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변화시키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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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키려면...
  • 안정오 고려대 명예교수·독어학
  • 승인 2022.09.11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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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세상을 변화시킨 독일인들』 (안정오 지음, 푸른사상, 288쪽, 2022.08)

 

독일 역사를 살펴보면 독일은 11세기에 오토 대제에 의하여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으로 가톨릭 국가들의 수장 국가가 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국가는 많은 이질적 요소와 이민족들이 가톨릭 종교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된 국가였다. 독일 가문에서 대제가 나왔지만 가톨릭의 본산인 로마의 그늘은 지워지지 않았다. 중세 후기에는 오스트리아에 근거를 둔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주도권이 옮겨가게 되고, 독일의 전신이었던 프로이센이 북방에서 새로이 발흥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가톨릭 국가인 신성로마제국의 여러 왕국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 바이에른 등 모든 게르만 민족이 세운 국가들은 항상 그 민족들만의 영토와 정체성에 매우 집착하였다.

『세상을 변화시킨 독일인들』에서는 독일역사에서 평범한 독일인들이 민족정신과 애국심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던 것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예를 들어 16세기에 교황 레오 10세의 면죄부 판매가 독일의 수도사 마르틴 루터의 반발에 부딪히면서 독일 땅에서는 민족주의 사상이 거국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즉 1517년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의 면죄부 판매를 계기로 95개 조항 반박문을 비텐베르크성 교회 정문에 내걸어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지적하였다. 이는 한편으로는 부패한 종교를 개혁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프로이센의 돈이 로마로 흘러들어가는 것에 대한 반대였다. 부패한 로마제국에 일침을 가하기 위해서 루터는 철저히 신학적 이론으로 무장하여야 했으며, 자신의 올바른 신념을 위하여 죽음도 불사해야 했다. 그 결과 유럽의 종교계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독일민족들을 하나로 묶는 민족정신이 서서히 등장할 수 있었다. 

19세기 초에도 독일은 인접국가인 프랑스의 침략을 받았고, 독일인들은 (프로이센) 영토의 상당부분을 상실하고 열패감에 빠졌다. 이때 프로이센은 국가를 개조하였는데, 그중에 교육개혁이 들어 있었다. 빌헬름 폰 훔볼트는 교육부의 수장으로서 교육개혁과 변화를 통하여 국민들을 위한 의무교육 제도를 완성하여 프로이센 교육철학을 확립하였다. 그는 이러한 교육철학을 완성하기 위해 교육부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교육현장의 문제점과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프로이센 왕에게 수시로 보고하였으며, 도출된 교육적 의견과 철학이 법령화되고 교육현장에 적용되도록 노력하였다. 이를 통하여 프로이센의 교육현장은 변화되었고, 지금도 독일교육현장은 정치로부터 상당히 독립적이고, 대학교까지 학비 없이 다닐 수 있는 제도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그의 개혁 뒤에는 독일민족을 새로이 교육시켜 우등 국민으로 개조하겠다는 의지가 강력하게 숨어 있었다.  

바그너는 수많은 독서를 통하여 독일의 민족정신을 발견하였고, 당시에 모든 모티브와 이념이 이태리와 프랑스에 지향되었던 것을 과감하게 떨쳐버리고, 순수한 독일만의 소재와 동기들로 오페라를 완성함으로써 독일의 음악과 오페라의 변화를 과감하게 시도하였다. 바그너는 비록 개인주의자로서 경제관념이 없었고, 가정파탄을 두 번이나 맞았지만, 음악이론에 대한 전문성과 음악에 대한 열정을 끝까지 견지함으로써 그가 처한 이태리 종속적인 오페라 환경을 바꿀 수 있었다.  

영국에 비해 조금 늦었지만 산업화에 접어든 프로이센에서의 노동자 계층은 새로운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엥겔스는 시대의 격변기에 새롭게 등장한 노동자들의 신분과 복지에 무한한 관심을 가지고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새로이 정립시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부단히 마르크스와 함께 이론정립을 위해 저술활동을 하였고, 노동현장에서 수많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독일을 통일시키려던 대독일주의와는 반대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독일을 통일시키려 했던 소독일주의를 완성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정치사회적으로 순수한 독일을 만들고자 부단히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한편으로는 외교적으로 조약과 회유를 통하여 인근 나라들을 설득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도 불사하였다. 그래서 순수한 독일인들을 위한 독일제국을 정치적으로나 영토적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이 책에서는 황제나 교황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서 독일적인 생각을 가지고 각자의 분야에서 활약하며 주어진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던 독일인들에 주목하였다. 이들이 그렇게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주요한 동기들은 나름대로 그들 분야에서 결핍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인접 국가로부터의 열패감, 민족정신의 결여, 국가 개조에 대한 염원 등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독일은 과거를 반성한 후 경제적 부흥과 통일을 이루어냈고, 전범국이라는 오명을 벗고 국제적 신뢰를 얻어내어 유럽연합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분열된 독일을 순수한 독일로 만들려는 변화의 노력이 16세기부터 여러 분야에 걸쳐 시도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책 속으로

