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이 추동하는 인간학의 비평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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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 추동하는 인간학의 비평 에세이
  • 정홍섭 아주대·국문학
  • 승인 2022.08.28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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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번역가의 인간학』 (정홍섭 지음, 좁쌀한알, 304쪽, 2022.07)

 

이 책은 내가 번역한 책 가운데 열한 권에 실은 옮긴이의 말(또는 글)과 해제를 모으고 한 편의 번역론을 더 써서 묶은 책이다(‘멀티캠퍼스’의 강의 원고가 예외이기는 하나, 이것도 『에드먼드 버크: 보수의 품격』 해제에 바탕을 둔 글이다). 책을 낼 구상을 하고 쓴 글을 다시 정리하면서 처음부터 유일하게 생각한 제목이 ‘번역가의 인간학’이다. 이 책의 글들이 인간에 관한 진정한 앎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우연이 아닌데, 번역 대상이 된 모든 책에서 원저자가 각기 그 나름의 심오한 인간학을 개진할뿐더러 나 역시 이 글들을 통해 그 각각의 인간학에 비평적 반응을 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인간학을 근본에서 추동한바 이보다 더 중요한 원동력은, 이 책의 목차에서 보는 열한 권의 책 가운데 여섯 권이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지학을 직간접의 자기 철학으로 삼는다는 데에 있다. 이 책의 몇 편의 글에서 간략히 소개하는 바와 같이, 루돌프 슈타이너야말로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에 관한 앎의 학문, 즉 인지학(人知學, 人智學)의 체계화와 현실 세계 속에서의 실현을 평생의 과업으로 추구한 사람이다. 번역서에 부치는 내 글들이 이렇게 책으로 묶여 나올 수 있었던 데에도 그 에너지가 크나큰 힘이 되었다.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본질적인 지혜를 담은 옛이야기와 미술 작품을 다룬 책에 관한 글에서, 오늘날 세계시민 시대의 바람직한 외국어 공부의 정신과 방법을 논한 책에 관한 글까지, 이 열한 편의 글은 인간의 역사 과정에 나타난 문학과 예술 작품과 고전 저작, 그리고 온전히 건강한 현대인의 삶이라는 문제를 다룬 책들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인간에 관한 참된 앎과 인간 삶의 바람직한 변화 방향을 모색하는 내 나름의 인간학이다. 마지막 글은 이 열한 편의 글을 쓸 수 있게 해준 열한 권의 책을 번역하면서 얻은 문제의식을 정리하기 위해 인간에게 번역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공부하고 정리한 것인데, 외국어 공부에 관한 책을 검토한 열한 번째의 글과 연결되기도 한다. 

이 마지막의 「번역과 인간」이라는 내 나름의 번역론에서 상세히 논했지만, 번역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단순히 옮기는 일을 넘어서 제3의 ‘혼혈 언어’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이것은 필연인데, 서로 다른 자연과 역사와 문화의 배경을 가졌을 뿐 아니라, 지금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두 언어의 단어와 문장과 전체 맥락을 수학의 숫자처럼 정확히 1 대 1로 대응시키는 게 사실은 불가능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번역은 일차적으로는 물론 ‘옮기는’ 작업이지만, 그래서 출발어와 도착어를 ‘섞어서 연결하는 제3의 언어’를 통해서만 그 작업도 가능하다. 이는 번역의 언어가 출발어가 담은 본래의 뜻과 도착어의 독립적 특성을 변질시키거나 훼손한다는 뜻이 아니다. 거꾸로 번역은 도착어와 출발어 모두의 잠재력을 확장하고 심화하면서 원본의 내용을 옮기는 행위이며, 이러한 확장과 심화를 추구하는 번역이 바람직한 번역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러한 확장과 심화의 전제 조건에 관해서도 「번역과 인간」에서 썼다.

이 책에 실은 글들이 시간 순서에 따라 ‘옮긴이의 글(또는 말)’에서 ‘해제’로 진화한 것은, 무엇보다도 내가 번역한 원저에 내재하는 도저한 인간학이 내게도 인간에 대한 탐구욕을 촉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번역 해제를 통한 이러한 인간 탐구는 자연스럽게 비평과 에세이 또는 ‘비평 에세이’라는 형식을 취했다. 지금과 같은 미증유의 어지러운 세계사적 세태 속에서 인간과 인간 삶의 본질을 어떻게 볼 것인지가 오늘날 역시 인간학의 핵심이니, 논자의 분명한 진선미의 가치 기준과 자유로운 정신을 핵심으로 하는 비평과 에세이 또는 비평 에세이라는 글쓰기 형식이 인간학과 만나는 것 또한 필연이었다. 그런데 이 비평 에세이의 대상이 되는 원저들이 사계의 진정한 전문성 또한 담고 있어서 관련된 참고 자료 또한 많이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의 글들이 각주가 많이 달린 학술 논문의 성격 또한 띠는 것은 그 때문이다. 참고 자료의 출처를 밝히지 않는 지식 도둑질(표절)을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는 게 한국 사회의 치명적이고 수치스럽고 고질적이며 그야말로 후진적인 핵심 병폐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에서도 나는 그 각주들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데 번역은, 정도 차가 있을 뿐, 본질상 애초부터 인간학과 직간접으로 연관될 수밖에 없다. 출발어와 도착어라는 두 언어의 다름, 그 다름의 바탕을 이루는 자연과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 추구가 인간 삶의 다름, 그리고 나아가 그 다름의 사이를 연결하는 보편성에 대한 탐구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리고 이 보편성이 거꾸로 번역의 ‘옮기는’ 작업을 가능케 한다). 이와 관련하여, 루돌프 슈타이너의 설명을 빌리자면, 인간이 물질로 된 육체의 존재임과 동시에, 그 육체 안팎의 원리를 관장하는 생명과 영혼과 정신의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번역에 관해 논하면서 인간이 물질 육체의 존재일 뿐 아니라 생명과 영혼과 정신의 존재임을 재확인하는 것은 특히 요즘 세태에서 매우 절실한 일이다. 인공지능에 의한 기계 번역이 인간의 번역을 대체할 수 있으리라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러한 주장은 인간을 물질만으로 이루어진 존재로 보는 일종의 환원주의에 근거한 것이다(인공지능이 시도 쓰고 작곡도 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근본적 무력감을 조장하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생각에 근거한다면, 위에서 말한 번역론은 모두 부정될 수밖에 없다. 기계 번역이 인간의 번역을 대체할 수 있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수준의 번역, 즉 기계와 물질의 차원을 다루는 이른바 일부 ‘실용’ 번역에서만 그렇다.

