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영화가 자본주의와 조우할 때...그 충격과 긴장, 균열을 가로지르는 ‘비교’의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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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영화가 자본주의와 조우할 때...그 충격과 긴장, 균열을 가로지르는 ‘비교’의 사유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09.18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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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교의 항해술: 보편과 특수 사이의 영화들 | 하승우 지음 | 오월의봄 | 312쪽

 

한 편의 영화가 자본주의와 조우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조우는 영화 내부에 어떤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킬까? 아니, 그 전에 영화와 자본주의는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통상적으로 영화는 대규모의 자본이 투입되는 문화상품으로, 탄생부터 자본주의 시스템과 뗄 수 없이 얽혀 있다. 오늘날의 대규모 영화산업과 그 자장 안에서 생산되는 수많은 대중영화들은 영화와 자본주의의 긴밀한 연결고리를 선명히 보여준다.

이 책은 영화연구에 그러한 관계성에 대한 사유를 도입하는 책이다. 동시에 이 작업은 자본주의의 발전 단계에 반응하는 문화적 형식인 대중영화를 통해 ‘한국’이라는 특정한 국가/사회의 모순과 적대를 포착하고 역사화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저자는 자본주의와 그 체제에 내재한 사회적 적대들이 영화의 표면적인 내러티브를 넘어, 영화를 구성하는 여러 층위들의 복잡한 관계를 통해 산포된다는 것을 강력히 염두에 둔다. 이때 비평의 과제는 한 편의 영화가 자본주의의 모순과 적대를 어떤 식으로 번역하고 표현해내는지 면밀히 살펴보는 데 있다.

물론 대중문화로서 영화는 때로 정치, 경제 등 다른 사회적 실천들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역사적 모순이 응축되고, 자본과 국가의 폭력이 극으로 치닫는 사회적 상황에 ‘부인’이나 ‘침묵’의 방식으로 응답하는 영화들이 결코 적지 않듯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인은 반드시 역사적 조건에 관한 흔적들을 함축하기 마련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하나의 텍스트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여러 요소들이 갈등하고 충돌하는 방식, 즉 텍스트의 불완전성과 비대칭성에 초점을 맞추는 ‘징후적 독해’다. 그런 징후들을 포착할 때 우리는 영화 텍스트 내부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파열들을 생산적으로 독해할 수 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비교’는 그러한 징후적 독해를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방법론이다. 비교란 영화와 자본주의라는 서로 다른 두 대상을 견주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책에서 저자는 한 편의 영화에 부재하는 것이 다른 영화에 어떻게 현존하는지 살펴봄으로써 부재와 현존의 ‘성좌적’ 관계를 조명하는 작업, 혹은 서로 다른 영화들이 맺고 있는 비대칭적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영화가 처한 역사적 조건들을 일별하는 것을 비교로 지칭한다. 이뿐만 아니라 비교는 “보편과 특수의 비교, 독특성과 종별성의 비교, 한 편의 영화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의 비교, 한 편의 영화와 또 다른 영화의 비교” 등을 망라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같은 맥락에서 부제 ‘보편과 특수 사이의 영화들’은 영화, 좀 더 정확히 말해 한국영화를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과 문제의식을 담아낸다. 그 관점이란 바로 ‘보편the universal-특수the particular’라는 대당관계 속에서 한국영화를 사유하는 방식이다. 이 대당관계는 한국영화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망하기 위한 문제틀을 제시한다. 보편-특수란 기본적으로 생물학의 분류체계처럼 상위 범주와 (그에 포함되는) 하위 범주 사이의 관계를 뜻하며, 흔히 상위 범주인 보편(유)이 하위 범주인 특수(종)을 포함한다고 상정된다. 헤겔로 대표되는 고전철학의 대주제인 ‘전체-부분’과도 맞닿아 있는 이 관계는 주디스 버틀러·에르네스토 라클라우·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현대의 좌파 정치철학자들 사이에서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주제였다.

저자는 그러한 좌파 이론가들의 보편-특수 논쟁을 면밀히 검토하면서도, 그 관계를 나름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며 ‘한국영화’라는 영역으로 전유하고자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하게 소환되는 철학자는 루이 알튀세르다. 자본과 노동의 기본모순이 특정한 사회구성체의 구체적인 정세 속에서 ‘과잉결정’되는 방식에 주목했던 알튀세르의 작업들은 한국/남한이라는 특정 사회구성체, 그리고 그 자장 안에서 생산된 대중영화들이 자본주의와 조우하는 방식을 살펴보는 데 핵심적인 단초가 된다. 이는 곧 종별성의 문제로, 종별성 개념은 특정한 사회구성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심급들이 불균등하게 맺고 있는 모순의 관계를 지시한다.

