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모욕죄 처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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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모욕죄 처벌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2.09.17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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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논란 많은 모욕죄

최근 경남 양산의 평산마을 인근에서 소란을 피우던 60대가 모욕과 협박 혐의로 구속됐다는 뉴스를 본 적 있다. 구속된 인물은 문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 장기 1인 시위를 하며 문 전 대통령 부부를 비방했던 유튜버로 알려졌는데, 온종일 확성기로 욕설과 험담을 하는 통에 주민들의 일상이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특히 그는 시위 중에 공업용 커터 칼을 호주머니에서 꺼내 주변 사람을 위협한 혐의도 받고 있다.

경남 양산의 문 전 대통령 사저가 있는 평산마을 22년 7월 모습. MBC 경남 뉴스 캡처.

앞의 평산마을 사례는 피해자 면전에서 행한 모욕 행위에 관한 것이라면, 최근에는 사이버 모욕죄가 더 큰 사회문제 중 하나다. 즉 인터넷의 보급과 SNS를 통한 사람들 간의 소통이 보편화되면서 악플, 성희롱으로 인한 모욕과 명예훼손 문제가 적지 않은 논란이 되고 있다. 현행 형법에 따르면 모욕죄는 공개적으로 사람을 모욕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로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모욕죄는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우려가 크기 때문에 많은 선진국에서 사문화되거나 폐지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모욕죄 인정이 매우 엄격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에게 갖은 험담을 쏟아내며 장시간 사람들에게 모멸감을 준 행위는 인터넷에서의 심한 악플 만큼이나 모욕의 정도가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조선시대의 모욕죄, ‘매리(罵詈)’

지금의 모욕죄처럼 조선시대에도 남에게 심한 폭언이나 욕설을 쏟아낼 경우 처벌할 수 있었으니 조선시대 판 모욕죄가 바로 『대명률』의 ‘매리(罵詈)’이다. 매리에서 매(罵)는 욕설이나 폭언을 말하며, 리(詈)는 능욕·비방하는 행위를 말한다. 즉 매리죄는 남에게 욕설이나 심한 비방을 통해 모욕을 주는 범죄를 말한다.

『대명률』에는 매리 행위에 대한 처벌 조문이 모두 여덟 개 등장한다. 여기에는 일반적인 모욕죄 처벌 규정과 함께 상급자와 하급자간의 모욕, 노비의 주인에 대한 모욕, 가족·친족 사이의 모욕 등 관직, 신분, 친족 간 관계에 따른 다양한 모욕 행위 양상과 그 처벌 형량이 제시되어 있다.

 

욕설과 능욕 등 모욕죄에 대한 처벌 조문이 실린 『대명률』 권21의 ‘매리’편, 규장각 소장.

그 중 가장 첫머리에 등장하는 것이 일반인들 상호 간에 모욕을 가한 경우의 처벌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형량은 태형(笞刑) 10대이다. 즉 모욕을 가한 가해자에게 태(笞)라는 매로 볼기 10대를 치는 형벌이다.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구타·폭행과 달리 상대방에게 정신적 고통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매리죄의 형량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동일한 행위라 할지라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에 따라 형량에 큰 차이가 있었는데, 이는 매리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고을 백성이 관내 사또에게 욕설 등 모욕을 가할 경우 형량은 장형 100대였다. 앞에서 언급한 일반적인 모욕죄 형량인 태형 10대의 무려 열 배에 달한다. 

그런데 그 정도면 약과다. 『대명률』 규정에 따르면 노비가 주인을 모욕한 경우의 형량은 법정 최고형인 교수형이었다. 즉 당시 노비들은 주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면 죽을 각오를 해야 했다는 얘기다. 사실 당시 노비의 주인에 대한 범죄 행위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엄한 처벌 대상이었다. 

또 친족 간에서도 비속(卑屬)의 존속(尊屬)에 대한 모욕, 처나 첩의 남편에 대한 모욕은 특별히 무겁게 다스렸다. 예를 들어 형이나 누나를 모욕했을 때에는 장형 100대, 백부나 백모, 숙부나 숙모, 고모를 모욕한 경우에는 형량이 장(杖) 60 도(徒) 1년, 부모나 조부모에게 모욕을 가한 경우에는 교수형, 즉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또 처나 첩이 시부모를 모욕한 경우, 심지어 남편이 죽어서 개가한 처나 첩이 과거의 시부모를 모욕한 경우에도 모두 형량은 교수형이었다. 이처럼 조선시대 노비나 처, 첩은 심한 욕설을 함부로 내뱉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화를 자초할 수도 있었다.


모욕죄 처벌 사례

그렇다면 실제로 조선시대 매리죄로 처벌한 판례를 여러 기록을 통해서 살펴보자.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모욕죄로 논란이 된 사건은 그리 많이 나오지는 않는데, 그 중에는 관리들 간에 서로 욕설을 하다 처벌을 받은 사례가 확인된다.

