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던 책,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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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던 책, ‘위로’
  •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 승인 2022.09.04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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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이 책은 독특하다. 총 52편의 글로 이루어졌는데 각 글이 단어 하나씩을 주제로 삼는다. 일상의 단어 하나에 숨은 의미를 한편의 글로 곱씹는 것이다. ‘용기’, ‘사랑’, ‘절망’, ‘후회’, ‘기쁨’ 등 이런 책에 마땅히 담기겠거니 싶은 단어도 있지만 ‘이스탄불’, ‘로마’ 같은 뜻밖의 단어도 등장하고(덕분에 번역하면서 구글 지도며 관광 안내 자료를 찾아봐야 했다.) ‘평행’이나 ‘취소’처럼 무슨 내용이 나올지 짐작하기 어려운 단어도 있다.

  어째서 ‘위로’라는 제목이 붙었을까?

  ‘분노’를 설명하는 ‘분노는 타인, 세계, 자신, 삶, 우리의 몸, 가족, 이상향 등 나약하고 상처받을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가장 깊은 배려다.’라는 문장이나 ‘미루기’ 편에 나오는 ‘미적거리지 않고 잘못 헤매지도 않고 허공을 바라보지도 않고 그러면서 자기 의심이나 심장 마비 위험에 시달리는 일조차 없이 성취한 일은 순간적인 것, 하찮은 것, 유용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라는 문장을 보건대 우리가 흔히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개념에, 그리고 혹시라도 분노하거나 미루기 일쑤인 나에게 위로를 준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세상에 부정적인 것만은 없으니 다른 측면을 생각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으라는 위로랄까. 

  단어들을 당연하다는 듯 휙휙 처리하고 넘겨버리기 일쑤인 우리에게 그러지 말고 잠시 멈추라고, 멈춘 채 천천히 음미하면서 쉬는 시간을 가지라는 뜻의 위로일 수도 있다. 이 책의 문장들은 빠르게 읽어 내려갈 수 없다. 진중한 문장을 차분히 읽어가고, 혹시 단번에 머리에 들어오지 않으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읽는 과정 자체가 무엇 때문에 바쁜지조차 모르면서 쫓기듯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고 보지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이 책의 번역 과정은 위로와는 거리가 멀었다. 2020년 여름, 이 책의 문장들과 씨름하면서 나는 몇 달간 도를 닦는 기분이었다. 한번 읽고 바로 번역할 수 있는 문장은 없었다. 원문을 몇 번씩 읽고 고민하고 한국어로 옮긴 후에도 다시 몇 번씩 읽으면서 고치기를 반복해야 했다.

  책의 첫 번째 글인 ‘혼자’에 등장하는 다음 문장도 한참을 붙잡은 후 나온 결과물이다. 

“혼자 있음은 우리가 자신을 다시 그려 보도록, 스스로에게 엄격하도록, 똑같은 옛날이야기를 걷어내고 그 이야기를 다른 식으로 서서히 풀어내도록, 침묵 속에서 더 집중해 들어주는 미처 몰랐던 낯선 두 귀에 대고 이야기하도록 해 준다.”

  작가 데이비드 화이트가 시인이어서 그런지 이 책은 마치 시를 풀어쓴 산문의 느낌이다. 길게 이어지다가 미로가 되어버리는 문장들을 보면서 나는 ‘이게 영어 맞나?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영어와는 너무 다른 걸?’이라는 혼란을 느끼기도 했다. 마감 기한이 정해져 있는, 그리하여 곱씹어 읽으면서 위로 받을 여유가 없는 번역가에게 이 책은 위로보다는 시련이었다.

  번역을 넘기고 1년 후에 책이 출간되었고 그로부터 다시 6개월이 지났을 때 필즈상을 받은 수학자 허준이 교수가 국내 일간지와 인터뷰하면서 이 책을 애독서로 추천했다. 별로 빛을 못 보던 책이 덕분에 조금 더 많은 독자에게 다가가게 되었다. 이건 ‘위로’라는 책이 번역가에게 준 또 다른 ‘위로’인 셈이었다.


이상원 서평위원/서울대·통번역학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글쓰기 강좌를 운영하며 저서 『번역은 연애와 같아서』,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 『매우 사적인 글쓰기 수업』,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 등을 출간했으며, 『첫사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안톤 체호프 단편선』과 같은 러시아 고전을 비롯하여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홍위병』, 『콘택트』, 『레베카』 등 9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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