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상인들이 이끈 ‘가삼家蔘에서 고려 인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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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상인들이 이끈 ‘가삼家蔘에서 고려 인삼까지’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09.13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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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개성상인과 인삼업 | 양정필 지음 | 푸른역사 | 396쪽

 

우리나라는 국내외에서 인정받는 ‘인삼 종주국’이다. 이 책은 식민사관이 아닌 우리 눈으로, 약효에 관한 흥밋거리 일화 모음이 아니라 산업사의 측면에서 인삼업 전반을 아우르면서 인삼업의 주역인 개성상인의 역할에도 주목한 책이다.

역사 연구의 성패는 사료가 크게 좌우한다. 저자는 근현대 150년간의 인삼업을 살피기 위해 승정원일기 등 널리 알려진 사료는 물론 당시 개성부의 「호적세표」, 이성계의 사저를 중건하는데 쓰인 「목청전중건원조성책」, 『외상장책』 등 숨어 있는 자료까지 들춰내 인삼업 발달사를 촘촘히 그려냈다. 예를 들면 1832년 공식 홍삼 수출량 8,000근을 제조하기 위해 삼포가 얼마나 있어야 했는지, 일제강점기에 홍삼 수출을 독점한 미쓰이물산의 수익이 얼마였는지 등을 숫자로 보여준다. 이뿐 아니다. 초창기, 전성기, 소강기로 나눠 황실과 일제 총독부의 홍삼 정책, 이에 대한 개성상인의 대응과 삼업계 개편, 삼포 경영 자금과 노동력 등 인삼업을 입체적으로 분석한다.

당초 경상도 지역에서 시작됐던 인삼 재배는 어떻게, 왜 개성에서 뿌리를 내렸을까. 저자는 개성이 1820~30년대 인삼 주산지로 각인된 원인으로 의주상인과의 협력관계, 홍삼을 제조하는 증포소의 이전, 개성 특유의 신용제도를 꼽는다. 개성의 ‘지방 출상인’들이 재배법을 들여왔고, 농사만으로는 생계유지가 어려웠던 개성의 자연조건 탓에 개성 사람들이 수익성 높은 인삼 재배에 매달렸던 것이 큰 이유라는 설명이다. 여기에 중개인을 두고 무담보 신용대출이 가능한 개성 특유의 시변 제도 덕분에 6년이란 재배 기간에 투여할 자금을 융통하기 쉬웠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원료인 수삼을 구입하는 데 편리함 등을 이유로 당초 한강 변에 있던 증포소를 개성으로 옮겨온 것도 큰 몫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 책이 딱딱하지만은 않다. 개성 지역의 교육계몽운동을 이끈 개성학회의 회장을 지낸 ‘인삼대왕’ 손봉성, 차인제도를 이용해 무역회사 등 다수 ‘기업’을 운영했던 공씨 일가, 격심한 정책 변화와 일본인 삼적蔘賊의 횡포에 치여 한때 최대 삼포민이었다가 몰락한 끝에 결국 죽음에 이른 강유주 등이 곳곳에서 흥미를 돋운다. 1910년대 말 중국, 타이완은 물론 멀리 남양까지 백삼을 수출했던 고려삼업사를 설립한 박우현이 일제를 무시할 수 없었던 재계 거물로서 “일선동화론에 대해 극히 동정을 표한다”해야 했던 고충은 또 어떤가.

이 중 가장 눈길을 끄는 인물은 개성인삼상회를 운영했던 백삼 전문 상인 최익모다. 그는 백삼 허리를 금띠로 감싸고, 영롱한 상표를 붙여 봉한 뒤 화인花印을 찍은 상자에 담아 고급화를 꾀한 마케팅의 귀재였다. 이미지가 좋지 않은 ‘송백삼’ 대신 ‘고려인삼’이라 이름 지은 것도 그였다니 알 만하지 않은가.

인삼업에 관해 정사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가치를 높인다. 1898년 조정의 삼업정책을 통괄하던 이용익이 인삼업을 관영화하려 하자 개성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 ‘개성 민요’다. 이들은 “우리는 삼업에 의하지 않아도 선조의 제사를 끊이지 않을 수 있다”며 각자 소유한 인삼 종자를 모아 길에 뿌리거나 태워버렸다니 반발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나아가 인삼 농사를 다시 짓는 자는 화장하기로 결의까지 했단다.

일본인과 조선인 삼포주 간의 수삼 거래방식엔 화매和賣라는 것이 있었는데 착수금을 미리 주고 수확기에 잔금을 준 뒤 몰래 채굴해 가면 삼포주는 모르는 척 도난당했다고 신고하는 식이었다. 한데 일본인들이 이를 악용해 가짜 삼포주를 내세워 계약했다며 저가로 후려치거나 아예 삼적 100여 명이 병기를 들고 1,000칸 삼포를 도채盜採해 가기도 했다니 사업은 예나 지금이나 만만치 않은 듯하다.

19세기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150여 년의 인삼업 역사를 다각도로 꼼꼼하게 짚은 저자는 일제강점기 때 수출량을 이미 19세기 중엽에 생산했음을 들어 인삼업이 근대산업으로 일찍이 자리 잡았다고 주장한다. 굳이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만을 근대산업의 기준으로 삼을 것은 아니란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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