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공장이 복합문화공간으로…전주 팔복예술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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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공장이 복합문화공간으로…전주 팔복예술공장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2.09.03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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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이야기] 전북 전주 팔복예술공장

 

                        팔복예술공장. 25년간 방치되었던 쏘렉스 공장이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했다. 

가로수가 많다. 작정하고 심었다는 느낌이 든다. 전주역을 지나자 가로수들은 더욱 풍성해진다. 청량한 나무들 속에 다양한 스케일의 조형물과 건축적 설치물이 어우러져 있다. 도로 가운데에도 녹지가 있다! 그래서 도로는 직선이 아니라 실개천처럼 흐르고, 직선도로에 익숙한 초행자는 저절로, 천천히, 종이배처럼 흐름에 따른다. 전주역 앞 사거리에서 완산구 꽃밭정이네거리까지 약 9km 길을 백제대로라 한다. 이 가운데 전주역에서 명주골사거리까지 약 700m 거리를 ‘첫마중길’이라 부른다. 전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전주역에 내려 가장 먼저 마주하는 길이다. 이곳은 한때 지역 최대의 번화가였다. 그러다 경제의 무게중심이 신도심으로 옮겨가면서 소비자의 이동이 거의 없는 길이 되었다. 2016년, 전주시는 백제대로 차선을 교통에 지장이 없는 한도 내에서 축소하여 나무를 심고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침체된 역세권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전주시가 선택한 것은 보행자 중심의 거리였다. 공간의 속도를 줄이고 이벤트의 밀도를 높이자 사람들이 찾아들었고 주변 상가도 활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과연 처음 본 ‘첫마중길’은 내내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다.  

 

팔복예술공장
                            이팝나무광장과 연접한 공간. 우측에 써니부엌, 이팝나무 홀 등이 있다. 

경기장이 나타나면서 이곳이 제법 외곽이라는 사실을 인지한다. 전주천을 건너자 거리의 분위기가 바뀐다. 건물들의 낮은 스카이라인과 도시의 성근 밀도 속에서 오래된 건물들을 뜨문뜨문 스친다. 그리고 공단지대가 시작된다. 이팝나무가 늘어서있는 북전주선을 따라 들어간다. 한산한 거리에 걸린 배관, 판넬, 족발공장, 물산, 공장임대 등의 글자가 이마를 훑는다. 

 

                  광장, 통로, 쉼터 등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이팝나무광장. 계단 아래에 화장실이 있다. 

전북 전주시 덕진구 팔복동 제1산업단지. 주민들 사이에선 ‘팔복공단’으로 불린다. 공단은 1969년 공업의 지방 분산과 지역 간 소득 격차의 해소를 목적으로 조성되었다. 전체 규모는 168만 3000㎡로 내의류를 중심으로 한 소규모 의복업체와 음식, 종이 등 117개 경공업 업체에서 6,500명이 넘는 근로자들이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였다. 노동집약적 경공업제품들은  1960년대 초 경제개발계획 실시 이후 수출주도 공업화의 전략에 따라 수출과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팔복공단은 1973년 지방공업개발 장려지구로 지정되었다. 

 

  1979년에 ‘썬전자’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카세트테이프 공장. 굴뚝에 쏘렉스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어지럽다. 

검붉은 물탱크에 ‘팔복예술공장’이라 선명하게 쓰여 있다. 높이 솟은 굴뚝에는 ‘(주)쏘렉스’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어지럽다. 이곳은 카세트테이프를 만들던 공장이었다. 1979년에 ‘썬전자’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공장은 한때 5백여 명의 노동자가 일하며 호황을 누렸다. 음악이 지금처럼 음원이 아니라 ‘카세트테이프’로 존재했던 시절이었다. 공장은 1980년대 말 CD가 나오면서 위기를 맞았다. 회사는 1987년 노조와 임금 협상 과정에서 공장을 폐쇄했고, 노동자들이 400일 넘게 파업으로 맞섰다. 썬전자는 이때 ‘쏘렉스’로 이름을 바꿨고, 농성은 종료되었다. 결국 쏘렉스 공장은 1만4000㎡ 공장 터에 2층짜리 건물 2동만 남긴 채 1991년 가동을 멈췄고 이듬해 폐업했다. 그리고 새로운 주인을 찾지 못한 채 25년 동안 방치됐다. 쏘렉스와 팔복공단의 운명은 그 궤를 같이한다. 3만 명이었던 팔복동 주민은 8천명으로 줄었다. 

