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을 표절이라 부르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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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을 표절이라 부르지 못하고
  • 함규진 서울교대·정치사상
  • 승인 2022.09.0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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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십여년 전쯤이다. 서점에서 뭔가 끌리는 제목의 책을 집어들어 책장을 휘휘 넘기며 훑어보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익숙한 문장들이 자꾸만 나오는 게 아닌가. 다름 아닌 내가 전에 쓴 책들의 문구였다! 소스라친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냄새가 나는 문장 하나하나를 메모했다. 서점에는 미안한 일이었으나, 한 권이라도 그 책을 사서 표절쟁이에게 인세를 보태 주기는 싫었다. 결과적으로, 전체의 약 30퍼센트 정도가 내 책의 문장을 그대로 베낀(‘였다’를 ‘이었다’ 정도로 살짝 손질한 것만 빼고) 것이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내 책을 냈던 출판사에 연락했다. 출판사 쪽에서도 깜짝 놀라 알아보겠다고 했다. 

얼마 뒤, 표절 책을 낸 출판사가 접촉해왔다. 그쪽은 표절임을 인정하면서, 미안하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왕 낸 책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며, 금전적 보상을 제안했다. 나는 굽히지 않았다. 돈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며, 표절 책을 냈음을 공지하고 책을 전량 수거, 폐기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지 않으면 고소하겠다고. 그러자 그쪽은 이렇게 대답했다. “법적으로 따지면 우리가 이길 텐데요.”

누가 봐도 표절이 명백한데, 법으로는 내가 진다고? 그럴 리가 있나 생각하며 고소장을 넣었다. 결과는? 그쪽 말대로였다. 우리가 내세운 변호사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글자 하나하나까지 백 퍼센트 똑같지 않으면요. ‘였다’를 ‘이었다’로 바꾼 정도라도 말이죠. 재판에서는 표절이 명백하다고 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러면 결국 누가 더 비싼 변호사를 쓰느냐에 따라 승부가 나요.” 그 변호사는 그렇게 비싼 사람이 아니었고, 나는 표절 책 출판사에 배상금을 물어줘야만 했다.

벌써 상당히 지난 일이니 지금은 나아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표절 문제는 일반 교양서적이 아닌 학술논문의 세계에서는 그때부터 이미 엄격했다. “저자가 인용부호와 정확한 출처표시 없이, 6단어 이상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표절로 보고 있으며, 도판의 경우에도 까다로운 기준이 있다. 인용이라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전거를 표시하지 않았을 때도 문제가 된다. 자동적으로 표절 의심도를 측정하는 프로그램도 있어서, 학위논문 등을 제출할 때는 반드시 그 검증을 거치도록 되어 있다. 이공계의 경우 이런 기준들이 인문계 중심으로 만들어졌으며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비판도 있으나, 표절 기준이 점점 강화되면 되었지 완화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그렇지만 정치권 인사가 논문 표절 시비에 휘말릴 때는 또 이야기가 다른 듯하다.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논문 표절 의혹을 견디지 못하고 사퇴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적어도 얼마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왠지 요즘은 표절 의혹이 불거져도 ‘상대 진영의 근거 없는 마녀사냥’이라며 역공을 펼치고, 대충 덮고 넘어가는 일이 많이 눈에 띈다. 최고권력자와 가까운 사람의 경우 너무도 오랜 기간에 걸쳐(이미 말한 프로그램을 돌리면 몇 분 만에 판정이 나는데) 논문 표절 여부를 따지고 또 따지고 다시 따진 끝에 표절 혐의 없음의 판정을 받았다. 그러자 그것이 권력의 눈치를 본 판정이라며, 일부 대학 교수들이 자체적으로 검사해 ‘이보다 더 표절일 수는 없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면 안 된다’는 원칙은 『십계명』에서부터나, 『팔조법금』에서부터나 명백하게 이어져 왔다. 다른 사람이 고심해서 써낸 문장과 아이디어를 훔치는 일도 예외가 아닐 터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비학술 표절 시비는 돈의 벽을 넘지 못하고, 학술 표절은 권력의 벽을 넘지 못하는가? 지금의 정권이 진정 공정성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며 출범한 정권이라면, 이런 폐단을 반드시 뿌리뽑도록 정책과 입법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함규진 서울교대·정치사상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100년 전 역사에서 통일을 묻다』, 『108가지 결정』, 『조약으로 보는 세계사 강의』 등 다수가 있으며, 『공정하다는 착각』, 『위험한 민주주의』, 『실패한 우파가 어떻게 승자가 되었나』, 『정치 질서의 기원』, 『대통령의 결단』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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