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인물 논평 … 중국과 한국 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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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물 논평 … 중국과 한국 ⑭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2.09.11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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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

중국에서 높이 숭앙되는 인물을 한국에서 우러러보기나 한 것은 아니다. 과감한 논평을 하면서 비판정신을 보여준 글이 적지 않다. 좋은 본보기 몇 개를, 인물 연대순으로 든다. 

<사기>>(史記)에서, 무왕(武王)이 주(紂)를 치러 나서자 백이가 말고삐를 잡고 말렸다고 하고, 무왕이 은(殷)을 없애자, 백이는 수치스럽게 여겨 수양산(首陽山)에서 굶어 죽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논한다. 

백이는 천하의 대로(大老)요 현인(賢人)이므로, 서백(西伯 주 문왕)이 일찍이 예우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을 때, (무왕) 좌우에서 무력으로 해치려고 했다. 아, 선왕이 예우하던 신하이며, 천하에서 대로요 현인이라는 분을, 좌우가 무력으로 해치려고 대들었다. 무왕이 “내가 아니라 무력이 그렇게 한 것이다”라고 해도 되는가. 

백이(伯夷)에 관해 박지원(朴趾源)은 이렇게 말했다. (<伯夷論>) 빼어난 선비인 백이가 무왕을 도와주려고 했는데, 물리친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그 짓은 군사들이 했을 따름이므로 자기는 책임이 없다고 책임을 전가한 것은 더욱 잘못되었다고 했다. 사실 여부가 불분명한 일을 구태여 시비한 것은, 백이와 무왕을 선비와 군주의 본보기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고결한 선비에게 행패를 부리는 더러운 군주를 나무라고자 했다.

옛날에 자신을 죽여서 인(仁)을 이룬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초(楚)나라의 굴원이 취한 태도는 이와 다르다. 굴원은 바르고 곧은 뜻을 가지고 군주의 총애를 받고 국정을 오로지 도맡았다고 하니, 동료들의 질시를 받는 것이 당연했다. 군주를 깨우치지 못할 것을 알아차리고 종적을 감추고 멀리 숨어, 군주의 잘못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차차로 없어지게 했어야 할 것이다. 

수척한 얼굴로 못가로 다니면서 시를 읊고 <이소>(離騷)를 지은 데 원망하고 풍자한 말들이 많아, 이것은 또한 군주의 잘못을 드러낸 것이다. 다시 물에 몸을 던져 죽어서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길이 그 군주를 나쁘게 여기도록 했다. 애석하다. 굴원은 죽지 말았어야 하는데 죽은 일이여! 슬프다.

굴원(屈原)의 죽음에 대해 이규보(李奎報)는 이렇게 논평했다. (<屈原不宜死論>) 군주가 나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군주의 총애를 받고 국정을 도맡으면 참소를 당할 것을 예상해야 한다. 화가 닥치면 몸을 숨기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한 굴원은 어리석다고 했다. 죽지 말았어야 하는데 죽어 더욱 어리석다. 슬기로움을 힘으로 삼는 선비가 어리석어 무력해지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이다.

사람의 정리 상 도저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원래 누구든지 마음을 모질게 하고 도리를 어겨 가면서 본성과 위배되게 하지를 못하는 법이다. 평범한 사람들도 한 그릇 밥을 대접받으면, 꼭 갚아주겠다고 생각하는 법인데, 더구나 영웅의 자질을 소유한 자로서 만승(萬乘) 천자(天子)의 존귀한 자리를 차지하고 상벌의 권한을 휘어잡고 있는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런데 만약 한고조가 기신(紀信)에 대해서 행했던 것처럼, 그만 자기 생명을 구해 주는 덕을 베풀고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절개를 지켜 사직을 세우는 공을 이룩한 사람을 유독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조그마한 보답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인간의 정리에 가까운 일이라고 하겠는가.

한고조(漢高祖)의 처신에 대해 장유(張維)는 이렇게 나무랐다. (<漢祖不錄紀信論>) 항우에게 몰릴 때 기신이 자기 대신 죽은 덕분에, 한고조는 살아나고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자, 판단력을 잃어 기신의 공적을 무시했다. 아무리 무지한 사람도 잊지 않는 보은의 도리를 저버린 것은, 한고조가 타고난 인성이 나빠서라기보다 차등의 정상에 오르면 모든 가치가 전도되기 때문일 것이다. 아주 조심스럽게 한 말에 날카로운 비판이 들어 있다.

(도연명이 살던) 때는 남북이 분열되었다. 난리가 계속되어 백성은 편안할 날이 없고, 내란이 일어나서 국가가 장차 기울어지게 되어, 의사나 지사들이 할 일을 할 때인데, 도연명은 전원으로 돌아갔다. 시를 보면 <걸식>(乞食), <빈사>(貧士), <원시>(怨詩), <음주>(飮酒) 등에서 다만 시달리고 무료함을 이겨내지 못하여 짐짓 술에 의탁해서 세월을 보냈을 뿐이다. 

도연명의 즐거움은 춥고 배고픈 것 밖에 있지 않으며, 그 절개 역시 술 취한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만종의 녹이 의롭지 않다 하고 전원을 달게 여긴 것은, 춥고 배고픔을 즐거움으로 삼았기 때문이며, 술에 의탁해서 끝내 그 지조를 지켰으니 취한 것이 곧 절개가 되었다. 

도연명(陶淵明)의 삶을 정도전(鄭道傳)은 이렇게 시비했다. (<讀東亭陶詩後序>) 앞뒤의 말이 다르다. 앞에서는 사회적 책임을, 뒤에서는 내면적 각성을 말했다. 둘이 따로 놀게 하지 말아야 한다. 내면적 각성을 확고하게 하고, 사회적 책임을 수행해야 하리라. 정도전이 조선왕조를 일으키는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고, 공적이 피살로 바뀐 것은 내면적 각성이 부족해 물러날 줄 몰랐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논란의 대상이 있으면 향상을 이룩해, 후진이 선진일 수 있다. 중국인은 한국의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논란의 대상을 발견하지 못하면 독선이 굳어져, 선진이 후진일 수 있다. 한국이 계속 선진으로 나가는 동안에 중국은 줄곧 후진으로 물러나 오늘에 이른 것을 중국에서는 모른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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