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비판이론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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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비판이론의 뿌리
  •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 승인 2022.09.18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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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에게 듣는다_ 『도구적 이성 비판: 이성의 상실』 (막스 호르크하이머 지음, 박구용 옮김, 문예출판사, 300쪽, 2022.08)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의 『도구적 이성 비판』은 비판이론을 창시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구성과 형성에서 하나의 나침판이다. 특히 비판이론 1세대를 대표하는 뢰벤탈(L. Löventhal), 아도르노(Th. W. Adorno), 벤야민(W. Benjamin), 마르쿠제(H. Marcuse), 프롬(E. Fromm), 폴록(F. Pollock), 키르히하이머(O. Kirchheimer), 노이만(F. Neumann)의 연구는 이런 저런 방식으로 『도구적 이성 비판』과 연관된다. 연결 지점은 호르크하이머가 주장한 비판이론의 제1과제, 즉 이질성과 타자성을 배제하는 동일성의 철학 체계와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현실을 긍정하고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함으로써 언어를 빼앗긴 것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과제의 공유 지점이다.  

호르크하이머는 1947년 미국에서 『이성의 이름』(Eclipse of Reason)으로 처음 발표한 책을 1967년 독일에서 약간의 수정을 거쳐 『도구적 이성 비판』으로 다시 출판한다. 1895년 독일의 남부 도시 슈투트가르트에서 유태인 기업가의 아들로 태어난 호르크하이머는 1930년부터 1958년까지 <사회조사연구소> 소장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비판이론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1933년 호르크하이머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사회조사연구소>의 구성원들과 함께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49년 프랑크푸르트대학으로 돌아올 때까지 망명 중에도 구성원들과 함께 뉴욕에서 <사회조사연구소>를 이끌면서 「권위와 가족」(Autorität und Familie, 1936), 「전통이론과 비판이론」(Traditionelle und kritische Theorie, 1937) 등을 통해 비판이론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이 시기에 그는 또한 『도구적 이성』을 집필함과 동시에 비판이론을 상징하는 저서가 된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ärung)을 평생의 동지였던 아도르노(Th. W. Adorno)와 함께 『철학적 단상들』(Philosophische Fragmente, 1944)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야만적인 전체주의적 폭력이 전 세계를 지배하던 그 시기에 호르크하이머는 현대적 야만의 뿌리를 파헤친다. 독일로 돌아온 후 1973년 세상을 뜰 때까지 호르크하이머는 지속적으로 현대적 이성의 기획이 왜 폭력과 억압의 전면화로 왜곡되었는가를 추적한다. 

현대사회의 진단을 위해 호르크하이머는 먼저 자신에게 사상적 동력을 제공했던 마르크스(K. Marx)와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가 경제적 위기의 점진적 심화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전복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그런데 호르크하이머는 이와 같은 마르크스의 관점이 몇 가지 근본적 변화를 예측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① 프롤레타리아의 경제적 삶의 조건이 혁명에 대한 그들의 의지를 근본적으로 약화시킬 만큼 향상되었다는 것, ② 자본주의가 경제공황과 같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자정 능력이 있다는 것, ③ 현실적 사회주의가 관리되는 사회로 전락한 것, 그리고 ④ 사회적 정의와 자유의 변증법적 관계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했다. 호르크하이머는 이러한 진단을 기초로 자본주의 사회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 조차도 ‘총체적으로 관리되는 사회’, 곧 ‘행정관료국가’로 추락했다고 말한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체주의는 이와 같이 관리되는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드러낸다. 