‘기계 번역에 의한 인간 번역 대체론’을 새삼 심각하게 문제 삼는 것은, 이 문제가 번역 너머의 보편적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이 문제는, 인간과 기계(물질)의 경계를 허물고, 나아가 인간의 본질을 기계(물질)와 같은 것으로 보는 더 큰 환원주의, 즉 오늘날의 물질 환원주의(줄여서 말하자면 ‘유물론’)가 낳은 여러 문제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 더 큰 환원주의를 상징하는 현상이 이른바 메타버스 신드롬이다. 기계가 만들어내는 ‘가상 현실’과 ‘진짜 현실’의 경계를 없애는 메타버스 기술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필연의 첨단 기술인 듯이 주장하는 이들의 사고방식의 배경이 무엇인지, 이 기술의 ‘실용적 이득’을 논하게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면밀하게 따져보아야 한다(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이나 상태를 뜻하는 ‘현실’과 실물처럼 보이는 거짓 현상을 뜻하는 ‘가상’이 결합한 ‘가상 현실’이라는 말 자체도 실은 어처구니없이 모순되는 말인데, 실제 우주보다 높은 가상의 우주라는 뜻의 ‘메타버스’라는 말에 담긴 오만함은 이 말뜻처럼 하늘을 찌른다. 그러나 메타버스 개념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비판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이와 같은 물질 환원주의 또는 유물론이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지 나는 강단에서 여실히 확인하고 있다. 한두 가지 사례만 소개하자면 이렇다. 연전에 어떤 학생은 자신의 기말보고서 주제와 관련하여 나와 토론하면서 인간의 몸에 인간의 뇌를 대체하는 인공지능을 심은 사이보그가 인간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는 주장을 강력하게 했다. 그 학생하고 충분한 토론을 할 수 없었던 게 지금도 아쉬운데, 그 학생은 인간 본연의 느낌과 의지도 인공지능의 기계 작용과 본질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또한 지난 학기에 한 학생은 어느 수업의 발표에서 개별 인간의 차이가 각 인간의 유전자 물질 조합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강의하듯 펼쳤다. 그런데 기묘한 것은, 인간의 본질이 그러하니 개별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데에 너무 좌절하거나 과도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도 좋다는 게 이 학생의 결론이라는 점이었다. 이 학생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는데, 나는 이 학생에게서 짙은 ‘허무주의’를 보았다. 이 학생이 주되게 참고한 책이 『이기적 유전자』였다(이 학생하고는 나중에 따로 만나서 제대로 된 토론을 한번 하려고 한다). 

번역(론)에 관한 내 책 『번역가의 인간학』을 소개하면서 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번진 것 같지만, 이 모든 이야기가 내게는 주제가 같은 하나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주제는 이 책의 제목이 말하듯이 인간에 대한 참된 앎이다. 이 책은 그 앎의 문제를 번역론을 매개로 다룬 것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의 적극적 의미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실제 번역 작업을 포함하여 넓은 의미의 참된 번역 공부는 외국어와 모국어의 차이를 살펴보는 일이면서 역설적으로 보편적 인간성의 탐구를 촉진한다. 따라서 제대로 된 번역 공부는, 개별 주체에게는 정신적 성장의 좋은 계기가 되고, 인간 사회 전체에는 진정한 소통의 중요한 보루가 된다. 또 한 번 강조하건대, 인간의 본질에 관한 잘못된 담론이 횡행하는 오늘날에는 더더욱 그렇다.


정홍섭 아주대·국문학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및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현재는 아주대학교 다산학부대학 교수이다. 역서로 『감의 빛깔들』, 『전설의 야수 연대기』, 『아일랜드 왕자』, 『나리가 짠 햇빛 목도리』, 『상상력과 인지학』, 『파르치팔과 성배 찾기』, 『코페르니쿠스: 투쟁과 승리의 별』, 『발도르프 학교 외국어 교육』, 『신성한 씨앗』, 『에드먼드 버크 보수의 품격』,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 『존 스튜어트 밀의 사회주의론』, 『탐욕사회와 기독교 정신』, 『스스로 지키는 온건강』, 『생각을 확장하다』, 저서로 『채만식 문학과 풍자의 정신』, 『소설의 현실 비평의 논리』, 『영어공부와 함께한 삶의 지혜를 찾는 글쓰기』, 편저로 『채만식 선집』, 『치숙』, 『원본비평정본 탁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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