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문학 속 ‘잉여인간’의 출현과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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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 속 ‘잉여인간’의 출현과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2.09.13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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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문학, 니체를 읽다: 도덕의식의 혁명에 관하여 | 이디스 클라우스 지음 | 천호강 옮김 | 그린비 | 448쪽

 

이 책은 19~20세기 전례 없던 러시아 문학의 부흥기, 도덕의식의 혁명을 그려 낸다. 이전 세대의 전통적인 가치를 대신할 자아발견과 자기실현이라는 목표를 찾았지만 이를 실현할 구체적인 상을 그려 내지 못했던 작가들과 프리드리히 니체와의 만남이 어떤 가치를 만들어 냈을까. 저자는 종교적 의미를 넘어선 문화적 의미로서의 ‘신화’ 개념을 통해 대중적 작가들, 신비주의적 상징주의자들, 혁명적 낭만주의자들로 당시 작가들의 작품 속 니체의 영향력을 살펴본다.

“무엇을 할 것인가?”― 1863년 체르니솁스키의 고뇌, 그로부터 20년 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톨스토이의 고뇌는 2022년에도 끝나지 않는다. 그 어느 때보다 개인의 가치관과 개성이 중시되는 현대에도,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는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개인보다 사회적인 책무와 도덕적인 가치가 우선시 되던 19세기, 러시아혁명을 앞둔 세기 전환기 러시아에서 이전 세대의 전통적인 가치를 대신할 새로운 가치를 찾아 나선 작가와 비평가들의 창조적인 열망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자아발견과 자기실현이라는 목표를 찾았지만 이를 실현할 구체적인 상을 그려 내지 못했던 이들과 프리드리히 니체와의 만남을 생생히 그려낸다.

니체만큼 세기 전환기 러시아의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한 사상가는 없었다. 저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러시아와 니체의 만남을 분석하며, 러시아의 전례 없는 예술적 부흥을 이끌어 낸 동시에, 지식인들을 문화적 절망의 벼랑 끝으로 이끈 윤리적·미학적 비전의 변화를 ‘도덕의식의 혁명’으로 정의한다. 니체는 어떻게 러시아를 변화시킨 걸까. 니체는 그가 살았던 시대 독일 철학의 주류였던 칸트나 헤겔처럼 세련된 논리와 범상치 않은 태도를 보여 주며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망치’를 들고나와 소심함과 평범함, 순종과 자기만족, 이타주의와 연민이라는 대중적 미덕을 격렬하게 공격했다. 이러한 니체의 철학은 당대 유럽 사회에서 소수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을 뿐 대단한 반향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단 한 곳, 유럽의 변방 러시아에서 니체는 커다란 반응을 얻게 된다. 새로운 가치 창조에 대한 지적인 갈증이 가득했던 지식인들에게 니체 철학이 결정적인 촉매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이디스 클라우스는 검열이 심했던 러시아에서 - 비록 은폐된 형태로나마 - 니체 철학이 열광적으로 수용된 원인을 ‘러시아의 지적 경향’ 때문이라고 말한다. 러시아 문학 속 ‘잉여인간’의 출현, 그리고 이에 대한 도덕적 거부, 즉 러시아적 니힐리즘 전통에 대한 거부가 니체 철학과 유기적으로 결합했다는 해석이다. 저자는 니체 철학의 주요 개념 가운데서도 특히 도덕적 가치 체계와 행위의 주체로서 개인의 문제를 거론하며, 러시아적 니체 수용의 두 가지 유형인 대중화와 통속화의 다양한 양상을 분석한다.

“모든 가치를 뒤바꿔 버릴 수는 없을까? 혹시 선이란 악이 아닐까?” 니체가 던진 질문에 대한 통속적인 해석과 치열하게 논쟁하며 자신만의 확장된 해석을 제시한 작가들이 있었다. 저자는 종교적 의미를 넘어선 문화적 의미로서의 ‘신화’ 개념을 통해 작가들을 세 갈래로 나누어 분석한다. 4장에서는 문학적 성취 면에선 미약하지만, 대중적인 반응을 얻었던 보보리킨, 아르치바셰프 등과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검토된다. 이들의 작품에서 자기실현의 신화 체계가 어떤 방식으로 대중의 의식에 영향을 주었는가를 다루는 동시에, ‘신화의 실현’과 ‘신화의 설파’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서사구조로 분석된 니체의 자기결정권의 신화를 살펴본다.

다음 5장에서는 이른바 신비주의적 상징주의자들, 즉 인류의 정신적 부활을 탐색하며 ‘구신주의’(God-seeking)에 몰두한 벨리, 메레시콥스키, 이바노프, 블로크의 작품과 비평이 검토된다. 외견상 반기독교적이고 반종교적인 니체 철학이 어떻게 종교적인 신화창조의 맥락에서 작용했는가를 제시한다. 반면에 6장에서는 막심 고리키, 안드레예비치, 루나차르스키 같은 혁명적 낭만주의자들의 작품과 비평이 분석된다. 이른바 ‘건신주의’(God-building)로 알려진 사회적 신화가 니체 사상과 만나는 지점에 대한 주목이다. 이들은 대체로 니체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의 결합 가능성을 탐색하며 사회문화적 변화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추구했다.

“궁극적으로 그 누구도 책을 포함한 사물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 이상을 알아내지 못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하며 미래의 모든 독자에게 도전장을 내민 바 있다. 그는 그 자체로서의 영향이라는 것이 있는지, 사람들이 스스로의 경험에서 배우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확실히 러시아 독자들 대부분은 러시아의 낭만주의 작가들을 독해하는 데 익숙해진 통속적인 방식으로 니체를 읽었고, 더 젊고 보다 혁신적인 작가들조차도 니체의 철학에서 자신의 철학을 다각도로 강화시키는 감성을 발견했다. 결국 도덕의식의 혁명은 러시아의 전통, 러시아적 가치와 러시아의 신화를 다시 읽는 것이었지만, 니체 저작에 대한 독해 경험은 이러한 전통을 새로운 빛으로 조명했고, 이것이 차이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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