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으로서의 문학, 경계를 넘어서는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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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으로서의 문학, 경계를 넘어서는 체험
  • 이명원·경희대 교수/문학평론가
  • 승인 2020.0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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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의 에크리티시즘]

경희대학교에서 배분이수 과목으로 나는 두 개의 문학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고전강독: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와 <고전강독: 루쉰(魯迅)>이 그것이다. 나쓰메 소세키 강좌는 2019년 2학기에 최초 개설해서 진행했고, 다가오는 2020년 1학기에는 루쉰 강좌를 진행할 예정이다. 경희대의 배분이수 과목은 과거식이라면 교양 선택 과목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강좌를 진행하고 설계하는 과정에서 ‘교양으로서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나는 자주 고민한다.

2019년 2학기에 나쓰메 소세키 강좌를 개설했을 때, 나는 과연 이 강좌가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우려를 잠시 했다. 나쓰메 소세키는 흔히 일본의 ‘국민작가’로 평가되어 왔는데, 당시의 한·일 관계는 한국 대법원에서의 일제하 강제동원 배상 판결 직후, 일본의 경제보복과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조치로 매우 경색된 상황이었다. 일본의 아베정권은 식민지 지배책임에 대한 부정은 물론 반도체 소재 수출제한 등 식민지 가해 역사 부정 및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을 통해 정치적 갈등을 가파르게 고조시켰다. 이에 대한 한국정부의 지소미아 협정 종료를 포함한 일련의 대응조치와 민간에서의 ‘NO! JAPAN’ 운동과 불매운동 역시 한·일 간의 경색국면을 생활세계 안에서조차 심도 깊게 경험하게 만든 동력으로 작용했다.

▲ 나쓰메 소세키
▲ 나쓰메 소세키

이런 상황이었기에, 나쓰메 소세키를 강의하는 나 자신이나 수강생인 학생들 역시 ‘소세키 문학’을 단지 ‘가치중립적인 문학’으로서만 탐구하는 일은 어려울지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잠시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치중립성, 혹은 순수한 문학이란 실현 불가능한 개념적 허구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민국가의 경계는 현재의 역사적 긴장을 초래한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식민주의와 연관된 상흔·정념·긴장이라는 또 다른 내면적 경계 안에서, 내셔널리즘을 환기하는 동시에 그것을 탈구축해야 한다는 이율배반 상황을 초래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작가와 작품에 대한 ‘해석학적 충돌’을 끝없이 산출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인간주의 혹은 보편주의적 인류애의 문제도 동시에 음미할 것을 요구하는데, 강의실 안에서 그것을 생생하게 사유하고 추체험하게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더구나 교양과정 안에서의 ‘문학 강의’란 전공으로서의 ‘문학 연구’와는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전공으로서의 문학 연구/강의는 문헌학자와 유사하게, 작품이 산출된 기원으로 올라가 텍스트와 작가를 둘러싼 다양한 문제들의 복합성을 이론적으로 탐구한다. 문학 역시 분과학문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가령 일문학 내부에서의 소세키 문학의 의미탐구와, 가령 나와 같이 한국문학 안에서의 비교문학적 탐구를 진행하는 작업의 성격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다양한 문학 연구의 방법론을 통해, 나쓰메 소세키 문학의 특이성을 통시적·공시적인 문학사의 전개 과정 속에서 의미화하는 일 역시 쉬운 것은 아니다. 여기에 세계문학이라는 광의의 개념을 도입해 소세키 문학의 의미를 추출하는 데까지 이르면, 무엇이 세계문학이고 문학의 세계성을 구성하는 요소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등 논의는 더욱 복잡화될 것이다.

그런데 교양으로서의 문학 강의란 대학교육의 일반적 목표로서의 ‘시민성’과 ‘인간성’의 문제를 일종의 ‘감정교육’=공감적 상호이해라는 방법과 목표를 향해 비판적으로 구축하는 작업이다. 가령 소세키의 『산시로』를 함께 읽어나가면서, 산시로가 구마모토에서 도쿄로 기차를 타고 올라올 때의 심정과 포부를 학생 여러분들의 대학입학 당시의 경험과 연결시키면 어떤가 하는 상상을 해보라고 나는 말한다. 소세키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타인에 대한 의혹과 배신감의 문제를 학생들의 짧은 경험적 세계 속에 비추어 볼 때, 그의 비극적 세계관과 인간관이 당신들에게는 어떻게 느껴지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고 말한다. 그렇게 질문을 던지고 숙고하게 될 때의 소세키 문학은 ‘문학이라는 제도 안의 문학’이 아니라, 문학을 삶에 비추어 봄으로써 현재의 자기와 세계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고실험의 일종이 된다.

네이션(nation)의 경계를 넘는 문제 역시 수업 과정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대학생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문제를 고려하면, 국적이나 민족, 혹은 인종적으로 균일한 공동체는 과거처럼 견고하지 않다. 한국 대학의 학부 과정만 보아도 국적이 다른 유학생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는데, 특히 소세키를 강의하는 현장에서 한국, 일본, 중국 등 질곡의 과거사 기억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공유하고 있는 학생들이 소세키 문학을 단지 가치중립적으로만 이해하는 일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은 것이다.

