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체와 감각의 확장을 도모하다 - 뮤지컬 〈아일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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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와 감각의 확장을 도모하다 - 뮤지컬 〈아일랜더〉
  •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 승인 2022.09.13 0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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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연의 뮤지컬 인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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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한국 뮤지컬 시장은 국제적인 인지도를 더 높이고 있다.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영미의 유명 뮤지컬이 한국의 극장에서 초연되는 시점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으며 한국의 뮤지컬이 해외에서 제작되거나, 제한적이지만 해외 작품 투자에 성공하는 경우 역시 눈에 띈다. 가령, 2021년에 국내에서 초연된 <하데스타운>과 <비틀주스>(모두 2019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됨, <하데스타운>은 2019년 토니어워즈 베스트 뮤지컬상 수상), 2022년 12월 국내 초연을 앞두고 있는 <물랑루즈>(2019년 브로드웨이 초연, 2021년 토니어워즈 베스트 뮤지컬상 수상), 그리고 2022년 한국의 여름/가을 시즌 흥행작인 <미세스 다웃파이어>(2021년 브로드웨이 초연)는 현지와의 시차를 거의 느낄 수 없는 대표적인 대극장 라이선스 뮤지컬들이다. 해당 공연들로 인해 한국 시장에서도 브로드웨이의 이슈와 트렌드들을 동시대에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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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칼럼에서 다룰 뮤지컬 <아일랜더(Islander)> 역시 마찬가지다. <아일랜더>는 2017년 스코틀랜드의 멀 섬(Isle of Mull) 워크숍과 2018년 하이랜드(Highland)를 포함한 스코틀랜드 투어를 시작으로 2019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공연, 런던의 사우스워크 플레이하우스(Southwark Playhouse) 공연을 짧게 완료했다. 코로나로 라이브 공연이 어려워지자 <아일랜더> 프로덕션은 2020~21년 사이에 적극적인 오디오 및 영상화 각색 작업을 이어갔으며, 이 버전들은 해외 라이선스 공연을 가능하게 했다. 2021년에는 폴란드와 한국 공연이 성사되었다. 우란문화재단은 2019년 에딘버러 공연을 직접 관람한 후 2021년 기획프로그램 ‘우란시선’의 일환으로 <아일랜더>를 국내 초연하였으며, 현재 2022년 재연을 이어가고 있다. (제작 우란문화재단, 연출 박소영, 음악감독 23(김성수), 각색 및 번역 조민형,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 2022년 8월 10일~9월 18일.) 올해 4월에서 7월까지는 영국 오리지널 캐스트로 오프-브로드웨이 공연(Playhouse 46 at St. Lukes)이 완료되었는데, 따라서 <아일랜더> 한국 공연 역시 매우 이른 시기에 시도된 경우였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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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일랜더>가 국내에서 현지와 거의 시차 없이 초연·재연되었다는 사실은 코로나 시대의 대담한 ‘도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일랜더>는 앞선 브로드웨이 작품들과 달리 소규모 실험작에 속하는 영국 뮤지컬이다. 특별한 무대 장치가 없는 아카펠라 뮤지컬로서 여성 배우 2명이 마이크와 루프 스테이션(loop station)을 활용하여 소리와 음악을 만드는 방식을 사용한다. 음악에서 루핑(looping)은 ‘특정한 마디와 구간을 반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바, 관객은 무대 위에서 루프 스테이션을 통해 녹음-재생-반복되는 배우의 목소리에 계속 덧입혀지는 목소리의 향연을 듣게 된다. 따라서 <아일랜더>의 실험성은 바로 이 지점, 매체의 확장을 통한 ‘감각의 확장’을 도모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연주자와 배우가 역할을 나눠 연행을 라이브로 진행하거나 스피커를 통해 재생되는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배우들의 라이브 연행을 관객이 보고 듣는 방식의 기존 뮤지컬 개념을 뛰어넘어, <아일랜더>는 배우에게 연주자 및 공연의 흐름을 만드는 사운드 오퍼레이터 역할을 부여한다. 그리고 관객은 비선형적인 시간을 전제해야 했던 녹음과 재생이 ‘디지털적 기억’으로 라이브 연행과 결합되는 전 과정을 지켜봄으로써 뮤지컬 음악 개념의 확장을 감각하게 된다. <아일랜더>가 2019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최우수 뮤지컬’상을 수상한 것은 이러한 공연 미학에 힘입은 결과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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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더>의 이러한 공연 문법은 주제와도 잘 부합한다. 첫 넘버인 ‘The Splitting of the islands’는 공연의 미학을 보여주고 주제를 암시한다.