  

                              옛 공장의 외형이 선명한 B동. 부수지 않았고 새롭게 짓지 않았다. 

팔복공단 쏘렉스는 2016년 문화체육관광부 문화 재생사업에 선정되어 5년의 기간을 거쳐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했다. ‘팔복예술공장’이다. 부수지 않았고 새롭게 짓지 않았다. 위험한 구조체만 철거하거나 보강했고 벽체, 기둥, 계단 등 모두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그 속에 작품들을 설치하고 다양한 색상과 유리나 천과 같은 재료들로 생기를 주었다. 공간이 필요한 곳에는 컨테이너를 활용했다. 

 

                              A동. 작가들의 스튜디오와 전시장, 카페 써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A동은 전시장과 작가들의 창작 스튜디오로 구성되어 있다. 로비에는 이 건물의 역사가 담겨 있다. 문을 닫을 당시 이곳에 쌓여 있었던 먼지와 낙엽들, 남아있던 카세트테이프들, 누렇게 바랜 출근부와 생산일지, 격렬했던 파업 현장이 담긴 노동자 소식지 ‘햇살’. 로비 옆은 카페 ‘써니’다. ‘썬전자’와 노동자 소식지 ‘햇살’에서 따온 이름이지만 영화 ‘써니’의 시대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겠다. 지붕 함석판은 벽이 됐고 전등은 공원들이 일하던 의자를 분해해 재조립했다. 테이블은 공장 철문을 떼어내 재가공해 만들었다.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팔복동 주민이다. 2층에는 옛날 화장실이 설치 작품으로 변신해 남아 있다. 당시 여직원은 약 400명인데, 건물 내 여자 화장실의 변기는 네 칸뿐이었다. A동과 B동은 컨테이너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B동에는 아이들의 놀이터인 ‘꿈꾸는 예술터’와 ‘이팝나무 그림책 도서관’, 식당인 ‘써니부엌’이 있다. 예술터에는 아이들이 만들다 간 찰흙 작품들이 천천히 말라가고 있다. B동 벽면이 온통 아이들 낙서다. 

 

                          B동 야외 놀이터. 하늘이 열린 공간으로 벽마다 아이들의 낙서작품이다.  

팔복예술공장은 인천아트플랫폼의 총괄기획자였던 건축가 황순우가 총괄 감독을 맡아 완성했다. ‘완성’이라는 단어가 적절할까. 그는 이곳이 ‘플랫폼’이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하드웨어에 집중한 물리적 재생이 아니라 비움과 채움이 지속적으로 구동하는 공간이 목표였다. 그리고 지금 팔복예술공장은 아이들의 놀이터로, 작가들의 전시장이자 작업장으로, 다양한 방문객들의 환기 처(處)로 작동하고 있다. 팔복예술공장은 도시경관 분야의 최고 국제상인 ‘2019 아시아 도시 경관상’을 수상했다. 또한 국제슬로시티연맹의 ‘2019 국제슬로시티 어워드’에서 최고상인 ‘오렌지 달팽이상’을 수상했고 제15회 대한민국 지방자치 경연대전에서도 공공디자인 분야 우수기관으로 선정돼 장관상을 받았다. 공장 앞 북전주선 철길에는 하루에 두세 차례 화물차가 지나간다. 오늘은 기차소리 듣지 못했다.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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