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호탁’이라는 이름의 뿌리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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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탁’이라는 이름의 뿌리 찾기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2.08.29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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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83)_ ‘연호탁’이라는 이름의 뿌리 찾기

 

황해도 谷山을 본으로 하는 延氏의 선조가 선비족의 한 갈래일 가능성을 말한 적이 있다. 선비족 탁발씨(拓跋氏)는 도무제 탁발규(道武帝 拓跋珪)가 代에 도읍을 정하면서 국호를 대위(大魏)라 하고 자칭 黃帝의 후예임을 천명했다. 孝文帝 탁발굉(拓跋宏)은 代에서 洛陽으로 수도를 옮기며 太和 20년(496년) 정월 황실의 성을 元으로 바꿨다. 그보다 훨씬 이전 神元皇帝 탁발력미(拓跋力微: 174~277년, 재위: 219~277년) 때에 이르러 다른 부족들의 姓을 고쳤는데 그 중 가지연씨(可地延氏)가 延氏로 되었다.

西方의 위지씨(尉遲氏)는 尉氏로 改姓을 했다. 여기서 서방이란 낙양을 기점으로 해서 서쪽방향으로는 파미르 고원 以東, 천산산맥 남단에 위치한 성곽도시 언기, 소륵, 우전, 구자 등이 자리 잡고 있던 지역이다. 위지씨는 우전의 지배집단이었다. 이 성씨는 우리 사서에는 乙支씨로 기록되어 있다. 

증조할머니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증손주를 ‘호탁이’로 부르셨다. 그러나 나는 ‘연호택’이라는 이름으로 50년 넘게 살았다. 주민등록, 의료보험, 은행통장, 여권 상으로도 내 이름은 ‘연호택’이었다. 어느 날 동사무소에 가서 필요한 서류를 떼려하니 내가 없었다. 주민등록번호와 일치하는 ‘연호택’이라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연호택’이고, 내가 살아있는데, 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본적지 면사무소 호적 담당에게 전화를 했다. 그의 응답은 허탈했다. 이름에 쓰인 한자 ‘鐸’은 ‘방울 탁’으로 읽어야 맞다. 그래서 전산화하는 과정에서 호적과 주민등록의 ‘호택’을 ‘호탁’으로 고쳤다고 그는 스스로 대견한 듯 말했다. 오류를 바로잡았다는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으나, 그럴 경우 이름이 수정되는 당사자인 내게 통지하고 설명을 해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해당 직원은 법에 호소해도 재수정은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나 참!

멋대로 행정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나는 불편한 대로 살았다. 그러다 퇴직 후 연금 수령 등에 문제가 있을까 우려되어 내키지 않는 改名을 했다. 사람들 중에는 무슨 개명을 그렇게 하느냐며 우습다고 놀렸다. 이제 나는 ‘연호탁’이다. 영어 이름도 ‘Yeon, Ho-tak’이다. 본의 아닌 개명으로 자칫 금전적 피해를 당할 뻔한 보이스 피싱의 위기에서 벗어난 적이 있었던 것이 그나마 고마운 일이다.

그러다 최근에 새로운 사실을 들어 알았다. 몽골어 이름에도 ‘호탁’이 있다는 것이다. ‘Khutag(호탁으로 발음)’으로 표기되는 몽골어는 지금으로부터 98년 전인 1924년 건설된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461km 떨어진 몽골 북부 볼간(Bulgan) 지방 한 구역의 이름으로도 쓰였다. ‘호탁 온돌(Khutag-Undur)’이라 불리는 면적 560 헥타아르의 이 지역은 40%가 초지인데 인구는 불과 4,500명이다(2009년 현재). 몽골어에서 ‘u’는 ‘오’ 또는 ‘으’에 가깝게 발음한다. 몽골어 khutag의 의미는 ‘축복’으로 일상생활에서 ‘복스럽다, 복이 많다, 복을 구하다, 복을 내리다’라고 할 때 사용되는 길상의 말이라고 한다.

이전 글에서 나는 위지씨 내지 을지씨의 의미는 알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런데 몽골인을 통해 조사를 하다가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내 이름이 연호탁이듯, 을지 호탁(Ulzii Khutag)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몽골인의 성으로 쓰인 족명 ‘을지’의 말뜻은 ‘행운’이다. 延氏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음을 인정하지만 새로운 자료를 통해 연씨의 뿌리를 찾아 나가는 노력은 계속할 요량이다.

연씨 성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 중국 문헌에는 당서(唐書), 책부원구(册府元龟), 당회요(唐會要) 등이 있다. 여기에 나오는 구자왕 연전질(延田跌)이 토번계 유목부족 출신일 것으로 나는 의심한다. 그는 아래에서 보듯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구자국을 다스렸다. 그 이전과 그 이후는 백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왕이었다.  

당나라 고종 의봉 년간에 토번(티베트)이 언기 以西지방을 공격하여 안서4진이 토번에 함락되었다. 무측천 천수 3년(長壽원년, 692년) 무위도총관 왕효걸이 토번을 격파하고 4진 땅을 회복하여 구자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였다. 그곳에 병사 3만을 鎭守케 하였다. 3월에 구자국왕 연전질(延田跌)과 동천축국왕 마라지마(摩罗枝摩), 서천축국왕 시라일다(尸罗逸多), 남천축국왕 차루기발라파(遮娄其拔罗婆), 북천축국왕 루기나나(娄其那那), 중천축국왕 지파서나일(地婆西那一)이 함께 조문하였다. 

이를 두고 일부 학자들은 연전질(延田跌)이 토번의 지지를 받는 연씨로 백씨를 대신하여 구자왕이 된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책부원구(册府元龟)』에는 연전질이 아니라 연요발(延繇拔)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연전질의 성이 白姓이며 唐 乾陵(건릉)에 있는 석상 가운데 ‘우위장군겸 구자도독구자왕 백회지라미(白回地罗徽)’가 그라고 한다. 

한편 『당회요(唐會要)』에 이들 5천축국과 구자국이 중종(656~710, 재위: 705~710년), 예종(662~716년, 재위: 712~716년)조에도 나란히 방물을 헌납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구자의 왕성은 延城이라고 불렸다.

연전질과 연요발이 동일 인물인지, 서역제국을 두고 벌어진 당과 토번과의 영토 확장 전쟁에서 구자왕국의 지배세력이 백씨에서 연씨로 바뀌었는지 사실 여부를 확정할 수는 없으나 과거사를 현존하는 문헌을 통해 추정하는 일은 고달프다. 그러나 지명이나 인명 등의 명칭을 통해 숨겨진 역사를 밝히는 작업은 나에게는 무엇보다 흥미롭고 의미 있는 일이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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