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아서 같이하는가, 같아서 옳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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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아서 같이하는가, 같아서 옳다고 하는가?
  • 정재현 연세대·종교철학
  • 승인 2022.08.28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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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차별금지’에 대한 찬반논의가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더니 여전히 회피하듯 또 미루고 있다. 발의는 2년에 한 번 꼴로 7차례를 거쳐 15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국회 논의는 제대로 시작도 못했다고 한다. 표현대로 보면 다르다고 막지는 말자고 하는 것이니 마땅해 보이는데, 한 쪽에서는 이를 법으로까지 제정하려 하고 다른 쪽에서는 단호하게 반대한다. 물론 안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좀 더 확대해 보자.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우리는 소위 좌우대립 또는 보수-진보 구도에 익숙해 있다. 공존이 불가할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되물어보자. 그것이 옳기 때문에 내가 같이하는가, 아니면 나와 같기 때문에 그것이 옳다고 하는가?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무엇인가 판단할 때 자기를 기준으로 한다. 의도적이지 않더라도 자연히 그렇게 된다. 그런데 자기가 기준이라는 것은 자기를 같음으로 규정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타자는 다름이 된다. 동어반복이어서 의심의 여지도 없다. 그리고는 자기의 같음과 타자의 다름이 대조를 이룬다. 이 대조가 대립이 되기도 하고 공존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자기와 타자의 관계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같음과 다름은 그저 사실적 대조만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같음은 옳음이고 타자의 다름은 그름이라는 것이다.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말하는 일상용법이 좋은 증거다. 

돌이키건대, 동어반복으로 나타나는 자기의 같음과 타자의 다름이라는 사실판단은 종당에는 옳음과 그름을 가르는 가치판단을 위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같으면 옳다는 것이다. 심지어 폭력을 불사하고서라도 같음은 옳음을 명분으로 강요되어 왔다. 인류문화사는 수많은 증거들로 넘쳐난다. ‘문명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첨단과학의 세계제패는 서구화 방식의 세계화를 만방에 선포했다. 같음의 폭력은 크고 작은 종교계뿐 아니라 국제관계에서도 여지없이 확인된다. 수년 전 영국의 브렉시트(Brexit)나 트럼프에 의해 책동된 미국의 국수주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도 무수한 증거들 중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타자의 다름이 틀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겪게 되면서 옹골차던 가치판단의 틀이 깨지고 있다. 소용돌이치는 삶을 돌아보면서 자기의 같음도 옳음이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내 안에 그름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홀연히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붕괴의 파열음은 가치판단을 넘어서 사실판단을 향해 거슬러간다. 자기는 같고 타자는 다르다는 공식은 과연 의심할 여지없는 것일까? 아니다. 자기가 같기만 한 것이 아니고 타자가 다르기만 하지 않다. 자기 안에 같음으로 묶어낼 수 없는 다름이 무수히 들어와 소용돌이치고 있을뿐더러, 타자도 역시 그저 다름이라기보다는 자기의 같음이라 할 것이 적지 않게 득실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와 타자를 옳음과 그름을 갈라냈던 가치판단도 잘못된 것이었지만 더 근본적으로 자기와 타자를 달랑 같음과 다름으로 간주했던 사실판단도 엄청난 자가당착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오늘날 한반도에 사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보아도 좋다. 100년 전과는 사뭇 달라졌고 앞으로 100년 후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질 것이다. 여전히 ‘한국인’이라는 분류표기를 사용하겠지만 말이다. 종교의 경우에도 예를 들어, ‘기독교인’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초대교회 기독교인의 모습은 지금 세계 교회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성서가 형성되기도 전인 당시 기독교인과 성서가 있었지만 읽을 수 없었던 중세 기독교인도 다르고, 성서를 읽기 시작한 근대 기독교인은 또 다를 수밖에 없으며, 이제 성서를 비평적으로 읽는 현대 기독교인들은 또 다를 수밖에 없다. 교회를 보더라도 일찍이 교회의 태동 이전부터 동방과 서방도 매우 달랐는데 이런 전통이 동방정교회와 서방가톨릭교회에 고스란히 배어나왔으니 정통(orthodoxy)과 보편(catholicity)을 서로 주장했었어도 여전히 그렇게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렇게 달랐기 때문에 서로 ‘정통성’과 ‘보편성’을 그토록 절박하게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시작부터 이미 혼종적이었으니 다름을 절절하게 겪으면서 습합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토록 같음을 내세웠던 것이다. 종교적인 동기이든, 정치적인 목적이든, 같음은 이토록 소중했다. 같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튀어나오고 자라났으며 엮여졌었던 것이더라는 말이다. 

