 ‘나형(裸型)예술’이라는 구축주의 개념을 제시한다. 이 책의 표지에도 활용된, 김복진이 디자인한 『문예운동』(文藝運動) 표지 레터링은 나형, 즉 노출된 형태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활자 공간을 작업장 삼아 제호를 볼륨감 있게 조직했다. 이는 ‘문예운동’을 통해 현실을 변혁해 내려는 목적과 운동성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김복진에게 디자인을 통한 예술은 단순한 도형의 조합이 아닌 사물의 조립품으로, 현실변혁의 운동기계를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이는 인습적 과거를 혁파해 새로운 일상생활을 조직하는 구축주의적 예술로 시대를 넘어서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저자는 김복진의 이러한 개념을 잘 담고 있는 「신흥미술과 그 표적」(책의 부록에 원문 수록)을 재독해하여, 김복진의 구축주의가 현실적 삶의 문제를 예술로 타개하고 물산장려운동으로 민족 경제를 구축하고자 한 조국 해방의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밝힌다.

조선총독부에서 식민통치를 위한 건물 도면을 지시대로 그리는 건축 기수였던 이상은 활자를 재료로 한 실험적인 표지 디자인과 시를 통해 가상공간을 구축하여 암담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다. 저자는 행렬과 수식으로 이루어진 그의 실험 시들이 현대물리학의 시공간 이론뿐 아니라 표도로프의 우주론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시공간 개념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표도로프의 우주론은 실증주의적 서구 우주론 속 ‘수동적 관찰자’로 제한된 인간의 역할을 ‘실제적 행위 주체’로 확장함으로 ‘중력을 극복하는 원리’에 기반한 예술 창조를 이끌어 냈다. 이 맥락에서 이상의 실험 시 「선에관한각서 1」을 살펴보면, 가로와 세로의 숫자에 의해 확정된 100개의 점들이 다음에 뒤따르는 시행들 “우주는 멱(冪)에 의하는 멱(冪)에 의한다 / 사람은 숫자를 버리라 / 고요하게 나를 전자의 양자로 하라”를 통해 중력의 끌어당김과 유클리드 기하학의 3차원 세계에서 해방되어 무한 시공간 속으로 탈주하는 새로운 구축을 표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이상에게 구축주의란 식민지 조선이라는 물리적 시공간에서 현실을 초극할 의지를 잃지 않고 당대 예술이 나아갈 본류를 향해 질주하게 하는 삶의 예술이었다.

질병과 전쟁, 기후 위기와 경제 위기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서 개인이 직면한 상실감과 절망감보다 더 무서운 것은 꿈도 희망도 없는 좌절이다. 김복진과 이상은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엄혹한 시기에도 그들은 예술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암울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분투적 삶을 살았고, 그 결과 오늘날 우리 삶의 일부가 된 현대 디자인과 건축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한국 구축주의의 기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예술은 현실을 넘어서는 개개인의 사유를 가능하게 하며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힘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예술은 무엇인가. 이 책은 우리의 현실에서 앞으로 어떤 형태의 사회와 예술이 지속 가능하며, 진정 삶을 위한 것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