     흘러 흘러 바다로 간 강물은 다시 돌고 돌아 뭍으로 돌아오네 
     하나의 섬 삼켜버린 미움과 화, 하나였던 사람들 선택해야 해
     저 바다 향해 떠난 이들, 이 곳에 남아 지킨 이들 
     분노한 바다 성난 하늘 울부짖는 찢긴 섬
     천둥이 쾅 울리는 땅, 조각나 갈라진 하늘과 땅 
     몸부림쳐 잡아봐도 강물도 사람도 갈라졌어
     오- 
     천둥이 쾅 울리는 땅, 하나였던 섬은 이제 없어 
     몸부림 쳐 잡아봐도 하나였던 섬은 둘이 됐어 

공연은 가상의 장소인 키난(Kinnan) 섬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키난 섬은 마을 사람들의 ‘이주’가 필요한 상태에 놓여 있다. 본토(Mainland)는 낙후되어 가는 섬에 지원을 끊었고 이에 따라 섬의 인구는 자꾸만 줄어가고 있다. 섬 마을에 유일하게 남은 15세 아이 에일리(Eilidh, 김청아)는 본토로 일을 하기 위해 떠난 엄마 대신 자꾸만 죽을 준비를 하는 할머니와 살고 있다. 사건은 에일리가 섬에 떠밀려온 고래를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고래가 죽어가며 부르던 노래를 번역하고 싶었던 에일리는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 아란(Arran, 홍지희)을 만나면서 나와 너, 인간과 자연, 바다와 육지 사이의 이해와 소통을 배운다. 그리고 고래 지킴이 아란이 살고 있는 세타 섬(Setasea)은 원래 키난 섬과 하나였던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공연은 아란이 하는 말과 행동을 믿지 못하여 화를 내던 에일리가 결국 안개에 싸여 고래와 함께 떠다니던 세타 섬을 발견하고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법’을 깨닫는 결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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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넘버는 키난 섬과 세타 섬의 분리를 이야기하며, 키난 섬의 현실은 세타 섬과 분리되기 이전 신화적 시간을 회복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처음부터 공연은 가상의 시간과 신화적 공간을 극의 배경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넘버의 하이라이트인 오- 부분부터는 루프 스테이션의 효과가 사용되는 구간으로, 배우들의 목소리가 하나하나 쌓임으로써 화성과 배음이 확장되는 현상을 만든다. 분리와 갈등의 역사를 소통과 확장의 미래로 가져가자는 메시지가 무대 미학으로 표출되는 순간이다(루프 스테이션을 활용한 이와 같은 효과는 넘버 전체에서 생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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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공연을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하려면 작품 속 키난 섬이 스코틀랜드 서쪽 해안에 위치한 멀 섬(Isle of Mull)을 모델로 하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작품의 창작진들과(구성과 연출 에이미 드레이퍼(Amy Draper), 대본 스튜어트 멜튼(Stewart Melton), 작곡과 가사 핀 앤더슨(Finn Anderson)) 오리지널 배우들은 멀 섬에서 워크숍을 수행함으로써 공연을 구체화시켰으며 이후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투어를 거쳤다. 공연에서 보이는 ‘스코틀랜드적’인 요소들, 즉 신화적 감각과 풍부한 자연성은 공연의 아이디어가 구체화되던 최초의 시공간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잉글랜드와의 관계 속에서 저지대(Lowland)와 고지대(Highland)가 이중적 정체성을 형성하던 스코틀랜드의 과거,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의 틀로 확장되는 스코틀랜드의 역사와 주제적 관련이 있을 것이다. 국내 공연은 가상의 공간과 보편적 주제를 부각시켜 스코틀랜드의 지역성을 희석시켰다. 대신 비어 있는 둥근 무대 바닥 전체를 캔버스 삼아 조명으로 공간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출렁이는 바다, 떠오르는 고래, 일렁이는 파도, 갈등하는 섬 마을 등 무대에 그림을 그리듯 공간성이 표현되었다. 이로써 소리와 이미지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공연 미학은 관객을 압도하기에 충분했지만, 공연이 직관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범위와 심도에는 분명 한계가 있어 보였다. 또한 반복적인 코드와 규칙적인 리듬에 갇힐 수밖에 없는 루프 스테이션의 한계 때문에 넘버의 스타일이 다소 단조로운 것 역시 약점으로 보였다. 

그러나 뮤지컬 <아일랜더>는 새로운 시도가 쉽지 않은 국내 뮤지컬 시장에서 긍정적인 신호를 준다. 새로운 시도를 인정하고 향유하려는 적극적인 관객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 무대와 객석의 집중력이 하나로 통합되어 전체 공연의 흐름을 만들어간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소통과 확장이라는 동시대 주제에 오롯이 집중한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이다. 점차 공연에 여유와 탄력이 생겨 관객층을 확장할 수 있다면, 공연의 목표가 한층 더 높은 수위에서 달성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런던대학교(로열 할러웨이)에서 연극학 석사, 고려대에서 국어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국제한국학센터 연구교수, 워싱턴 대학교(시애틀) 동아시아학과 객원연구원,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공연예술스쿨 교수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저로는 “청년 테마로 본 뮤지컬: 팬덤의 참여욕망과 수행성에 대한 고찰”, “라이선스 뮤지컬의 현지화에 대한 일고찰”, “확장하는 보편, 타협하는 로컬리티”, “해방 후 오영진의 좌표와 음악극 실험”, “만들어진 비애와 감성의 연대”, 미국 뮤지컬과 국가정체성의 형성(공역), 멜로드라마적 상상력(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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