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하버마스의 새로운 사유 기획
상태바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하버마스의 새로운 사유 기획
  • 하상복 국립목포대학교·정치철학
  • 승인 2022.09.04 12: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책을 말하다_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 읽기』 (하상복 지음, 세창미디어, 264쪽, 2022.06)

 

“고독한 개인을 넘어 소통하는 사람들의 이성과 합리성을 찾아서”


1960년대 후반, 혁명의 땅 유럽에 또 하나의 혁명적 사건이 도래합니다. ‘68’, ‘68운동’, ‘68혁명’ 등으로 불리는 대 서사입니다. 68의 시간 속에서 학생과 노동자와 진보적 시민의 연대는 당대 유럽의 질서를 총체적으로 부정했습니다. 그들은 자본주의 경제, 경쟁적 교육 체제, 위계적 사회 질서를 문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폐쇄된 공장에서, 문 닫힌 학교에서, 혼돈의 거리에서 자유와 해방과 평등과 연대의 새로운 유토피아를 열망했습니다. 그러나 기성세대는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이룩해 낸 성장과 풍요가 왜 부정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실업이 사라지고, 소비가 보편화되고, 복지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이 안정을 누릴 수 있는 사회가 왜 공격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그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에게서 68의 주체들은 비이성적인 열정에 사로잡힌 대안 없는 존재로 규정되었습니다. 현상적으로 68은 세대 갈등, 보수와 진보의 이념 대결로 보입니다만 그러한 양상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68은 유럽, 서구의 근대성에 대한 총체적 사유와 논쟁의 시간이고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근대가 발명하고 탄생시킨 것들, 인권, 자유, 평등, 민주주의, 자본주의, 이 모든 이념과 가치와 제도가 여전히 유효하고 정당한가를 둘러싼 거대 논쟁의 계기이고 무대였기 때문입니다. 

당대 유럽의 어느 지식인도 그 20세기의 혁명적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학생-노동자-진보적 시민에게서 한발 떨어져 관찰하면서,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지지를 보내면서, 거리에서 그들과 함께 소리치면서, 또는 그들에 맞서 싸우면서 각자의 방식대로 지식인들은 68이 제기한 유럽의 근대정신과 그 결과물을 성찰해야 했습니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또한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하버마스야말로 68의 중심에 서 있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지적 의지와 열정으로 가득 찬 소장 철학자 하버마스는 68을 이끌던 독일의 급진주의 청년들과 격돌합니다. 그가 한 토론회에서 학생들의 이념을 좌파 파시즘으로 비판한 것에서 시작된 싸움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캠퍼스 점거로 하버마스를 공격했고,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대학 교수직 사임으로 대응했습니다. 그는 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자신의 인생에 거대한 충격을 가한 68과, 그 기저에 놓인 유럽의 근대성에 대한 넓고 깊은 사유를 진행합니다. 

유럽의 근대성에 대한 그의 관점은 독특합니다. 68 속에서 유럽의 근대가 이미 생명을 다했다고 주장하며 탈근대의 길을 상상하고 기획한 지식인들에 동의하지 않았고, 유럽의 근대가 조형한 핵심적 근대 원리인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여전히 유일한 희망이라는 믿음을 수호한 지식인들의 관점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럽의 근대성을 비판하면서 그 근대성 속에서 미래의 희망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버마스 사회철학이 일관되게 시도하고 있는 근대성 프로젝트 원리입니다. 

유럽의 근대성은 이성과 합리성을 본질로 합니다. 르네상스로부터 근대 자연과학을 지나 계몽주의 철학에 이르는 지적 시간 속에서 태동한 근대 이성과 합리성은 무엇보다 비판 인식이고 의지입니다. 이성과 합리성은 전근대를 떠받치고 있던 비과학적 논리와 믿음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면서 보편주의 이념과 가치에 기반을 둔 사회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관념과 추상 세계에 머물지 않고 시민혁명으로 실천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근대 이성과 합리성은 과거 그 어떤 문명보다 더 진보하고 더 발전한 세상을 열었다고 스스로 자부해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성과 합리성은 혁명으로 탄생시킨 새로운 사회에 대한 무한한 자기만족에 사로잡혔고, 그것이 바로 역사적 비극의 원인이었습니다. 유럽의 근대는 이성과 합리성의 논리와 힘으로 식민지를 경영하면서 자신들의 우월함으로 타자 지배를 자연스런 것으로 믿어왔습니다. 잔인했던 제국주의 지배 그리고 그 현상이 초래한 세계적 전쟁들은 유럽 이성과 합리성의 진보적, 민주주의적 신뢰에 깊은 회의를 하게 만든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근대 이성과 합리성의 그 폭력이야말로 유럽, 특히 프랑스 반이성주의 철학자들이 왜 자신들의 세계와 정신성에 희망을 부여할 수 없었는지를 설명해주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청년 지식인으로 마주해야했던 68의 상황은, 이미 생명을 다한 근대 이성과 합리성에 근거 없는 희망과 기대를 던지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했습니다.  