일본 국적의 유학생이 한국의 한 대학에서 나쓰메 소세키를 읽어나가는 감각과 한국과 중국, 혹은 베트남 학생들이 그것을 의미화하는 방식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소설이라는 허구적 텍스트라고 할지라도, 그 역시 쓰여졌던 당시의 사회·역사적 중력이 삼투되어 있다. 가령 『산시로』와 함께 소세키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마음』을 읽다 보면, 거기에는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메이지 천황의 죽음 이후 순사를 하게 되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장군에 대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이러한 에피소드는 이후 소설의 주인공인 선생님의 자살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전조(前兆)에 해당하는 것으로 소설 속에서는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노기의 죽음은 그가 메이지 유신 직후에 일어난 구(舊) 무사들과의 전쟁인 세이난 전쟁(西南??)에서 천황의 군대로 출병했다가 군기를 빼앗긴 치욕 때문에 자결하려 했으나 그렇지 못했는데, 천황이 죽자 비로소 순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의 유서를 통해 설명된다. 소설 속의 ‘선생님’ 역시 젊은 날 자신의 미숙한 욕망 때문에 친구를 자결하게 한 원인을 제공했고, 이에 대한 죄의식 속에서 살아왔지만, 그 역시 결국은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노기의 죽음은 역시 『마음』에서의 선생님의 죽음을 설명할 수 있는 핵심적 단서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이중의 죽음을 소설 속에서 읽어나가게 되는 독자의 ‘마음’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일본의 독자 역시 여러 방식으로 이 죽음을 해석하고 의미화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한국의 독자들과 동일한 독법과 의미화의 경로를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러·일 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조선의 명백한 국권 상실과 식민지화를 초래한 사건이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읽게 되면, 노기 마레스키의 순사라는 모티프 역시 소설 속의 ‘선생님’처럼, 한국의 독자들이 감정이입을 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게 되면 선생님의 자살이라는 이 소설 속의 결정적 사건에 대한 인상 역시 반감될 확률이 높다.

모든 소설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는 독자들의 ‘감정의 구조’에 따라 해석이 달리 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소세키의 소설에서 일본적인 공동성은, 그것의 외부에 있는 한국과 중국의 독자들에게는 공감이 아닌 반발력을 증폭시킨다. 소세키 문학이 세계문학으로서의 근거를 갖기 힘든 이유이다.

반면, 『마음』에서의 선생님과 화자인 ‘나’와의 만남과 헤어짐은 국민국가의 경계와 무관한 인간다운 보편적 체험에 호소함으로써, 작품 속의 인물들이 교실 바깥으로 걸어 나온 듯한 느낌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대학 졸업반이지만 취업은 되지 않았다. 수도인 도쿄에 올라왔다가 도쿄대 출신인 선생님을 만났다. 이상하게 이유 없이 선생님에게 끌려 만남을 지속하다, 그만 선생님의 비밀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으로 그와는 완전한 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20대의 대학생이라면, 대학에서 기적적으로 존경할 만한 선생님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선생님에게 혼돈으로 가득 찬 그의 마음속 고민을 우연히 고백하게 될 것이고, 선생은 건조한 침묵 속에서 골똘히 그 학생을 바라보다가, 어렵게 말문을 열게 될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강의가 끝날 즈음, 나는 이런 학생들을 종종 만났다. 방금 전까지 소설을 열띠게 강의하고 수강한 탓이겠지만, 교양으로서의 문학 강좌를 진행하다 느끼게 되는 소명 의식과 감동은 이런 우연에서 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의 대학은 ‘삶의 학교’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했지만, 막연한 희망까지를 거세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 루쉰
▲ 루쉰

이번 1학기에는 루쉰 강좌를 진행하는데, 하필 우한발 신종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져 버려 루쉰을 작가가 아니라 ‘중국인’으로, 중국인 유학생을 동료가 아니라 ‘중국인’으로 경계 지어 심리적·물리적으로 배제하는 일이 있으면 안 되는데 하는 우려도 없는 것은 아니다. 루쉰의 『아Q정전』에서 ‘아Q’를 조롱하고 폭행했던 “웨이장 마을” 사람들은 소설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을의 경계를 우리가 넘어서지 않는다면, 국가의 경계도, 사람의 경계도, 마음의 경계도 넘어설 수 없다.

교양으로서의 문학은, 두려움 속에서도 이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야말로, 가장 시민답고 인간다운 감동의 체험이라는 것을 공명하게 만드는, 성숙한 인문적 실천과 음미이다.
    
   
이명원·경희대 교수/문학평론가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성균관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최일수 문학비평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이후 문학평론가로 활동해왔다. <비평과전망> <내일을여는작가> <실천문학>의 주간을 역임했다. 지은 책에 <타는 혀>, <해독>, <파문>,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 <종언 이후>, <시장권력과 인문정신>, <두섬: 저항의 양극, 한국과 오키나와> 등이 있다. 상상비평상, 성균문학상, 한국출판문화상(저술 부문)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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