유령적 보편성(버틀러)이나 구체적 보편성(지젝) 같은 개념들이 시사하듯, 보편과 특수는 언제나 내재적이면서도 동시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 하나의 단일한 원리로서의 보편성이 다양한 특수(자)들을 포함하지 않을뿐더러, 특수들이 그에 종속되지도 않는다는 통찰은 거의 상식이 되다시피 했다. 그렇다면 양자의 관계를 동시적으로 만드는 계기는 무엇일까? 그 계기는 특수가 변화/전화하는 순간에 열린다. 저자는 특수가 변모하는 계기를 독특성과 종별성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특수의 형태 변화가 보편의 개념 자체를 발본적으로 재구성하고 복수화한다고 강조한다. 복수의 개념들이 서로 경쟁할 때 보편 개념은 확장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자본주의라는 맥락 속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는 특수가 ‘종별성’으로 전화될 때 마련된다. 그때 우리는 영화를 역사의 구체적인 작동들 속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은 곧 영화의 사회문화적 종별성을 이해하는 방식을 제시해준다.

말하자면 종별성(특정성)은 ‘관계’와 관련된 개념으로, 관계성 자체를 뛰어넘어 근본적으로 ‘자기-개체화’를 추구하는 독특성과 달리 ‘개체와 환경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종별성의 측면에서 보편 개념은 역사적 자본주의를, 특수 개념은 한국영화를 가리키며, 이때 중요한 것은 한국영화가 역사적 자본주의와 그것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시간성들과 조우하는 방식을 더듬어보는 일이다.

영화연구에 종별성의 축을 도입하는 시도는 곧 영화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의 형태를 전환하는 일이다. 동시에 이것은 이미지가 지닌 고유한 역량에 집중함으로써 영화를 독특성의 측면에서 조명한 들뢰즈의 영화이론에 존재하지 않는 축이다. 그러나 종별성의 관점을 견지할 때 우리는 ‘영화 그 자체’가 아닌, ‘한국영화’를 질문할 수 있게 된다. 이때 한국영화란, 한국이라는 특정한 사회와 그 사회가 포함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모순의 관계 안에서 생산되고 또 그것과 이런저런 방식으로 부대끼는 문화 텍스트/생산물을 말한다. 이러한 접근은 하나의 보편으로서의 영화, 즉 특정 국가/사회의 역사적·사회적 맥락들을 염두에 두지 않는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매체 형식으로서의 영화 개념 자체를 변화시킴으로써 복수의 영화 범주들을 산출해낸다.

저자는 이 문제를 가장 급진적으로 사유했던 영국의 영화이론가 폴 윌먼Paul Willeman에게 주목한다. ‘비교영화연구’를 위한 조건과 이론적 자원을 탐색하는 그의 작업들은 문학뿐 아니라 영화에도 왜 ‘비교의 방법론’이 필요한지 세밀히 짚어낸다. 무엇보다 윌먼은 문학이론가 프랑코 모레티가 비교문학연구의 기본적인 문제틀로 제시하는 ‘외부적 형식 vs 지역적 소재’라는 개념쌍을 비판적으로 점검한다. 그에 따르면, 이런 대립 구도 대신 필요한 이론적 토대는 “한 지역에서 생산된 문화 텍스트가 자본주의와 조우하는 과정”이다. 자본주의적 경험을 비교영화연구의 기반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서로 다른 문화권의 문화적 차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는 “필연적으로 산업화된 문화적 형식”으로, 그 형식에 영향을 주는 산업화와 근대화의 역학을 단순히 ‘외부적 형식’으로 간주하기 어렵다. 더불어 이런 관점은 특정 민족국가에서 발생한 문화적 형식을 자본주의 자체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이를테면 할리우드를 자본주의와 동일시하며 할리우드와 그 외 내셔널 시네마national cinema들을 대당관계로 설정하는 실수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할리우드 그 자체는 결코 자본주의가 아니다. 윌먼은 “지역적으로 종별적인 자본주의와의 조우”라는 전혀 다른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서구 vs 비서구’의 대당관계를 무효화하고 서구/할리우드를 지역화한다.

결국 한국영화를 비롯해 각각의 내셔널 시네마의 윤곽을 그릴 때 핵심은 “중심과 주변의 불균형적이고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를 근간으로 하는 세계체계의 문제”다. 윌먼의 이론을 통해 우리는 서구 역시 이 문제를 피해 갈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시간성으로 상정되어온 서구의 근대조차 “자본주의 근대화와 지역의 타협 사이에서 형성된” 매우 지역-특정적인 결과임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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