하버마스 또한 근대 이성과 합리성이 유럽의 중대한 위기를 초래하고 있고 파국의 가능성까지도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스승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이미 유럽은 절망을 피할 수 없다고 예견해마지 않았습니다. 하버마스는 위기에 대한 인식에서 그들의 생각에 동의했지만 그 해법과 관련해서는 사뭇 다른 방도를 찾습니다. 하버마스의 대안은 이런 것입니다. “근대 이성과 합리성을 비판적으로 사유할 것, 하지만 그 이성과 합리성을 떠나거나 부정하지 말고 새롭게 사유하며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버마스는 유럽의 근대 이성과 합리성을 균형 있게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너무나도 단단하고 강고한 억압과 구속으로부터 인류를 해방한 이성과 합리성의 역사적 파노라마를 그는 체계적으로 재사유하고 재구성하면서 자신의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그 작업을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책의 결말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공론장의 재봉건화’라는 개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공론장으로 실현된 근대 민주주의가 왜곡된 이성과 합리성에 의해 어떻게 변질되고 무력화되어 가는지가 또렷하게 묘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지점에서 동료 철학자들은 반근대주의, 반이성주의의 길로 나갔지만 하버마스는 이성과 합리성의 새로운 기획으로 유럽을 어두움에서 구해내려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대안적 이성과 합리성의 기획은 어떤 것일까요? 이것이 그가 프랑크푸르트 대학을 떠나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공부하면서 답하려 했던 숙제였습니다. 2권으로 구성된 작품 『의사소통행위이론』이 그 결과물입니다. 

하버마스가 구상한 대안적 이성과 합리성의 핵심적 패러다임은 이성과 합리성의 세계를 개별적 존재에서 상호적 존재로 이동시키는 데 있습니다. 이성과 합리성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지식인들의 한계는 타인을 전제하지 않는 ‘고독하고 고립적인’ 개인 속에서만 그 정신성을 사유했기 때문이라고 하버마스는 비판했습니다. 『의사소통행위이론』이 베버의 합리성에 대한 치밀한 비판과 해부에서 시작하게 된 것은 바로 그 문제의식의 일환이었습니다. 분명 베버는 서구 근대 합리성의 미래가 대단히 어둡다고 예견했는데, 하버마스에 따르면, 그것은 이성과 합리성을 한 사람의 일방적이고 자기 폐쇄적인 의식과 사유과정으로만 보는 관점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그 비판은 베버에서 그치지 않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선구자들과 루카치와 같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의 전망으로 이어집니다. 그러한 문제 지평에서 하버마스는 한 개인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언어교환을 통해 전개되는 이성과 합리성을 디자인합니다. 책의 핵심인 ‘의사소통합리성’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하버마스가 책에서 오스틴의 화용론을 따라 언어행위와 실천에 대한 정교한 논의를 진행한 것은 의사소통합리성을 구현할 언어교환의 형식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의사소통합리성의 언어적 실천은 투명성과 진실성에 입각해야 한다고 하버마스는 말합니다. 그래야 소통 주체의 도덕적으로 구속할 규범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한 핵심 원리가 바로 상대 언어행위의 투명성과 진실성을 확인하는 타당성 주장입니다. 이어서 그는 미국의 심리학자 허버트 미드와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을 통해 의사소통합리성의 중대 원리를 확보합니다. 미드의 심리학은 의사소통합리성이 소통 주체들로 하여금 공통 규범을 보유하도록 하는 과정을, 뒤르켐의 사회학은 소통 주체들이 공유하는 도덕의 개관적 규범성을 인식하게 합니다. 

하버마스는 근대사회를 체계와 생활세계의 두 개념으로 분석하면서, 체계를 계산합리성(베버가 말한 목적합리성)의 원리가 관철되는 곳으로, 생활세계를 의사소통합리성이 실천되는 곳으로 구획합니다. 책의 후반부 논의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사람은 미국의 사회학자 파슨스입니다. 하버마스가 파슨스 사회학에 대한 비판적 조명을 통해 밝히고자 했던 문제는 체계 논리만으로는 민주적 정당성 위에 서는 사회를 이룩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파슨스는 정교하게 분화된 사회적 기능들로 구성된 조밀한 체계의 작동으로 조화롭고 질서 잡힌 사회가 이룩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버마스는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 규범과 도덕을 성찰하고 토론하며 견고히 하려는 의사소통합리성의 논리와 의지가 요청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책의 말미에서 유럽사회의 집단적 규범과 도덕과 가치의 복원을 위한 사회운동들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그러한 관점의 반영입니다. 

우리는 여러 철학자와 사상가를 종횡으로 엮어가면서 이성과 합리성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내고자 한 이 방대한 저술 속에서 자신이 놓인 사회의 위기를 깊이 고민하고 해법을 찾으려 한 지식인의 지적, 실천적 의지와 열정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상복 국립목포대학교·정치철학

서강대학교에서 정치학과 사회학을, 브뤼셀 자유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파리9대학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현재 목포대학교에서 문화, 커뮤니케이션, 상징 등을 가르치고 있다. 새로운 관점에서의 근대성 사유, 특히 언어, 문화, 의례와 같은 영역에서 근대성이 어떻게 현상되는지를 다양한 사례 속에서 해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권력의 탄생>(2019), <죽은 자의 정치학>(2014),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 읽기>(2016) 등의 저서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