1537년(중종 32) 9월 기사에 따르면 국가 행사를 관장하던 관청인 통례원(通禮院)의 종6품 실무 관료인 인의(引儀) 조세적, 유기조 두 관리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공개 석상에서 상말로 서로 따지고 심한 욕설을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는다. 기록이 자세하지 않아 두 사람이 당시 심하게 싸운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결국 못 배운 노비들처럼 행동하여 조정 관리로서의 체통을 크게 잃었다는 비판을 받고 두 사람 모두 파직 당한다.

1687년(숙종 13) 6월에는 호남 지방의 지방관 두 사람이 민정을 시찰하는 행사 모임에서 술을 마시다가 심한 욕설을 퍼부어 논란이 되었다. 두 사람 중 한 명은 지방군대 사령관 격의 영장(營將) 이하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요즘의 기차 역장에 해당하는 찰방(察訪) 이우진이었다. 관찰사는 두 사람 모두 파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숙종은 영장의 지위가 훨씬 높다는 이유로 찰방 이우진만 잡아다가 조사,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노비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욕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경우도 있었다. 1489년(성종 20) 8월에 내수사(內需司)의 종 김이만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이웃 사람이 관에 신고한 일이 있었다. 관원들이 직접 조사해본 결과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혐의를 부인하였다. 매리, 즉 욕설과 모욕 행위는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호소해야 하는 친고죄(親告罪)이기 때문에 관에서는 김이만을 어머니 매리죄로 처벌하지 못하고, 대신 불손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장형 100대에 처했다. 김이만은 매질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그나마 어머니의 적극적인 부인으로 교수형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단원풍속도첩』의 벼 타작하는 장면. 양반이 타작하고 있는 종을 감시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종의 주인에 대한 명분을 매우 중시하여 주인에게 거스르는 종의 사소한 행위도 무겁게 처벌할 수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490년(성종 21) 5월에는 전라도 능주(綾州)에서 자신의 오라비의 머리털을 휘어잡았다는 이유로 여종이 주인의 옷을 찢었다가 체포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형조에서는 주인에게 욕설을 가한 경우의 형량인 교수형보다 더 무거운 참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성종은 유배형으로 판결한다. 증거가 분명치 않다는 이유로 사형에서 한 등급 감해준 것이지만, 조선시대에 노비의 주인에 대한 행위는 엄하게 다스렸음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조, 모욕죄 규정을 보완하다

『대명률』의 매리죄 규정은 조선에서 한동안 거의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러다가 기존의 모욕죄 처벌 규정을 일부 보완하는 입법이 이루어진 시기가 정조 즉위 십 년 되던 해이다. 이때 국왕 정조는 모욕죄 규정을 추가로 마련할 것을 지시하는데, 입법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같은 해 서울에서 일어난 노비의 주인 고소 사건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건은 이렇다. 1786년(정조 10) 6월에 자신의 아버지가 주인에게 맞아 죽었다는 이유로 노비 김도흥이란 인물이 주인 이영규를 고소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영규가 김도흥의 아버지를 죽게 한 것은 정당한 처벌이었다고 본 정조는 김도흥의 이영규 고소를 종이 주인을 모함한 패륜 사건으로 간주하였다. 당시 상하 신분질서가 문란해져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면서 이와 같은 명분을 해치는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결국 더욱 촘촘하게 명분과 분수를 해치는 행위에 대한 규제 조항을 만들어야 하층민들이 경각심을 갖고 법을 잘 따를 것이라고 생각한 정조는 『대명률』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하층민의 사대부에 대한 모욕, 아전들의 관리들에 대한 모욕 행위에 대한 몇몇 처벌 조항을 추가로 입법하도록 하였다.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 정조의 개혁정치를 높게 평가하는 학자들이 많지만, 그가 조선왕조의 신분질서를 부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조가 사대부들에 대한 상천민들의 하극상을 우려하는 내용은 실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규장각 소장.

이 정조 10년의 입법으로 비부(婢夫)가 가장(家長), 즉 처상전을 능욕하는 행위는 물론 이졸(吏卒)의 관리에 대한 모욕, 평천민들의 사족에 대한 모욕 행위도 범행의 정도에 따라 요즘의 징역형에 해당하는 벌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비부(婢夫)가 처상전을 능욕한 경우에는 장80 도2년에 처할 수 있었고, 이졸(吏卒)이 관리들에게 모욕을 가한 경우에는 최고 장100 도3년, 상한이나 천민이 벼슬하지 않은 양반에게 욕설을 가한 경우에도 최고 장60 도1년의 처벌이 가능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본다면 전반적으로 형량이 무겁다. 종이 단지 주인을 고발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던 신분사회의 한 단면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조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선시대 법률문화와 사회문화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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