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문화사는 개별 문화과학에 맞선 메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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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문화사는 개별 문화과학에 맞선 메타 과학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2.09.13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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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식으로서 미디어 | 베르너 파울슈티히 지음 | 김성재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442쪽

 

이 책은 인류의 시작부터 고대까지 약 4만년의 미디어 문화의 역사를 조명했다. 여성, 사제, 샤먼, 사냥꾼, 무희, 음유 시인, 교사 같은 ‘인간 미디어’, 석비와 피라미드 같은 ‘조형 미디어’, 편지와 두루마리 같은 ‘기록 미디어’를 다뤘다. 이때 인간 미디어는 사회를 조화롭게 조종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민중에게 행동 방향을 제시하며, 불안한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 책은 초기 인류의 삶과 고대 문명을 창조했던 조상들의 휴머니즘적 사유 체계와 공동체 정신을 발굴한 기획이다.

독일의 미디어학자 베르너 파울슈티히는 인류의 시작부터 서기 2000년까지 존재했던 미디어의 문화적 핵심 의미를 다섯 권으로 서술했는데 이 책은 그 중 첫 번째다. 1권은 인류의 초기 즉 기원전 4만년부터 기원후 8세기까지 미디어 발달 과정을 다루었다. 지리적 범위는 유럽 문화권을 뛰어넘어 4대 문명 발상지인 수메르, 이집트, 인더스, 황하 문명을 포함하고, 북·중·남아메리카와 동북아시아(한국, 일본) 고대 문명에까지 이른다.

그동안 미디어문화사적 접근은 개별 미디어의 역사와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역사라는 두 가지 형식으로 존재했다. 전자는 개별 미디어의 탄생과 발전 과정을 다른 미디어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파악하지 못했고, 후자는 상이한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 개념-언어, 문자, 영화 등-을 상호 호환성 없이 다루었다. 이러한 방법론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저자는 개별 미디어 역사와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 역사 사이를 오가며 미디어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여기서 미디어문화사는 개별 미디어 역사의 연대기적 나열이 아니라, 서로 망으로 연결된 체계로서 모든 미디어의 역사를 의미하며 개별 문화과학과 마주한 일종의 메타 과학이다.

이 책에서 미디어는 특별한 기능에 따라 조직된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작동하는 복합적이고 제도화된 체계다.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 약 20개 미디어로 다룬다. 여성·히에로스 가모스·제물 의식·축제·춤·사제·샤먼·마술사·예언자·아오이데·음유시인·연극배우·교사·편지·드루이드 사제로 대표되는 ‘인간 미디어’, 토큰·셈 나무·피라미드·오벨리스크·부조·조각·석비와 같은 ‘조형 미디어’ 그리고 동굴벽·파피루스 두루마리·판·오스트라콘·제본·책으로 등장하는 ‘기록 미디어’가 그것이다. 

인간 미디어는 인간과 번식·화해·속죄·황홀경 등을 주관하는 각종 신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매개했다. 조형 미디어는 고대의 고도문화 사회에서 이승과 저승 간의 교량을 놓는 기능을 수행했다. 기록 미디어는 중세까지 상징 권력 형성과 사회 지배 수단으로 작용했다. 이 세 가지 미디어는 공통적으로 제식(祭式, 제례 의식)에 사용된 미디어로 사회 조종, 인간 행위의 방향 제시, 사회 질서의 안정화 기능을 담당했다.

지금까지 미디어는 일반적으로 인간들 간의 커뮤니케이션 수단 또는 상징체계로서 코드가 작동하는 구조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던진 질문은, “미디어가 사회 속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 아니면 “어떤 미디어가 사회 공동체 유지를 위한 당면한 과제를 가장 잘 해결하는가?”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미디어의 기능과 분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류 초창기에 인간 미디어인 여성이 가장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을 포함한 생물의 번식을 주관하는 여신과의 커뮤니케이션이었다. 또 여러 신들과 교감하는 사제의 기능은 제식과 제물 의식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때 인간 미디어는 사회를 조화롭게 조종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민중에게 행동 방향을 제시하며, 불안한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전 지구적으로 디지털 시대의 전형적인 사회적 미디어로서 스마트폰이 지배적인 위상을 누리고 있지만, 우리는 네트워크형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인간성 회복과 공동체 정신을 지향하는 포스트디지털 시대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여성, 사제, 샤먼, 사냥꾼, 무희, 음유 시인, 교사와 같은 ‘인간 미디어’, 석비와 피라미드 같은 ‘조형 미디어’, 그리고 편지와 두루마리 같은 고대의 ‘기록 미디어’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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