 

1964년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는 막스 호르크하이머(왼편)와 테오도어 아도르노. 뒤편 오른쪽에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는 사람이 위르겐 하버마스. 사진: 위키미디어 코먼스 <br>
1964년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는 막스 호르크하이머(왼편)와 테오도어 아도르노. 뒤편 오른쪽에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는 사람이 위르겐 하버마스. 사진: 위키미디어 코먼스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론은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총체적 관리 체계의 야만성을 자연과 인간 모두를 유용성을 산출하기 위한 대상으로만 파악하는 형식화되고 도구화된 주관적 이성의 전면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한다.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폭력적 문화, 즉 동일성의 문화는 <이성=도구적 이성>의 공식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이성이 자신을 협소화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전면화한 도구적 이성은 정의, 평등, 자유, 행복, 관용과 같은 이념들조차도 유용성이 입증되지 않는 한 의미 없는 허구적 관념으로 치부한다. 도구적 이성이 전면화한 세계에는 어떠한 이성적 원칙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런데 원칙이 없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원칙이 될 수 있지만, 모든 것이 원칙이 될 수 있는 곳에서는 오직 유용성의 척도인 돈과 권력만이 유일한 원칙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돈과 권력이 유일한 원칙인 세계에서 이성은 더 이상 현실의 지배 원칙에 대한 비판의 힘을 상실하고, 오히려 그것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것에만 몰두하는 나머지 현실 긍정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고 만다. 이처럼 억압적 현실을 부정할 수 있는 비판적 이념과 원칙이 폐기되고, 심지어 최후의 버팀목이 되어야 할 이성조차 도구화된 세계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호르크하이머의 『도구적 이성 비판』은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책이라는 『계몽의 변증법』과 유사하게 이성과 계몽이 지칠 줄 모르는 자기 파괴의 과정을 통해 다시 신화로 전복된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도구적 이성 비판』과 『계몽의 변증법』 사이의 차이를 규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구적 이성 비판』에 대한 면밀한 독해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호르크하이머의 철학과 아도르노 철학을 구별할 수 있는 경계선을 제공해 준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위의 두 책들과 비슷한 시기에 쓰인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minima moralia, 1944)에 대한 연구가 병행되어야만 한다. 아도르노 철학이 총체성과 동일성의 모든 체계에 대한 급진적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총체성에 대한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은 다소 유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아도르노가 객관적 이성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과는 달리, 호르크하이머는 객관적 이성과 주관적 이성의 조화를 통해 도구적 이성의 전면화에서 비롯되는 계몽의 퇴행을 극복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차이는 아도르노의 관심을 예술과 미학으로 이끌었던 반면, 호르크하이머의 관심을 철학에 머물게 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이들은 마지막 희망조차 버린 허무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들은 자연과 이성의 조화, 혹은 미메시스적 충동과 합리성의 조화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총체적으로 관리되는 행정관료 사회에서 긍정의 유토피아를 제시하는 것은 억압적 현실을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들은 현실의 끊임없는 부정 속에서 피어나는 부정의 유토피아를 암호문처럼 제시하는 것에 만족할 것을 제안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진리와 정의로 간주되는 것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주문한다. 이런 맥락에서 호르크하이머는 자기 철학의 제1원칙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론적 염세주의자이면서 실천적 낙관주의자가 되자.”

『도구적 이성 비판』은 현대사회와 문명, 그리고 그것을 이념적으로 지탱하는 이데올로기 비판을 위한 규범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 비판이론의 과제는 도구적 이성이 전면화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비판이론의 이름으로 예술과 문학, 그리고 철학은 사물과 생명의 의미를 표현하고, 현실을 그것의 올바른 이름으로 부르고, 말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 비판이론은 이성을 전면적으로 폐기해서는 안 된다. 현대성의 상징적 기호인 도구적 이성에 대한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은 결코 이성의 타자를 실체화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지 않는다. 도구적 이성 비판은 결코 전-합리성, 반-합리성, 탈-합리성과 결탁하지 않는다. 호르크하이머는 오히려 너무 자주 날을 간 면도날처럼 지나치게 얇아진 이성을 두터운 이성, 즉 자연과의 조화를 지향하는 큰 이성을 통해 비판한다. 호르크하이머의 철학은 이성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 아니라, 이성의 끊임없는 자기 부정을 통해 도구적 이성으로 왜곡된 계몽을 계몽하는 것이다.