더 구체적으로 우리 상황을 보자. 한국인의 종교성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는 무교적 성향이 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나머지 반 중에서도 또 역시 반 이상은 유교적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어떤 종교에 속하는가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 개인 안에 여러 종교성들이 뒤섞여 있다. 종교적 중층성이다. 순수를 주장하는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이를 인정하지 못하면, 그래서 자신만큼은 순도 100퍼센트의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그저 착각일 뿐이다. 기독교인 안에 비기독교적인 성분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는데 이를 외면한다면 극복해야 할 과제를 깨달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같음이라는 것이 이름만큼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옳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사실 같음이나 옳음이라는 포장이 모두 자기를 꾸리고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으니 결국 관건은 언제나 자기였다. 같아서 자기인 것이 아니라 자기이기 때문에 같다고 한 것이고, 자기이기 때문에 옳다고 질러댔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다 옳다는 무정부적 상대주의를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름이 존중되어야 하지만 모든 다름이 다 그름이 아니듯이 모든 다름이 다 옳은 것은 더욱 아니다. 이제는 옳고 그름이 더 이상 자기를 기준으로 판별되어서야 안 될 일이지만 다름에 대한 존중을 명분으로 모든 다름이 다 옳을 수도 있다는 무정부적 상대주의도 단연코 갈 길이 아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대목에서 우리를 살펴보자. 우리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이나 문화적 성분이 아무리 그렇게 중층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다 똑같은 얼과 꼴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한국인이라고 해도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이를 새기는 뜻은 저마다 다르다. 어쩌면 심한 경우에는 이름만 같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름이 같음의 근거도 아니고 다름을 가르는 기준도 아니다. 옳음과 그름을 가르는 근거는 더욱 아니다. 그런데 이름을 앞세우면서 이를 절대화하는 이름주의에 매몰된다. 이런 행태가 종교영역에서는 압도적이지만 정치라고 전혀 다를 것이 없어서 저마다 다른 뜻으로 얽힌 이름만을 내세우면서 힘의 카르텔을 공유하는 세상이다. 우리는 이러한 실상을 우리 주위에서, 나아가 자신 안에서도 무수히 보고 있다. 그렇게 돌이키지 않았기에 보이지 않았을 뿐 우리가 그동안 그렇게 살아오고 그렇게 믿어왔을 수도 있다. 내 안에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다름이 들어있고 심지어 그름과 틀림이 이글거린 채 살아오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이름으로 같음과 옳음을 내세우고 서로를 갈라왔었다면, 이제 이름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물론 이름을 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이름은 그러한 얼과 꼴, 그리고 길과 뜻을 보다 맞갖게 다듬고 난 후에 나중에 붙여도 좋을 일이다. 이렇게 먼저 이름을 내려놓으면 우리는 여태껏 이름 때문에 벌어졌던 부질없는 갈등과 충돌로 인해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을 되찾을 수 있다. 그리고는 이름 없이도 삶에서 삶으로 나눌 수 있다. 천재지변이든 인재이든 일어난 재난에 속수무책인 무능하고 사악한 정부 대신 이름 없이 그저 아픔을 함께 나누는 이웃들과 이에 감동받은 또 다른 이웃들이 함께 돕는 장면 말이다. 이게 바로 삶의 참된 뜻이라면 우리로서는 이름을 구실로 한 같음과 옳음 주장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옳기 때문에 같이한다고 하지만 사실 나와 같기 때문에 그것이 옳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정재현 연세대·종교철학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에모리대학교(Emory University)에서 종교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수로서 정년퇴임한 후 교무처 소속 특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종교학회 종교철학분과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자유가 너희를 진리하게 하리라>, <우상과 신앙>, <인생의 마지막 질문>, <앎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믿음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통찰: 죽음과 얽힌 삶, 그래서 사랑> 등의 저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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