“로마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사원의 건축을 위해 은행가 푸거에게 엄청난 돈을 빌렸다. 이 경제적인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 교황청은 면죄부 판매를 생각해냈고, 이 면죄부를 독일에 집중적으로 팔았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비리들이 생겨났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이러한 비리를 고발하고자 1517년 비텐베르크(Wittenberg) 성당 문 앞에 ‘95개 조항 반박문’을 붙이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종교적으로 여러 분파가 생겨나고(가톨릭, 개신교, 개혁파) 사회적으로도 가톨릭 보수 집단, 시민 개혁 집단, 혁명적 집단 등으로 분화되었다. 결국은 보수와 개혁 간의 갈등, 농민과 자본가 간의 갈등, 구교와 신교 간의 갈등이 종교 분쟁으로 이어졌다. 다행히도 분쟁은 1555년에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和議)로 종결되었다. 하지만 신앙의 자유는 개인이 아니라 제후의 결정에 따르도록 결정되었다. 즉, 어떤 지역의 종교는 그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가 가톨릭과 개신교 중 하나를 선택하여 결정할 수 있게 하였고 그곳에 사는 거주민은 제후의 종교를 따라야 했다.” (세상을 변화시킨 독일인들, 16~17쪽)

“칸트는 이성의 독단적인 사용을 경고한다는 의미에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라는 비판서들을 저술하였다. 이는 그가 결코 이성을 정말로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보다 정제된 이성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의 관심은 르네 데카르트(1596~1650)가 무한하다고 주장한 이성과 영국의 경험론에 의해 제기된 인간 인식 능력에 있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이성은 무한하다고 권리를 부여하지만, 칸트는 이성의 한계를 명확히 했다. 그리고 영국 경험론에 의해 제안된 이론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리는 작업을 했다. 그래서 그는 인식에서 경험론자들과는 다르게 어떤 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의 판단 방식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대상은 우리의 인식에 따르는 것이지 인식이 대상에 따르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를 위해 칸트는 ‘비판’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었고, 초감각적인 것으로부터 경험을 분리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세상을 변화시킨 독일인들, 121쪽)

“엥겔스는 1844년 9월에 영국에서 독일의 부퍼탈 바르멘으로 돌아온 후에 이전과는 다른 변화된 모습을 보였다. 1844년 6월에 프로이센 정부는 노동자들의 커다란 반발에 부딪치고 있었다. 즉 프로이센의 변방인 슐레지엔에서 열악한 작업환경과 낮은 보수에 불만을 품은 직조공들이 봉기했고, 이것을 계기로 다른 분야의 노동자들까지도 스트라이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런 노동자들의 봉기는 프로이센 정부에 불만을 품은 라인강 부근의 시민 조직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의 편에서 모든 생각과 활동을 집중했던 엥겔스도 당시에 야당을 지지하기 위해 라인란트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자인 모제스 헤스와 접촉했고, 헤스와 협력하여 화가들이나 시인들과 함께 1844년 가을부터 부퍼탈 엘버펠트에서 여러 가지 노동지원 활동들을 열성적으로 하였다. 1845년 2월에 엘버펠트 연설에서 엥겔스는 공산주의 사회에 대해 소개하고 홍보했는데, 이로 인해 그는 지방정부로부터 모든 공적 집회를 금지당하기도 했다. 그는 언더그라운드에서 (당시의 정부가 주장하는) 불법적으로 일하는 사회주의 집단들을 서로 연결하여 공동전선을 펴려고 노력했으며, 영국 사회주의자 그리고 차티스트주의자들과의 접촉도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갔다.” (세상을 변화시킨 독일인들, 232~232쪽)

 

안정오 고려대 명예교수·독어학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글로벌비즈니스대학 독일학 명예교수.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독어학 석사학위를, 독일 부퍼탈(Wuppertal)대학교에서 독어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독일 보훔(Bochum)대학교 동양학부에서 외국인 전임교수로서 비교언어학, 일반언어학, 한국어 등을, 튀빙겐(Tuebingen)대학교에서 교환교수로 한국 문화역사와 한국어를 강의했다. 저서로는 『Grammatik aus der Fremd- und Eigenperspektive(외부 관점과 내부 관점에서 본 문법)』, 『기호학으로 세상 읽기』(공저), 『훔볼트의 유산』, 역서로는 『이차 언어 습득』, 『훔볼트의 상상력과 언어』(공역), 『비트겐슈타인』, 『미드』, 『에코』, 『기호학의 전통과 경향』, 『언어의 민족적 특성에 대하여』 등이 있고, 고등학교 교과서 『독일어권 문화』를 공동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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