『도구적 이성 비판』의 현재적 가치는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몇 가지 테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① 이성의 도구화는 결국 인간의 도구화다. ② 현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실증주의, 실용주의, 과학주의다. 심지어 종교조차 여기에 굴복한다. ③ 인간에 의한 자연 지배의 역사는 인간에 의한 인간 지배의 역사다. ④ 원자적 개인주의 시대에 진정한 개인은 사라진다. ⑤ 철학은 언어를 잃어버린 것들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하나의 비판이론은 없다. 비판이론은 누구의 소유가 아니다. 비판이론을 형성해온 학자들의 수만큼 다채로운 색깔을 가진 것이 비판이론이다. 철학, 미학, 문학, 문화학, 인류학, 역사학, 사회학, 정치학, 심리학, 교육학 등에서 비판이론은 뚜렷한 계보를 형성하고 있지만 이들을 하나의 줄기로 묶을 수는 없다. 각기 다른 색깔과 관심을 가진 1세대 비판이론가들 사이에 우리는 같은 것보다 다른 것을 찾기가 더 쉽다. 더구나 2세대를 대표하는 하버마스(J. Habermas)나 3세대의 호네트(A. Honneth)와 멘케(Ch. Menke)에 이르면 사회비판의 지평 자체가 변화한다.  

비판이론의 지평과 지층이 이처럼 다원적이라면 어떻게 그들을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항상 호르크하이머로 되돌아가게 된다. 무엇보다 그가 비판이론의 발신자를 가리키는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처음 이끌고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1937년 출판한 『전통이론과 비판이론』은 비판이론의 정체성을 묻는 사람들에게 지침서와 같다. 호르크하이머에게 전통이론은 과거의 이론이 아니라 거꾸로 지금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가장 일반적인 이론, 특히 인식 주체의 가치 중립화를 기반으로 지배적 현실을 긍정하고 확장하는 과학주의와 실증주의를 가리킨다. 거꾸로 비판이론은 중립적 주체가 아닌 비판적 주체가 사회의 지배질서를 부정하고 극복하는 과정에 이론적으로 참여한다.       

현실 사회의 지배질서를 비판하는 비판이론은 이상적인 사회, 혹은 올바른 사회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비판이론은 좋은 것을 선전하는 이론이 아니라 나쁜 것을 점치고, 들추고, 줄이는 길을 찾는 이론적 실천이다. 따라서 비판이론은 나쁜 것이 사라질 때까지 현재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부정적인 것은 사라질 때까지 부정적이라는 이론적 태도는 그 자체가 사회적 실천이다. 부정적인 것 중에서 부정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시대와 맥락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버마스처럼 자본 시장과 관료 행정 체계의 논리가 생활세계 내부를 깊숙이 식민지화하는 제도가 가장 부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 호네트처럼 인정질서의 교란과 붕괴를 더 부정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1세대 비판이론이 부정해야할 것으로 주목한 것은 무엇일까? 대중을 기만하고 규율하며 사물이나 상품으로 만드는 문화산업, 차이와 타자성을 억압하는 합리주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반유대・반지성주의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문제를 단순화시키면 도구적 이성에 의한 자연의 억압이다. 따라서 비판이론을 횡단하며 사회비판의 이론적 가능성을 찾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할 책이 바로 호르크하이머의 『도구적 이성 비판』이다.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전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광주시민자유대학에서 세계시민적 관점으로 학문과 예술을 연구하고 교육한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장으로서 다원적 학문성장과 건강한 학술정책 방향을 모색했다. 주요 저서로는 『우리 안의 타자』, 『부정의 역사철학』, 『문파, 새로운 주권자의 이상한 출현』, Freiheit, Anerkennung und Diskurs,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공저), 『포스트모던 칸트』(공저), 『니체 이해의 새로운 지평』(공저), 『5·18 그리고 역사』(공저), 『촛불, 어떻게 볼 것인가』(공저), 『다시 민주주의다』(공저) 등이 있고, 번역서로 『정신 철학』, 『도구적 이성 비판』 등이 있다. <폭력의 최소화, 자유의 최대화>를 학문연구와 사회적 실천의 주된 동력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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