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공동체를 탄생시킨 임진왜란과 만들어진 전통으로서의 거북선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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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공동체를 탄생시킨 임진왜란과 만들어진 전통으로서의 거북선 탐구
  • 김평원 인천대학교 교수·국어교육학과
  • 승인 2022.09.12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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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책, 나의 테제_ 『임진왜란과 거북선 논쟁의 새로운 패러다임』 (김평원 지음, 책바퀴, 252쪽, 2022.08)

 

『임진왜란과 거북선 논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읽은 독자는 우리 민족주의의 기원을 ‘임진왜란’으로 설정하고, 거북선의 격군들이 작은 어선에서나 사용하는 ‘노(櫓)’를 저은 것이 아니라, 대형 ‘도(櫂)’를 저었다는 생소한 주장과 만나게 될 것이다. 역사 교과서를 통해 민족주의의 기원을 1919년 3.1 운동이라 배웠고, 거북선 2층 공간에서 격군들이 힘겹게 ‘노’를 젓는 장면을 영화에서 보았던 독자들에겐 다소 어리둥절할 내용이다. 

1592년(선조 25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1598년(선조 31년)까지 거의 모든 생활 터전이 전쟁터가 될 정도로 국토의 대부분을 유린당했으며, 약 백만 명의 인구를 죽음에 이르게 한 충격적인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을 겪었던 당시 조선 백성들은 생활 터전을 침략한 외부 침입자들과 구분되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자각하였고, 이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해 하나로 뭉쳐 저항하였다. 지배층의 무능을 탓하면서 왜적에게 굴복한 것이 아니라, 농민 또는 천민들까지 하나로 뭉쳐 왜군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자신이 거대한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겨레 의식을 깨닫게 된 것이다. 

서구에서는 민족의식을 ‘근대의 산물’로 규정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16세기 말에 민족의식으로 규정해도 큰 무리가 없는 강력한 공동체 의식이 형성되었다. 민족의 정서적인 조건을 강조한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가 16세기 말 조선에서 형성된 것이다. 16세기 말, 왜군과의 전면전을 통해 형성된 상상의 공동체는 혈통과 언어, 문화를 강조하는 민족주의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형성된 우리의 공동체 의식은 국민을 단합시키기 위해서 지도층에서 주입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외침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17세기 초부터 다양한 기념물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20세기 중반까지, 3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조선의 위정자들은 임진왜란을 통해 자생적으로 피어난 겨레 의식을 고양하고 유지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왜적에 맞서 싸운 의병이나 승병의 전공을 강조하게 되면 조정의 무능함이 드러나게 되고, 이는 민심의 이반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임진왜란을 겪으며 자생적으로 형성된 ‘상상의 공동체’를 300년이 넘도록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이야기의 구조’ 즉 ‘내러티브(Narrative)의 힘’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무찌른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으며, 세대를 거듭할수록 조선의 화약 무기와 거북선의 위력은 더욱 강조되었다.

거북선은 민족적 자긍심을 고양하는 실체로서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세상의 주목을 받을 때마다 거북선 역시 주인공이 되었다. 거북선은 유물이 없으므로 오늘날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은 드라마나 영화의 세트나 교과서 또는 위인전 삽화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에 불과하다.

거북선의 존재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거북선의 이미지는 후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전통’이다. 루이 다비드의 그림들이 나폴레옹을 영웅의 이미지로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거북선의 이미지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각종 매체에 의해 창조된 이미지일 뿐이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거북선과 관련된 논쟁들은 『이충무공전서』에 기록된 조선 후기 거북선을 추정하여 재현하는 과정이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의 이순신 거북선을 상상하여 재현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 관한 다양한 논쟁들은 철갑선 논쟁, 용머리 논쟁, 내부 구조 논쟁 등이 주된 쟁점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사용했던 거북선의 구조와 형태에 관련된 사항들이 공신력 있는 직접 사료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논쟁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거북선 내부는 2층이었을까? 3층이었을까? 2005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2층 구조를 주장하는 참모와 3층 구조를 주장하는 참모의 논쟁을 ‘복원력’이라는 용어까지 언급하면서 상세하게 소개하였다. 특히 3층 구조로 제작한 거북선이 복원력을 상실한 후 침몰하는 충격적인 장면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2022년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는 3층 구조 거북선이 적선에 충돌한 다음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문제점을 부각하고 2층 구조 거북선을 제작하여 해결한 것으로 서사를 전개하였다. 드라마와 영화 모두 3층 구조설을 비판하고 2층 구조설을 지지한 셈이다.

반 세기동안 계속된 거북선 내부 구조 논쟁은 노(櫓)젓기 패러다임 속에서 거북선 실물 재현 사업을 둘러싼 주도권 경쟁이었다. ‘한국식 노’는 2층 구조설과 3층 구조설 양측에서 모두 인정하는 기정사실로서, 지난 반세기간 이를 학술적으로 반박한 사례가 없었다. ‘한국식 노’는 거북선 연구자들의 사고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았지만, 뒷받침할 수 있는 사서의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이를 사실로 단정해버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지난 반 세기간 두 차례의 거북선 구조 논쟁을 거쳐 3층 구조설이 정설이 된 지금, 격군과 전투원이 동시에 공간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한국식 노’ 패러다임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다른 가능성을 열어둘 시점이 되었다. 2층 공간에서 격군과 전투원이 함께 활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물살을 휘젓는 ‘노’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물살을 밀어내는 ‘도’를 젓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노’가 아니라 ‘도’를 사용하는 방식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승조원의 2/3에 해당하는 수많은 격군들이 사용하는 공간을 배의 중앙으로 설정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선박의 복원력이 향상됨은 물론, 격군과 포수 또는 사부가 동시에 한 공간을 공유하면서 각자의 임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된다. 

거북선 내부가 2층이었는지 3층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노(櫓)를 저었는지, 아니면 도(櫂)를 저었는지가 더 중요한 쟁점이다. 앞으로 거북선 내부 구조 논쟁은 노(櫓)젓기 패러다임에서, 도(櫂)젓기 패러다임으로 전환될 것이다.

 

☞ 기존 노 젓기 패러다임으로 추정한 통제영 거북선

☞ 새로운 도 젓기 패러다임으로 추정한 통제영 거북선

 

김평원 인천대학교 교수·국어교육학과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교육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읽기, 쓰기, 말하기 교육에 적합한 텍스트는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든 지식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가 융합된 지식이라는 신념 아래 인문·사회·자연·공학 등 여러 학문 분야의 글쓰기와 말하기 교육을 꾸준히 연구해 왔으며, 십여 년간 통합 교과 논술과 한국형 융합 프로젝트 교육 활동을 일선 교육 현장에 적용해 왔다. 제1회 젊은 국어교육학자상(2011, 국어교육학회), 해동상 공학교육혁신 부문(2011, 한국공학한림원)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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